Ⅰ. 서론
Ⅱ. 원불교의 이상적 인간상
- 본연지성(本然之性)
- 기질지성(氣質之性)
- 이상적 인간상
- 처처불상과 사사불공
Ⅲ. 니체의 위버멘쉬
- 니체의 인간관(人間觀)
-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변화
- 위버멘쉬(Übermensch)
Ⅳ. 처처불상과 사사불공. 그리고 위버멘쉬
Ⅴ. 결론
Ⅰ. 서론
이상(理想)이라 함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를 의미하며, 철학적인 의미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 절대적인 지성이나 감정의 최고 형태로 실현 가능한 상대적 이상과 도달 불가능한 절대적 이상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여 본다면 이상(理想)은 ‘우리가 꿈꾸는 모습이며, 닮아가기 위한 목표이자 목적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이상에 대해 추구하는 이유는 현실이 추구하는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은 이상으로써 존재할 수 있게 되고, 암울한 현실일수록 더욱 찬란한 이상을 꿈꾸게 된다. 이 같은 관점으로 생각해보면 사람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 등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상적 인간상’에 대해 제시되온 것이다.
원불교의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는 1891년부터 1943년까지 일제강점기라는 매우 혼란한 세상 속에서 살았고, 서양철학의 대가인 니체는 1844년부터 1900년까지 제국주의에 입각한 식민지 확장정책과 그에 따른 각국의 전쟁이란 혼란스런 세상 속에서 살았다. 그러한 세상에서 ‘그들이 그리워한 이상적인 인간상은 과연 어떠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소태산과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에 대해 알아보고 비교함으로써 상통점을 찾아보려 한다.
Ⅱ. 원불교의 이상적 인간상
어느 종교에나 교조가 있고, 종교의 교리에는 교조의 뜻이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교를 알기 위해서는 그 종교의 교조의 인생과 사상 역시도 충분히 연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원불교는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가 1916년(원기1년) 4월 28일에 궁극적 종교체험인 대각(大覺)을 이룸으로써 창립되었으며, 법신불일원상(法身佛一圓相, ◯)을 종지로 하여 정신개벽을 주창하였고, 불법(佛法)의 시대화ㆍ대중화ㆍ생활화를 표방하는 새 종교교단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번 단락을 통하여 원불교의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가 어떠한 인간관을 가졌고, 그 인간관에 바탕하여 원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은 어떠한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 본연지성(本然之性)
소태산은 인간의 본성을 성품, 심지, 일원, 자성 등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름은 각각 다르나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표현한 것과는 달리 선악 이전의 체(體)와 용(用), 유(有)와 무(無), 변(變)과 불변(不變), 유상(有常)과 무상(無常), 동(動)과 정(靜) 등으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였다. 이러한 소태산의 성품관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성품이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
「사람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여 선과 악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므로, 선한 환경에 처하면 자연히 그 선에 화하기 쉽고 악한 환경에 처하면 자연히 그 악에 물들기 쉽나니라.」
위와 같이 소태산은 선과 악의 분별 이전에 동(動)과 정(靜)의 상태를 먼저 파악하여 인간의 본성이 정해 있을 때는 선하다 할 수도 없고 악하다 할 수 없는 선악 이전의 초월 상태로 보았고, 동해 있을 때는 능히 선한 상태일 수도 있고 악한 상태도 될 수 있어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선악 내지는 다른 여러 상태로 무한히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라고 보고 있다. 또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절대의 가치와 존엄성을 가진 진리적 불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았다.
소태산의 인간에 대한 성품관은 사람의 성품이 동함과 정함의 기준에 따라 사람의 성품을 지극한 선의 경지인 지선(至善)의 측면과 또 능히 선할 수도 능히 악할 수도 있다는 능선능악(能善能惡)의 가능성의 존재로서 본성적인 면과 함께 현상적으로 드러난 기질의 차이를 모두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 기질지성(氣質之性)
본성에 있어서는 서로 다름이 없지만 기질지성은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소태산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본성만으로 보지 않고 현존재의 차별도 아울러 보았다. 즉 인간은 본성에 있어서는 남녀노소 선악귀천 누구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에 바탕하고 있지만 우리가 서로 다각적으로 관계하는 현상적 인간은 사람마다 각각 특성이 있다고 하며 이러한 개별성은 각자가 과거에 여러 가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이차적으로 형성된 것이 기질화되어 지금 현재의 기질은 미래의 기질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현재의 기질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변화해 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보는 삼세관적(三世觀的) 인간관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질의 차이는 인과보응의 진리에 따라 과거 존재가 전이되어 나타난 결과이며 또 그 결과는 다시 미래세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본연지성의 측면에서 보면 현존하는 한 인간이 본질적으로 절대 무차별의 체성(體性)에 바탕 되어있지만 기질지성의 측면에서 보면 스스로 환경과 작용한 것이 원인이 되어 모든 차별의 특징을 나타내게 되므로 모든 인간은 그 성격이 같을 수 없으며 각각 개체성을 가지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성품은 원래 선악이 없는 것이나 습관에 따라 선악의 인품(人品)이 있어지나니 습관은 곧 당인의 처음 한 생각이 좌우의 모든 인연에 응하고 또 응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
즉 소태산은 인간의 개체성이 습관에 따라 형성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저 해가 오늘 비록 서천에 진다할지라도 내일 다시 동천에 솟아오르는 것과 같이, 만물이 이 생에 비록 죽어 간다 할지라도 죽을 때에 떠나는 그 영식이 다시 이 세상에 새 몸을 받아 나타나게 되나니라.」
소태산은 전생 현생 내생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연장으로 설명하고, 전세(과거)에 닥은 바 정도에 따라 현세(현재)에 나타난 것이 개성이며 모든 인격의 차이라고 하였다. 불교 사상에서 인간의 영식이 삼세인과로 윤회되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設) 중 무지(無知)를 의미하는 무명(無明)이 있는데, 이 무지가 범부가 되는 원인이 되며 일체의 모든 번뇌의 근본이자 일체의 악업의 원인이 된다고 보므로, 기질지성적 측면에서 본 모든 인간의 차별은 본래의 차별이 아니라 무명으로 인하여 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해 조성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질지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미래 또는 미래 생에 다른 특성으로 계속 변해 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본연지성의 인간 성품의 본질적인 면과 기질지성의 차별적인 면을 통해서 무한한 변화가 가능한 존재로 보는 것이 소태산의 성품관임을 알 수 있다.
- 이상적 인간상
원불교적 관점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은 보은행(報恩行)을 실천하는 인간, 공익을 실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소태산은 인간이 본질상에서는 우주의 본질, 만물의 본질과 둘이 아니므로 모두가 평등이요 하나이나 이 우주의 주인은 바로 인간임을 밝히고 있다.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요 만물은 사람의 사용할 바이며, 인도는 인의가 주체요 권모술수는 그 끝이니, 사람의 정신이 능히 만물을 지배하고 인의의 대도가 세상에 서게 되는 것은 이치의 당연함이어늘…….」
「천지에 아무리 무궁한 이치가 있고 위력이 있다 할지라도 사람이 그 도를 보아다가 쓰지 아니하면 천지는 한 빈 껍질에 불과할 것이어늘 사람이 그 도를 보아다가 각자의 도구같이 쓰게 되므로 사람은 천지의 주인이요 만물의 영장이라 하나니라. 사람이 천지의 할 일을 다 못하고 천지가 또한 사람의 할 일을 다 못 한다 할지라도 천지는 사리간에 사람에게 이용되므로 천조의 대소 유무를 원만히 깨달아서 천도를 뜻대로 잡아 쓰는 불보살들은 곧 삼계의 대권을 행사함이니, 미래에는 천권(天權)보다 인권(人權)을 더 존중할 것이며, 불보살들의 크신 권능을 만인이 다 같이 숭배하리라.」
인간의 정신이 만물을 지배하여 인의(人義)의 도(道)가 세상에 서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천지의 무궁한 진리인 만물을 살리는 상생의 도를 체 받아서 만물을 살리는 특별한 권능이 있기에 인간을 천지의 주인이며, 만물의 영장이라 밝히고 있다.
이러한 소태산의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인간관에 대해서 송천은(1977)은 인간본성에 대한 그의 깨달음과 주인의 입장에서의 역할인 만물의 원만한 통솔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이 만물의 주인이요 지배적인 입장에 있다는 소태산의 사상은 인간에 의한 만물의 정복 및 이용의 합리화가 결코 아님을 밝혔다.
소태산은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구체적인 이상적 인간상을 자주적 인간상, 원만한 인간상, 보은 공도적 인간상의 세 가지로 밝힐 수 있다.
첫째, 자주적인 인간상이다. 일반적으로 자주적이란 ‘정신수양 공부를 오래하여 얻게 되는 수양력으로 정신이 철석같이 견고하여 천만 경계에도 흔들리거나 끌려가지 않는 힘’을 의미하는 정신의 자주력, 육신의 자활력, 경제적 자립력의 세 방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신수양 공부를 통한 맑은 정신력을 갖춘, 사리연구 공부를 통한 밝은 지혜력을 갖춘, 작업취사 공부를 통한 바른 실천력을 가진 인간을 말한다. 원불교에서 지향하는 인간상은 정신과 육신을 함께 닦아나가는 영육쌍전(靈肉雙全)의 견지에서 실천을 통한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신체를 양성하는 정신의 자주력과 육신의 자활력 그리고 절약과 근로를 통한 경제의 자립력을 얻어 자주적인 인간상을 의미한다. 특히 바른 실천력이란 일원상의 진리를 믿고 그 진리의 올바른 깨달음을 실생활에서 원만하게 활용하는 것으로 어느 한 편에 치우치거나 모자람 없는 중도(中道)행을 함으로써 원근친소(遠近親疏)와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끌림 없이 법도에 맞게 행동하고 모든 일을 오직 공변되게 처리하는 인간형인 것이다. 이는 「정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할 것이요, 부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죽기로써 아니할 것이요.」라는 항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이 원불교에서는 교조에게 맹신하거나 맹종을 주장하지 않고 각자 독자적으로 수행하여 자주력을 얻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소태산은 훈련법을 제정하여 이 길을 더욱 다지고 있다.
둘째, 원만한 인간상이다. 원만한 인간상이란 어느 한편에 치우치거나 국집한 편협성을 지양하고 양단(兩端)을 두루 수용하면서 조화를 통한 새로운 국면을 여는 창조적인 인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병행, 이치와 일의 병행, 정신과 육신의 쌍전(雙全), 도학과 과학의 병행 등을 주장하는 점은 교리 전반에 병진(竝進)사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중요한 인간적 자질이라고 보여진다.
셋째, 보은공도적(報恩公道的) 인간상이다.
「지은 보은은 우리가 천지와 부모와 동포와 법률에서 은혜 입은 내역을 깊이 느끼고 알아서 그 피은의 도를 체 받아 보은행을 하는 동시에, 원망할 일이 있더라도 먼저 모든 은혜의 소종래(所從來)를 발견하여 원망할 일을 감사함으로써 그 은혜를 보답하자는 것이며, ··· <중략> ··· 무아 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 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위 내용에 따르면 우리는 사은의 은혜 속에서 태어나서 사은의 은혜로 살아가며, 사은의 은혜에 보은 불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항상 사은의 은혜에 감사보은하며 살아가는 사람, 즉 사은의 공물(公物)이다. 피은의 자각에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신념으로 자신보다 먼저 공(公)을 생각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생활이다. 이는 더 나아가 나의 목숨을 바쳐 일할 수 있는 공익의 일터를 발견하게 되어, 사무여한(死無餘恨)으로 사는 인간상이다(서경전, 1988).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은의 은혜로 뭉쳐졌기 때문에 사은의 무한한 은혜를 크게 깨달아서 그 은혜에 보은하고 감사하는 생활이며, 내 자신 내 가족만이 아닌 이타(利他)의 정신을 확산하여 공익을 실천하는 인간상이라 하겠다.
보은공도적 인간상은 개인의 사사로움보다는 공익을 앞세우는 이타행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소태산은 공(公)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무아 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 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세계에서 공도자 숭배를 극진히 하면 세계를 위하는 공도자가 많이 날 것이요,
국가에서 공도자 숭배를 극진히 하면 국가를 위하는 공도자가 많이 날 것이요,
사회나 종교계에서 공도자 숭배를 극진히 하면 사회나 종교를 위하는 공도자가 많이 날 것이니, 우리는 세계나 국가나 사회나 교단을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공헌한 사람들을 그 공적에 따라 자녀가 부모에게 하는 도리로써 숭배하자는 것이며, 우리 각자도 그 공도 정신을 체 받아서 공도를 위하여 활동하자는 것이니라.」
이처럼 소태산의 보은공도적 인간상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는 오늘날의 사회현실에서 교육을 통하여 실천해 가야할 인간의 중요한 덕목이라 보여진다. 이를 통하여 정신·육신·물질로 남을 위해 봉사해 나갈 대 물질만능주의가 갖는 비인간화나 물량주의의 사회적 불평등이 극복되어지고 원만하고 평화한 사회로 전환될 수 있는, 오늘날 사회에 절실히 요청되는 이상적인 인간적 자질이라 보여진다.
- 처처불상과 사사불공
원불교 교리를 쉽게 드러내는 교리표어 중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는 표어가 있다. 뜻은 ‘곳곳이 부처님, 일마다 불공’이고, 원불교적 삶의 태도를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대표적 교의이며, 이는 원불교의 원만한 신앙생활의 표준이요, 그 실천법이다.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나니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소태산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절대의 가치와 존엄성을 가진, 진리적 불성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신앙의 대상인 일원상의 내역은 곧 사은이며 그 사은의 내역은 우주만유 천지 만물 허공법계이므로 곧 우주만유 천지 만물 허공법계가 다 일원상과 같은 존재이기에 절대의 가치와 존엄성을 가진, 진리적 불성을 간직한 부처인 것이다.
「불공하는 법도 불공할 처소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공하는 이의 일과 원을 따라 그 불공하는 처소와 부처가 있게 되나니, 이리 된다면 법당과 부처가 없는 곳이 없게 되며···」
소태산은 우주만유 자체가 처처불이기 때문에 우주만물 그 자체에 불공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처처불상이기 때문에 사사불공인 것이다. 이는 우주만물이 사은이고, 사은의 은혜에 보은하는 모든 행위는 곧 불공이기에, 보은즉불공(報恩即佛供)이다.
따라서 자주적이고 원만한 인간상을 갖추고, 우리가 사은의 공물임을 깨달아 보은하기 위해 선공후사, 사무여한의 정신으로 불공을 행하는 인간상은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행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Ⅲ. 니체의 위버멘쉬
니체는 독일 사람으로 19세기에 활동한 학자이다. 급진적인 사상으로 대륙철학,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철학의 근간을 마련했다.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와 더불어 현대 인문학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기도 하다. 니체는 특유의 공격적 비판으로 인해 어떤 철학자보다 넓은 사상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며, 평가가 극으로 갈린다. 이런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니체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보며 시작하겠다.
- 니체의 인간관
인류의 역사상 다양한 인간관이 존재해 왔다. 서구에서는 그리스 철학의 태동 이후 이성을 중심으로 인간을 파악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희랍인들은 인간의 본질을 이성으로 보았고,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신과의 관계 속에 인간의 지위를 설정하는 기독교적 인간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진리 개념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니체의 진리에 대한 철학은 허무주의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인류에게 니체가 그 극복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그의 새로운 인간관의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니체의 통찰은 그의 사상 전반에 걸쳐 전통 사상과는 다른 사유 전개를 이끌어 내는데, 인간에 대한 의무 규범으로 가득 찬 도덕의 계보학적 분석과 기독교를 포함한 전통 형이상학을 비판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니체는 전통 형이상학과 관련하여 “온갖 오류 가운데 가장 나쁘고 지루하며 위험한 것은 독단론자들이 저지른 오류, 즉 플라톤의 순수 정신과 선 자체의 고안이었다.”라며, 플라톤의 철학을 부정하며, 고대 그리스 철학 이후의 서양 가치 규범으로 인해 유럽인이 병들고 타락한 것으로 파악한다. 니체의 비판은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며 기독교 도덕에까지 이어진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실체로 설정한 절대적 신을 거부하고 기독교 성직자 계층이 부정하고 억압해야 할 대상으로만 본 인간의 본질적 현상들을 오히려 긍정하고 용기 있게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억눌러져야할 감각의 대상으로서의 육체가 니체에 의해 삶 자체의 현상으로 재인식되고, 욕망과 같은 의지는 삶의 근원적 충동으로 재해석된다. 니체는 현실을 이원론적으로 파악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부정하며 그만의 고유한 인간상을 제시해 나간다.
즉 니체에 따르면, 인류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치에 기반한 종교를 믿고 신이라는 형이상적 존재에 의지하게 됨으로써 주인도덕을 잃어버리고 노예도덕에 길들여지게 되어 고귀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그 결과로 삶의 의미를 잃고 허무주의라는 시대 혼란을 맞이하였으니, 이 허무주의를 극복한 건강한 인간이야말로 이상적인 인간상이라고 한다.
-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변화
니체는 본인이 제시한 이상적인 인간상, 허무주의를 극복한 건강한 인간을 알기 전에 배워야할 것들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이야기한다. 바로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관한 것이다.
「나 이제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참고 견뎌내야 할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거운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마다하지 않고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낙타는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사자가 된 낙타는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자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도 한때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을 더없이 신성한 것으로 사랑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더없이 신성한 것에서조차 미망과 자의를 찾아내야 한다.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서 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변화는 낙타이다. 낙타는 많은 짐을 지고 있지만 즐거워하는 정신을 말한다. 짐을 지기위해 무릎을 꿇고, 짐을 묵묵히 지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를 통해 니체는 전통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자기를 비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노예적 정신을 설명한다. 낙타가 자신을 낮춤으로써 얻고자하는 것은 신과 조상이 언약한 저 세상의 낙원이다. 이승에서 삶이 고달플수록 저승의 삶은 더욱 풍요롭기에 낙타는 ‘너는 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을 묵묵히 수행한다.
두 번째 변화는 사자이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해야 한다’라고 강요하고, 모든 가치는 창조되어야 하며, 창조된 가치는 반드시 내 안에 있어야 한다고 외치는 금빛 비늘의 거대한 ‘용’과 싸움을 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은 절대적인 권력, 권위, 가치를 상징한다. 또한 의무나 당위의 목소리이다. 위의 낙타에게 ‘해야만 한다.’고 정언명령을 내리는 자 역시 ‘용’이다. 니체가 ‘용’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플라톤이 단초를 제공하고 기독교 도덕을 통해 세속화된 유럽의 전통적 가치관이다. 유럽의 전통적 가치관이 초월적 존재를 전제하고 있고, 그 존재로부터 모든 가치가 기원한다고 본다는 점은 낙타에게 정언명령을 내리는 용과 일치한다. 사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역사적으로 뿌리를 깊게 박고 있는 가치를 거부하고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려고 한다. 참된 자유를 쟁취하려는 자는 가치를 거부하고 파괴하기 위해 맞서 싸우는 사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 이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외친다.
첫 번째 변화의 낙타가 사자의 모습으로 변하였다면 그는 더 이상 어떤 주인도 섬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남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유를 향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자는 언제까지 용과 싸우면서 버틸 수 있을까? 용에게 싫다고 말하고 난 후, 사자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사자는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용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왔으나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여기서 사자는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세 번째 변화는 어린아이다.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용기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자의 힘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천진난만함, 순진무구함, 창조와 놀이’를 상징한다. 참된 자유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성취될 수 있으며, 새로운 가치 역시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도덕이나 법률, 제도는 어린아이의 행동을 심판할 수 없다. 어린아이는 사자처럼 으르렁대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굴러가는 바퀴이다.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인인 자만이 자기 세계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변화들은 진리를 탐구하거나 자유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겪어야 할 과정이다.
니체의 낙타는 정신적 부담을 나타내며, 신의 뜻에 따라 자기의 숙명으로써 정해진 생의 의미에 복종하는 자를 상징한다. 즉 신과 도덕 법칙의 숭고함 앞에서 외경심에 빠진 인간이다. 자기 자신의 뜻과 의지는 존재하지 않고, 다른 건위로부터의 요구에 무조건 복종하는, 어떤 확고한 가치체계에 둘러싸여서 그는 헌신적으로 자진하여 ‘너는 해야 한다.’는 명령에 따르는 자라는 것이다.
사자란 자신을 밖으로부터 압박하고 제압하고 있던 기존의 가치와 맞서 싸우는 용기, 중량을 벗어던진 자의 상징이다. 그의 최후의 신인 객관적 도덕과 싸우는, 지금까지의 자기의 소외를 인식하는, 그래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과 싸우는 인간을 상징한다. 그는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자유를 해방하지만 그 자유가 최후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아직 부정의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나 아직 무엇에로의 자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낙타를 지배하고 있는 ‘너는 해야 한다.’에 대하여 사자는 주인답게 ‘나는 하고자 한다.’를 맞세우지만 너무 과도한 긴장과 반항과 자기 경직이 있다. 즉, 아직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적인 의욕으로서의 새로운 참된 자유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사자가 갖지 못했던 순진무구함과 창조적 놀이를 상징하며 비로소 그것을 가진다. 니체는 고정된 가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가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받던 기존의 가치체계를 탈피한 새로운 유형의 어린아이와 같은 인간을 요구한다. 인간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기존의 가치를 강력히 거부하고 창조적인 놀이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변화’는 니체가 원하는 미래의 인간상에 대한 답을 준다. 순종만으로 살아가는 낙타의 정신을 지닌 인간은 우선 힘을 소유한, 그래서 기존의 왜곡된 가치를 거부하고 파괴하는 사자의 정신을 지닌 인간으로 변화해야 한다. 이는 또 다시 부정과 동시에 새로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어린아이의 정신을 지닌 인간으로 변화해야 한다. 새로운 유형의 인간은 외부의 도전과 자극에 대해 무조건 순응하는 인간이 아니고, 무조건 거부와 파괴만 하는 인간도 아니다. 부정과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정신을 소유한 인간이며 니체가 미래 사회의 주인으로 기대하는 인간은 이 어린아이의 정신을 소유한 인간이다.
「하나의 종족이 발생하고, 하나의 유형이 고정되고 강해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불리한 조건들과의 오랜 투쟁 아래서이다… 수는 적지만 매우 강한 특성을 가진 유형이, 준엄하고 전투적이며 현명하면서도 과묵하고 폐쇄적이고 내향적인 종류의 인간이 이러한 방식으로 세대의 교체를 넘어 확립된다… 언제나 똑같은 불리한 조건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은 한 유형이 고정되고 굳세어지는 원인이 된다.」
니체가 주장한 미래의 어린아이의 모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실적 안주로부터 탈피하려는 자이다. 이는 현실에서의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현실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니체는 가치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적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존중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대신에 삶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고양시키는 가치를 찾고 있는 것이다.
둘째, 자유의지의 소유자의 의미를 지닌다. 자유로운 인간은 범속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삶, 즉 인습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에게 의미부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셋째,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타인이 이해하지 못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욕망 때문에 대중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진정성을 보존하려고 하는 자이다.
니체의 ‘어린아이의 정신’이란 기존 가치의 거부와 동시에 ‘새로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반항을 일삼는 자를 의미하진 않는다. 어린아이의 정신을 소유한 자는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엔 긍지를 가지고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 위버멘쉬(Übermensch)
니체가 제안한 이상적 인간상인 위버멘쉬는 전통적인 인간이해를 거부하고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이해를 제시한다. 위버멘쉬라는 용어에는 중요한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 ‘위버(Über)’는 높음, 또는 자기 형성이라는 의미에서 ‘~위의’, ‘~보다 나은’ 등의 뜻을 지닌 접두어로, 인류의 자아가 자유의지라는 허구나 도덕주의의 흔적이 없는 어떤 존재의 경험으로 가장 높이 고양되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위버(Über)’는 ‘~저편의’, ‘~를 넘어서는’ 등의 뜻을 갖고 있기도 한데, 니체는 이 두 번째 뜻이 갖는 울림을 사용하여 인간을 특징짓고자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본 위버멘쉬의 의미는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위버멘쉬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는 사람이다. 위버멘쉬는 나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터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위버멘쉬요,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는 번갯불이다.」
둘째, 위버멘쉬는 본래의 자아를 찾아가기 위해 부단한 자기 극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의 상태를 넘어서서 보다 높은 단계로 극복되어가는 과정에 처해 있다.
「나 너희에게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을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 너희는 벌레에서 사람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너희는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벌레다. 너희는 한때 원숭이였다. 그리고 사람은 여전히 그 어떤 원숭이보다도 원숭이다운 원숭이다.」
니체는 인간이 벌레와 원숭이의 요소를 갖고 있으면 경멸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비유를 통해 인간의 자기극복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도 부단한 자기 극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셋째, 위버멘쉬는 자유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극복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편견이나 선입견,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기존의 관습과 틀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정신을 추구해야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할 수 있는 체험 가운데 더없이 위대한 것은 무엇이지? 그것은 저 위대한 경멸의 시간이렷다. 너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그와 마찬가지로 너희의 이성과 덕이 역겹게 느껴질 때 말이다.」
마지막으로 위버멘쉬는 이제까지의 단계를 뛰어넘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자이다.
「일찍이 사람들은 먼 바다를 바라보고는 신 운운했지. 그러나 나 너희를 가르쳐 위버멘쉬를 이야기하도록 했다. ··· 너희는 신을 창조할 수 있는가? 그러니 일체의 신들에 대해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버멘쉬는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위버멘쉬는 지상에서 구현되어야 할 이상적 인간 유형이자 삶의 목적이다. 위버멘쉬는 매순간 실현되는 모습이기에 한번 도달했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면 더 이상 위버멘쉬가 아니다. 즉 매순간 도달 가능하지만 또 매순간 도달 가능하지도 않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다. 따라서 위버멘쉬를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과 분리시켜서 미래에 언젠가 도달하게 될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허무주의, 원한, 노예 도덕의 부정성을 넘어서는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전망을 표상한다. 위버멘쉬는 신의 죽음이 촉발한 허무주의적 삶의 경험을 극복하고, 초자연적 가치들에 의존하지 않는 실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긍정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오직 긍정만을 알고 있으며 차고 넘치는 의지와 강인함으로 가치들을 창조하는 새로운 존재 양식을 구상한다. 니체는 허무주의적 상황에서 가치의 새로운 설정자 역할로서 위버멘쉬를 강조한다. 유럽 허무주의라는 역사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가치 설정자의 측면을 부각하려 했던 것이다. 니체는 이런 위버멘쉬로의 인간의 고양을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런 위버멘쉬적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피안의 세계나 초월의 세계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초월적 세계를 거부하고, 오로지 지상에서의 삶을 유일한 삶으로 받아들이며, 지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써 자기 극복적인 삶을 살고자 하며, 또 그런 삶을 영위하는 인간만이 위버멘쉬인 것이다. 또한 인류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의미와 가치의 창조자로, 더 나아가 진리의 담지자로 인식하게 하고, 자신을 긍정하고 위버멘쉬적 삶을 살기를 의욕하는 것이야말로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적 삶은 현대인들이 자본의 발달에 따라 화폐를 소유함으로써만 삶의 풍요를 유지할 수 있음에 따라 자신을 상품화하는 데서 오는 가치의 상실과 존재에 대한 허무함을 극복하는 데에도 꼭 필요한 자세라 하겠다.
Ⅳ. 처처불상과 사사불공, 그리고 위버멘쉬
지금까지 소태산의 인간관을 토대로 한 원불교의 이상적 인간상과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제 본 단락에서 동양의 대표적인 세 종교, 유교·불교·도교를 통합한 원불교와 19세기 서양철학의 대가인 니체의 관점을 비교하고 공통점을 찾음으로써, 니체와 소태산의 관점에 대해 어떠한 점이 유사한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불교는 무상 대도(無上大道)라 그 진리와 방편이 호대하므로 ··· <중략> ··· 그 중에도, 과거의 불교는 그 제도가 출세간(出世間) 생활하는 승려를 본위하여 조직이 되었는지라, 세간 생활하는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서로 맞지 아니하였으므로, 누구나 불교의 참다운 신자가 되기로 하면 세간 생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며 직업까지라도 불고하게 되었나니, 이와 같이 되고 보면 아무리 불법이 좋다 할지라도 너른 세상의 많은 생령이 다 불은(佛恩)을 입기 어려울지라, 이 어찌 원만한 대도라 하리요.」
「과거의 불공 법과 같이 천지에게 당한 죄복도 불상(佛像)에게 빌고, 부모에게 당한 죄복도 불상에게 빌고, 동포에게 당한 죄복도 불상에게 빌고, 법률에게 당한 죄복도 불상에게만 빌 것이 아니라, 우주 만유는 곧 법신불의 응화신(應化身)이니, 당하는 곳마다 부처님(處處佛像)이요, 일일이 불공 법(事事佛供)이라, 천지에게 당한 죄복은 천지에게, 부모에게 당한 죄복은 부모에게, 동포에게 당한 죄복은 동포에게, 법률에게 당한 죄복은 법률에게 비는 것이 사실적인 동시에 반드시 성공하는 불공 법이 될 것이니라.···」
소태산은 ‘정전 총서편 제2장 교법의 총설(敎法-總說)’에서 불법이 아무리 좋으나 과거 재래 불교는 출세간 생활에 본위하여 조직이 되어, 세간 생활하는 일반 사람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아 불은을 입기 어려우므로 원만한 대도임에도 원만한 대도의 역할을 하지 못함에 안타까워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후에 ‘불법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를 야기하였고, ‘정전 수행편 제10장 불공하는 법(佛供-法)’에서 사실적인 불공을 제시한다.
니체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그리스도교 비판, 즉 기존의 기독교에 대해 비판을 하며 ‘신의 죽음’을 선언한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거부했던 니체에게 있어서 차라투스트라 유형은 대립적인 유형이 될 수 있는 출발점을 형성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선악의 저편에 서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과 구별 자체를 극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니체가 재해석한 ‘차라투스트라’는 이제까지 이 세계를 지배했던 선악의 신을 모독하여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로 말할 수 있겠다.
니체에 있어서 기독교 비판은 허무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역사적 작업이다. 니체는 기독교를 “인간을 가짜로 만들고 부패시킨 결과를 초래한 일회적인 비운”으로 바라보고, 그 문제점과 상황을 직시할 때 “허무주의라는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인간 존재를 위한 가장 원대한 계획이 가능하게 될 전환의 시대”를 맞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기독교와 형이상학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의 설정이 인간을 “대지”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본연의 세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을 밝힌다. 이후 니체는 이러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관에 근거한 인간관인 위버멘쉬를 제시한다.
소태산은 재래불교를 혁신하고, 그에 맞는 이상적 인간상에 대해 처처불상과 사사불공을 실천하는 인간상을 제시하였다. 니체는 기존 형이상학적·기독교적 도덕에 의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위버멘쉬라는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다. 두 이상적 인간상은 기존 종교에 대한 혁신 또는 극복을 주장했다는 상통점이 있다.
이제 이상적 인간상에 대해 비교를 하겠다. 니체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치에 기반한 종교를 믿고 신이라는 형이상적 존재에 의지하여 거기에 길들여짐으로써 고귀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그 결과로 허무주의라는 시대의 혼란을 맞이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니체는 인간이 이미 고귀하고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보고 있다. 이는 소태산이 인간을 본래 절대의 가치와 존엄성, 진리적 불성을 가진 존재로 본 것과 유사한 관점이다. 또한 니체가 인간이 주인도덕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은 소태산이 인간을 우주의 주인으로 보는 것과 유사한 관점이다.
니체가 주장한 세 가지 정신변화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변화하고, 진정한 자유를 위해 어린아이의 정신을 제시하였다. 어린아이의 정신일 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고, 자기 욕망의 주인으로서 자기 세계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어린아이의 정신을 가진 인간은 외부의 도전과 자극에 대해 무조건 순응하지도, 무조건 거부와 파괴만 하지도 않고, 부정과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이는 소태산이 인간의 성품을 능히 선한 상태일 수도 있고 악한 상태도 될 수 있어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선악 내지는 다른 여러 상태로 무한히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로 바라본 것과 유사하다. 또한 소태산이 말한 ‘어느 한편에 치우치거나 국집한 편협성을 지양하고 양단을 두루 수용하면서 조화를 통한 새로운 국면을 여는 창조적이고 원만한 인간상 역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니체의 위버멘쉬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는 사람, 본래의 자아를 찾기 위해 부단한 자기 극복을 추구하는 사람, 자유정신을 가진 사람,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자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 답을 원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원불교에서는 사람은 사은의 은혜 속에서 태어나 그 은혜로 살아간다 하였다. 이는 곧 사람은 사은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사은의 공물로써 보은 불공하고 감사보은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기 극복이 가능하다. 우리는 사은의 은혜로 뭉쳐졌기 때문에 내 자신 내 가족만이 아닌 이타의 정신을 확산하여 공익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는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 이는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한다는 공익에 바탕한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물질만능주의가 갖는 비인간화나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는, 원만하고 평화한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Ⅴ. 결론
지금까지 원불교의 이상적 인간상과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에 대해 알아보았고 비교하며 어떠한 상통점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소태산과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은 꽤나 유사한 점들을 보이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곧 소태산과 니체, 더 나아가 다르다면 정말 다르다고 볼 수 있는 동양과 서양의 공통적인 이상적 인간상을 상정할 수 있다고 판단되고, ‘그 근본 되는 원리는 본래 하나이고, 원불교는 모든 종교의 교지를 통합 활용하여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임을 드러내줄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소태산과 니체, 더 나아가 동양과 서양이라는 다른 세계의 관점을 비교하였지만, 그 공통점을 찾음으로써 원불교의 교법이 충분히 보편화·세계화 될 수 있음을 시사해주었다.
본 논문이 전문적인 지식을 기반하여 작성된 글이 아니기에 이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은 니체와 원불교의 이상적 인간관에 대해 비교를 한 최초의 논문이기에 원불교 교학과 서양 철학의 접점을 찾아보는 것에 의의를 두고, 그를 통해 원불교의 세계화에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제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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