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학과

Wonkwang University

정전 일원상장 「일원상의 수행」의 수행 해석(강민승)

교학대학 원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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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일원상장 「일원상의 수행」의 수행 해석(강민승)

. 서론

 

. 일원상의 수행의 형성과 관계도

  1. 일원상장의 형성과 일원상 수행의 위치
  2. 일원상의 수행의 관계도

 

. 일원상 수행의 해석

  1. 기존 해석 비교분석
  2. 해석의 재구성

 

.결론

참고문헌

 

 

 

. 서론

 

 

본 논고는 일원상의 진리가 수행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어떻게 타당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또한 우리 교법에서 수행의 핵심 구조로 삼학을 논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현재 우리는 일원상의 수행을 해석할 때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 수많은 의문을 품고 작성된다. 우리가 삼학 수행이라는 교리 구조를 가지면서 일원상의 수행을 해석할 때 어떤 오류에 빠질 수 있는지도 이번 논고를 통해 말하고자 한다. 논문 작성을 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중심 주제를 어떻게 잡아갈 것인가?’였다. 논자는 제목에서도 밝혔듯이 일원상장을 비롯한 주요교리의 뜻을 다시 살피고 특히 일원상의 수행이 가진 함의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따라서 일원상의 수행을 어떤 식으로 봐야 하는지를 두고 중심 주제를 전개해 갈 것이다. 우선 내가 보는 현재 일원상의 수행은 수행 방법론 치우쳐 그 대의를 파악하고 있다. 원불교의 핵심 교리이자 신앙과 수행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일원상 진리의 특징과 발현 구조에 근거하면 일원상 수행을 수행 방법론으로만 접근해서 될 것이 아니라 목적론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한다. 수행의 목적이 수행의 정수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타고 수행문에 들어갈 것인가? 나는 이러한 흐름으로, 일원상의 수행을 해석할 때 한 편의 모습이 아니라 다각도의 모습이 존재해야 함을 주장한다.

삼학이라는 교리는 원불교에서 꽤 비중이 크다. 대중은 원불교의 수행법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삼학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필자가 느끼기에 일원상의 수행을 삼학 수행으로만 이해한다면 수행방법론에 그친 감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일원상의 수행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번 논고에서 찬찬히 살펴보면 좋겠다.

논문을 전개하는 방식은 목차에서도 나오지만 그 안에서 어떤 관점을 갖추고 주제들이 펼쳐지는지 얘기하겠다. 논문은 서론·본론·결론과 각 인용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론은 논문 작성의 이유, 논고 중심주제, 전개방식, 전반적인 결론이 담겼다.

본론 첫 갈래에서는 원불교 일원상장의 변천과 일원상 수행의 형성과정을 다룬다. 이 갈래에서는 초기 원불교의 교리가 지금까지 전개되어 오면서 일원상의 수행에 대한 소태산의 교리기조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일원상이란 개념이 어떤 식으로 심화되어 왔는지를 밝힌다. 어떤 개념을 아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그 기조를 살피고 맥락을 짚어내야 한다. 일원상은 현재 원불교 정전에 구체적으로 구조화되기 전, 틈틈이 초기 교서 속에서 그 단서가 발견되어 왔다. 특히 일원상의 수행을 도식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내용들이 있었는지 지켜보겠다. 또한 변천과정에서 자연히 생겨난 개념의 점층적 차별화도 살피겠다. 기존 개념에서의 의미 고조, 일원상장의 완결성과 그 맥락이 교리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모습을 다룬 내용이다.

본론 두 번째 갈래는 일원상 수행의 해석이다. 우선 이 논고에서는 기존 해석과 그 기틀을 살피고 다수의 관련 자료와 대조해 보려한다. 교리 해석에 필요한 개념 설명과 용어풀이, 기존 해석에서 주목할 점, 기존 해석의 타당성과 해석 성립을 위한 단서들을 다룬다. 그리고 많은 고민을 하고 근거에 대한 걱정을 한 마지막 내용은 “그래서 일원상의 수행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일원상의 수행을 해석할 때 간과하는 점을 지적하며 수행방법론과 수행목적론의 양면이 있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더불어 수행이 가진 범위를 대승적으로 확장하여 해석하는 것과 실천하기를 짚어내겠다.

본론을 마무리하고 낸 결론은 ‘앞으로 원불교의 교학 원리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하는 또 다른 의문이었다. 실은 이 논문을 쓰면서 ‘원불교의 주요 교리를 어떻게 철학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교학을 하는 입장에서 어떤 부분이 더 필요할까?’, ‘소태산이 추구한 정신적 가치는 교학 발전에 어떤 방향성을 줄 것인가?’같은 의문만 더 많아졌다. 가만히 보면 원불교의 백년은 역사만 이어온 게 아니라 함께 생각할 거리도 많이 만들어줬다. 고민하다가 나름의 답으로 결론을 내서 논고의 마지막 장을 채운다.

 

 

.일원상의 수행의 형성과 관계도

 

  1. 일원상장의 형성과 일원상 수행의 위치

 

원불교의 수행은 교리기조가 전개된 원불교 정전(正典)이 어떻게 편서 되었는지 살펴보면 그 흐름을 알 수 있다. 정전은 교리의 전체 분위기를 담은 표어와 교리도, 교조 소태산의 포문이 된 총서편, 교리의 원리와 강령인 교의편, 교리를 실생활에 실천할 수 있도록 실천방법을 제시한 수행편이 있다. 특히 이번 논고에서 주로 다룰 부분은 정전 교의편 일원상장이다. 일원상장의 역사적 발전을 살피면서 일원상의 수행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었는지 살피겠다. 또한 일원상의 수행이 원불교 수행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논의하고 싶다.

일원상서원문이 발표되기 전 일원상은 다양한 암시로 초기교서에 등장한다. 일원상이 감각적 암시에서 중심교리로 구체화되기까지 형성과정을 살며보면 다음과 같다. 1916년(원기1년) 원불교 교조 소태산(小太山 大宗師 朴重彬,1891-1943, 이하 소태산)은 대각일성을 ‘한 두렷한 기틀’로 표현했다. 1918년(원기3년) 10월 ‘일원(一圓)’이란 주제로 제자 정산(鼎山 宋奎 宗師, 1900-1962, 이하 정산)에게 시를 짓게 했고, 그 해 같은 달 구간도실 상량문에 ‘梭圓機日月’을 적었다. 1919년(원기4년) 8월에 금산사 문미에 일원상을 그려 붙인다. 그 다음 해인 1920년(원기5년) 4월 변산 봉래정사에서 제법(制法)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佛性一圓相’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후 오래도록 일원상에 대한 뚜렷한 언급이나 일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단지 1927년(원기12년)에 발간된 정식 교서 중 수양연구요론에서 일원상의 의미와 상통하는 표현이 발견하거나 현재 일원상을 형용할 때 쓰는 용어들의 모티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원상을 직접 지칭하여 사용한 표현이 아니다. 단순히 감각으로 진리적 표현을 해낸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서에 주목하는 이유는 교리의 종지인 일원상이 발달하는 과정을 살피기 위함이다.

 

한 생각으로 일만해가 가면 귀와 눈이 한가지로 맑고, 몸과 마음이 한가지로 잊어버리고, 정신과 기운이 한가지로 서늘하고 안과 밖이 한가지로 공하여, 적적하고 고요한데 깊이 빠져 정하고 담연함이 하나에 이르러서, 먼저 나의 한 마음 하늘은 온전히 한 뒤에 정신 기운이 냉냉하여 맑고, 정신 빛이 형형하게 밝아서 비치지 아니한 땅이 없고 통하지 아니한 이치가 없나니라.

 

정(定]이란 자는 하나로 이에 정하며 모든 다른 도리가 나의 짓는 바에 더함이 없고 저 허다한 범술이 세상을 의혹케 하는 데에 빠지지 아니할 뿐이요. 정(靜)이란 자는 하나로 정(定)한 데 돌아와서 다시 다른 데로 움직이지 아니하여, (중략) 한 뜻 정하는 데에 서매 다섯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한즉 맹자의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한 것과 노자의 근본에 돌아와 고요하다 함이 다 이 정정(定靜)을 이름이니라.

 

소태산은 정정요론의 서론에서 “인생의 요도는 수양에 있고 수양의 목적은 연구에 있고 연구의 목적은 혜복을 구함에 있다. 그러나 모든 교법이 세상에 유행하여 사람마다 혜복을 구한다 하나, 실상 그 근원을 알지 못함으로 학설만 익번하고 고해가 점심하도다. 본서는 가장 간명히 수양의 본원을 알리기 위하여 삼강령 팔조목과 각 문목 순서 등을 설명하였으니, 본회 제씨는 수양의 빠른 힘을 얻어 연구의 사항을 밝혀내어 암매한 인간의 선도자가 되시기를 절망하는 바-라.”라고 밝힌다. 또한 수양연구요론 편찬의 최종목적을 “도문에 모든 학도는 많이 이 책을 외우면 기운이 화(和)하고 정신이 화(化)하여 가히 정(定)하고 고요함을 얻으리니, 닦아 밝혀서 이에 그 성품을 회복하는 것이 가할지니라.”로 둔다했다. 이러한 의도와 교서 속에 적힌 표현들을 미루어 당시에 소태산의 수양에 대한 감각이 현재 정립된 일원상장과 어떠한 관계성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원기5년부터 12년까지 직접적인 일원상(혹은 일원)에 대한 언급을 교리나 기타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시 일원상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살펴보면 1932년(원기17년)에 박대원의 설교 ‘四恩의 本體는 一個一圓相’에서 일원상이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그 해 6월 ‘一圓의 大團結’에서도 일원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이어 7월 정산의 ‘圓覺歌’와 ‘一圓大德 결과로다’가 나온다. 그러나 당시의 교서인 보경육대요령에서 일원상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일원팔괘로 표현되어있다. 이것은 당시 일원상은 팔괘의 모습과 일원상 진리의 형상을 이념적으로 이을만한 관계성을 열어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일원상은 그 위치가 우주 혹은 자연의 도에서 그친 감이 있다. 사은 신앙을 포괄하고 삼학의 바탕이 되기에는 원리와 실재의 연결이 부족했다. 일원상 신앙에 대한 개념이 본격화된 것은 원기20년 원불교 총부 대각전(大覺殿)에 일원상을 봉안하면서 부터다. 이 시기에 일원상 신앙의 대상을 사은과 연결시키며 심고라는 개념을 만들었지만 아직 일원상을 수행으로 확장시키지는 못했다.

1937년(원기22년)에 드디어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법설과 글들이 등장한다. 송도성 글과 송규의 논문이 발표된 후 소태산은 ‘一圓相을 模本하라’는 설법을 한다. 하선 해제식에 한 이 설법은 일원상의 모습을 본받으라는 일원상 수행 방법을 제시한다. 다음 해 8월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법설을 하며, 11월에 심불 일원상을 봉안하는 규정을 발표한다. 심불일원상 봉안에 대한 발표와 함께 한 달 후 ‘心佛 O如來之佛性 四恩之本源’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때부터는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또한 사은을 일원상과 어떻게 연계해 갈 것인지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1938년(원기23) 12월 동선에서 ‘心佛一圓相內譯及誓願文’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일원상서원문이 발표된다. 당시는 법신불이 아닌 심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소태산이 직접 지은 법문으로 나온 심불일원상서원문은 그 후 1941년(원기26) 1월 28일 동선에서 게송, 2월 28일 원상 법어로 그 구조가 완성되었다. 1943년(원기28년) 3월 20일 불교정전에서 심불이라는 표현이 법신불로 바뀌고 일원상의 진리, 일원상의 신앙, 일원상의 수행, 일원상서원문, 일원상 법어, 게송 대신에 일원상의 유래가 들어간다. 후에 정산에 의해 교전편수위가 소집되고 1962년(원기47년) 지금의 정전으로 다시 교서 발간이 이루어진다. 이때는 게송은 일원상장으로 편입되고 일원상의 유래는 빠지게 된다. 이로서 일원상은 신앙과 수행의 종지로서 자리매김한다. 비교적 먼저 발전한 사은사요와 삼학팔조를 포괄하면서도 그에 대한 원리가 되는 법을 폈다. 상당히 조밀한 논리구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에 논자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원불교 교리의 정립이 이어졌고 법신불 일원상이라는 교리 체계 형성이 근 50년 정도 밖에 안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논자는 일원상장 해석을 더 다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생각한다. 특히 주요 교리 전반의 구조들을 살피면서 일원상장과 관계할 때 논리적 결함이 없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잠깐의 일원상장의 형성사만 보더라도 원불교 교리의 기조정신과 소태산의 포부가 각각의 교리 용어에 잘 담겨있는지 고민한 흔적이 드러난다. 또한 대도정법의 범위를 좀 더 고려해 평등정신에 따른 교리기조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지속적으로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그 속에서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게 된 일원상의 수행을 살펴보고 현재 일원상의 수행을 해석할 때 가지는 한계도 지적하고 싶다.

 

  1. 일원상의 수행의 관계도

 

논자는 일원상의 수행을 볼 때 일원상서원문을 해석의 기점으로 둔다. 초기교서로 일원상의 형성 역사를 보면 일원상서원문이 발제된 이후가 일원상의 수행이 가진 교리체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35년(원기20년) 이후 활발해진 일원상에 관한 자료를 보면 점차 일원상을 가지고 신앙체계를 잡아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수행체계를 확립하려는 시도가 보인 것은 소태산이 친제한 심불일원상내역급서원문을 발표한 후 부터이다. 심불일원상내역급서원문에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고 사리를 원만하게 알고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의 등장이 중요하다. 이는 서원문 내에서 삼학 공부를 하여 진급하는 길을 열어둔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일원상 수행을 하는 데에 방법론으로 삼학이 제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삼학으로 일원상 수행과 연계해가는 과정을 역추적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원상서원문의 구조를 보면 상부는 진리 그 자체인 본체론, 불변의 세계와 변화의 세계, 변화에서도 원인이 되는 것과 과정과 결과를 이루는 것들을 나눌 수 있고, 불변과 변화를 무량하게 전개해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하부는 신앙과 수행을 하게 될 대상으로 시작하고, 신앙수행의 방법을 제시하며 수행의 목표와 신앙수행의 궁극적 목적으로 결론지어진다.

 

일원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이요, 유무 초월의 생사문(生死門)인 바, 천지·부모·동포·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범부·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能以成有常)하고 능이성 무상(無常)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 자연(如如自然)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 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과 만물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생(四生)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六途)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恩生於害)로 혹은 해생어은(害生於恩)으로 이와 같이 무량 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體性)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

 

일원상서원문을 보면 신앙과 수행을 아우르고 있다. 그러나 그 부분만 본다면 수행의 방법과 목적이 모두 드러나 있음을 간과할 수 있다. 일원상의 수행과 연계해볼 때도 이 점을 간과한 채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일원상서원문에서 수행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삼학이며, 그 목표로는 진급이 되고 은혜를 입는 것에 둔다. 이는 소태산의 초기의 교리인 삼학과 신분의성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소태산은 수행의 방법과 목적까지 모두 적혀 있으며 진리와 합일해가는 과정을 신앙과 수행으로 풀어 일원의 위력을 얻는 결과와 체성에 합하는 결과를 밝혔다. 심불일원상내역급서원문을 친제할 때 이미 일원상의 수행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서원문이라는 표현에 갇히게 되면 신심(信心)으로만 서원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소태산은 서원문으로 신앙적인 측면의 신심뿐만 아니라 인류가 거듭나는 길로 구체적인 수행통로를 열어준 것이다.

이후 약 3여년이 지나 1941년(원기26년) 동선에서 게송이 발표되고 같은 기간 한 달 후 일원상 법어가 발표된다. 일원상 법어가 나온 날 여선원일지에는 서대원선진의 일원상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는 메모가 있다. 일원상의 유래가 1939년(원기24년)에 회보에 실린 것에 따르면 상당한 시간동안 일원상을 교법의 종지로 쓰려는 이유를 대중에게 전달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사은신앙과 삼학수행은 일원상의 신앙과 수행보다 대중의 입장에서 좀 더 사실적이고 실천적이기는 하지만 불생불멸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도를 담기에는 그 범위가 좁았다. 개인의 신앙과 수행이 잘 되기 위해서는 사실관계와 인과관계가 분명히 드러나야 하지만 진리적 관점에서 궁극성, 절대성과 보편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진리적 관점이 가지는 특징들을 간과하면 범인류적인 신앙수행 운동이 어려울 수 있다. 소태산이 인도정의의 법칙으로 대도정법을 선언한 이유도 보편성을 가진 상생관계를 원했기 때문이라 본다. 그런 의미에서 게송의 발표는 유래 없는 일이었다. 과거 불가에서 게송은 전법의 의미를 담았기 때문에 법을 계승하는 자에게 극비에 전해졌다. 그러한 전통적 관념을 깨고 소태산은 대중이 모인 겨울 선 훈련에서 게송을 발표하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

소태산은 제자 송도성에서 과거 칠불(七佛)의 전법게송을 해석하라 이르며 대중에게 게송을 왜 전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게송은 이중적인 요소가 결국 하나의 합의를 이뤄내는 변증구조이다. 그동안 영육쌍전, 이사병행과 같이 상반된 구성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자는 소태산의 시선이 그대로 담겨있다. 유와 무가 각각 유는 유의 역할로 무는 무의 역할로 충실하지만 끊임없이 운행하는 것을 보면 유와 무가 결국 한 덩어리이고 유라고 무라고 할 것도 없이 함께한다. 소태산의 이런 논리구조를 따르면 상반적 성격의 일이나 이치 또한 하나로 뭉쳐져 둘이 아니게 된다. 이러한 관점을 이어보면 일원상이 왜 등장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사은신앙과 삼학수행을 함께 엮어갈 수 있는 합(合)의 관점이 필요했을 것이다. 필자가 게송과 일원상의 수행을 연결하는 점도 이것에서 시작한다.

게송이 발표된 후 바로 한 달 뒤에는 일원상 법어가 발표되었다. 사실상 같은 훈련기간 중 선원대중에게 설한 두 법문을 하나의 법문으로 보자는 시각이 있다. 그렇다면 소태산은 왜 게송과 법어를 따로 떨어뜨려 발표한 것일까? 게송과 일원상 법어를 놓고 보면 게송의 근원적 성격과 법어의 현상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게송에서 진리의 객관적인 움직임을 볼 수 있다면 일원상의 법어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진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진리성을 닮아가는 법을 제시한다. 진리의 본체를 큰 원상으로 표현하면서도 인간의 육근 작용을 진리에 대조해 쓰는 것을 각각 여섯 개의 작은 원상으로 표현해 두었다. 진리를 각하면 시방삼계 허공법계가 다 오가의 소유인 줄 알라는 전제를 보면 허공법계를 개인 스스로가 소유하고 소유한 것을 알고 쓰는 데에 한도나 한정이 없음을 도출할 수 있다. 무언가를 특별히 더 알거나 배우지 않더라도 견성만 하게 되면 육근동작을 쓸 때도 모두 진리로 화(化)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때문에 일원상의 수행을 발전시켜가는 것에서도 무한계의 개념이 들어가게 된다. 진리가 자기의 소유이기 때문에 주인이 되고 주인으로 살기 때문에 상(相)이 없다. 상이 없는 개인은 국한이 없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평등한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다. 수행을 하는 수도인, 공부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이다.

일원상의 수행은 게송에 비해 비교적 늦게 정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원상 법어와 게송 그리고 일원상의 수행이 가진 연결점을 “한 큰 원상이 돌매 천만 작은 원상이 따라 도나니, 마치 원동기가 돌매 모든 작은 기계 바퀴가 따라 도는 것 같나니라.”으로 이을 수 있다. 일원상은 원불교의 전체 교리 강령을 포괄하고 있으며 각각의 특징에 맞게 구조화되어 세부적인 부분까지 연결되어있다. 특히 일원상장의 경우 각 장이 서로 정립의 근거와 교리보완으로 정밀하게 짜여있다. 이러한 부분의 기점은 단연 일원상서원문과 게송, 일원상 법어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원상 서원문은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을 기준으로 서두와 후미를 나눌 수 있다. 일원상서원문의 서두는 일원상의 진리로 후미는 신앙과 수행으로 발전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게송의 정신이 신앙과 수행을 양립하게 만들고 일원상 법어로 수행의 경지를 구체화해 원불교적 인격체까지 완성시켰다.

1943년(원기28년)에 불교정전 초판이 출간된다. 일원상의 진리와 신앙, 수행이 최초로 들어간다. 앞 선 심불일원상내역급서원문은 일원상서원문이라 바뀌어 실렸으며 법어와 일원상의 유래가 일원상장으로 엮인다. 이 당시 일원상장은 서대원의 일원상의 유래가 들어가며 교리도 또한 일원상의 유래가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일원상의 유래는 1962년(원기47년)에 지금의 정전을 편수하면서 빠지게 된다. 대신에 원기 26년에 발표한 게송이 일원상장으로 편입되고 이 또한 교리도에 위치하게 된다. 일원상장의 구성이 적은 부분이지만 불과 몇 년 만에 변경된 것이다. 이 과정이 일원상장의 전체적인 느낌을 바꿔놓기도 했지만 일원상의 수행을 볼 때도 중요한 변화가 된다.

 

 

(기존교리)서원문 이전에 일원상에 대한 개념은 기존 교서에 등장하던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만큼 선명하게 구조화되지 않았었다. 기존에 원불교 교리 중 대표적인 신앙교리는 사은이었고 수행교리는 삼학이었다. 그런데 신앙과 수행의 중심이 갑자기 일원상으로 전개된 것이다. 일원상을 신앙과 수행의 종지로 두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후 초기 교단이 강조한 몇 가지 교리 속에 내재된 개념이 지금의 일원상장을 확립하는데 분명히 기여했을 것이다. 이는 먼저 완성된 탄탄한 개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고, 다소 지엽적이던 기존 개념을 확장하고 포괄해 보편성과 절대성을 함께 가져가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 일원상 수행의 해석

 

  1. 기존 해석 비교분석(정전해의들)

 

 

  1. 해석의 재구성

 

일원상 진리를 보고 신앙, 수행 그리고 법어와 게송까지 살피면서 논자는 결국 소태산이 원하는 것은 ‘여래’, ‘파란 고해 일체 중생을 건지는 선구자’, ‘세상에 유익을 주는 자’, ‘영혼을 진급시켜가는 이’를 ‘양성(養成)하자 혹은 모두가 그렇게 되는 세상을 만들자’로 이해했다. 일원상장 중 일원상서원문에서 논자는 특히 그런 의미를 받았다. 그 이유는 일원상서원문이 일원상장의 첫 문을 열었다는 점과 일원상서원문에 내포된 소태산의 의도가 분명히 친감법문인 일원상의 진리·신앙·수행에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원상서원문을 다각도로 해석하고 일원상의 수행을 풀어볼 의미가 있다. 또한 일원상의 수행은 진리와 신앙과는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문장이나 문맥이 이전과 달리 일원상 법어와 좀 더 유사하다. 논자는 같이 나온 법문이면서 앞선 진리장과 형식이 다른 것은 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더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일원상의 진리에 속성만을 풀어 ‘삼학수행’이라는 개념에만 얽매이지 말고, 도대체 무엇이 일원상의 수행을 만들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면 좋겠다. 이 의문은 우리가 결국 수행을 해서 무엇을 얻으려 함인가와 닿아있다. 수행의 의미와 궁극은 어디에 있는가? 진공묘유의 수행문은 과연 어떻게 들어간 것인가? 이러한 물음들을 쏟아내며 일원상의 수행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몇 가지 논의할 만한 것들을 얻어냈다.

그것은 우리가 일원상의 수행을 볼 때 생각보다 지엽적이라는 점이다. 용어에 얽매인 해석이나 주요 교리만 가지고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해석을 하지 않고 일관적으로 교리문구를 풀이한다. 그래서 교리를 유연하게 바라보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법문의 대의요지를 파악할 때, 삼학을 나타내던 직접적인 단어가 들어 있는 경우에나 삼학을 풀이하지 내부에 암시되어 있는 삼학을 풀어내는 일은 드물다.

 

하루는 이춘풍(李春風)이 와서 뵈오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도덕을 배우려 함이어늘, 나는 무슨 뜻으로 도덕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이 같이 먼저 언(堰)을 막으라 하였는지 그 뜻을 알겠는가.” 춘풍이 사뢰기를 “저 같은 소견으로 어찌 깊으신 뜻을 다 알으오리까마는 저의 생각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오니, 첫째는 이 언을 막아서 공부하는 비용을 준비하게 하심이요, 다음은 동심합력으로 나아가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증거를 보이시기 위함인가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말이 대개 옳으나 그 밖에도 나의 뜻을 더 들어보라. 저 사람들이 원래에 공부를 목적하고 온 것이므로 먼저 굳은 신심이 있고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니, 수 만년 불고하던 간석지를 개척하여 논을 만들기로 하매 이웃 사람들의 조소를 받으며 겸하여 노동의 경험도 없는 사람들로서 충분히 믿기 어려운 이 일을 할 때에 그것으로 참된 신심이 있고 없음을 알게 될 것이요, 또는 이 한 일의 시(始)와 종(終)을 볼 때에 앞으로 모든 사업을 성취할 힘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또는 소비 절약과 근로 작업으로 자작자급하는 방법을 보아서 복록(福祿)이 어디로부터 오는 근본을 알게 될 것이요, 또는 그 괴로운 일을 할 때에 솔성(率性) 하는 법이 골라져서 스스로 괴로움을 이길 만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 모든 생각으로 이 일을 착수시켰노라.”

 

이 법문은 방언공사를 하는 중에 소태산이 제자에게 묻고 제자가 답한 것을 감정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속에 원불교 수행인 삼학이 들어있다. 참된 신심으로 마음을 수호하고, 시와 종을 보아 사업 성취를 보면서 자급자족하며 복록의 근원을 연구하고, 괴로운 일을 당해도 괴로운 고가 아닌 이길 힘을 얻어내는 솔성이 그 내용이다. 이 같이 충분히 문맥적 요소를 활용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이 법문을 보고 방언공사 중 소태산과 춘풍의 대화 혹은 소태산이 제자들에게 언을 막게 한 이유를 신심 확인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 법문 속에 있는 다양한 뜻이 사라진다. 일반적인 해석이 필요하지만 기조만 잘 유지한다면 해석은 다양해야 된다. 일원상의 수행을 다층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일원상서원문을 해석의 확장으로 풀어보겠다.

 

일원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이요, 유무 초월의 생사문(生死門)인 바, 천지·부모·동포·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범부·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能以成有常)하고 능이성 무상(無常)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 자연(如如自然)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 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과 만물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생(四生)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六途)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恩生於害)로 혹은 해생어은(害生於恩)으로 이와 같이 무량 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體性)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

 

‘일원’부터 ‘전개하였나니,’까지는 진리의 속성과 현현을 드러낸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이 법신불 일원상을 대하는 자세부터 보자. ‘~을 체 받는다’는 대상이 가진 특정한 모습을 무언가가 그대로 내재화해서 형상화한다는 뜻이다. 이는 ‘인간은 하늘과 땅의 도를 체 받는다’와도 같이 어떤 대상이 가진 교육적인 모습이나 진리의 형상을 그대로 본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때는 일원상의 진리가 가진 ‘공·원·정’ 세 가지 속성을 삼학으로 구현하는 게 맥락에 적합하다. 공원정의 속성을 체 받는다면 우리의 성품도 일원과 같이 비어있고 밝으며 바를 수 있다. 그래서 적실히 수호하고 적실히 알고 적실히 사용하자는 것이다.

더불어 용어 풀이에 그치지 않고 맥락으로 접근해보면 진행사조 신분의성의 구조 논리도 일원상서원문에 적용해야한다. “우리 어리석은”에서부터 “합하도록 까지 서원함”이란 구절에 신분의성의 내용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소태산은 “우리 어리석은”으로 일원상서원문의 후미를 이끌었다. “우리”는 ‘전부’이면서 ‘누구나’가 될 수 있는 표현이다. 그 뜻을 헤아리면 모두, 누구나 진급으로 분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는 건 큰 원을 믿어 세우는 것이고, 강급의 길이 아니라 진급의 길을 택한 것이 분발하는 모습이다. 인간 스스로가 진급의 주체성을 띄고 진리를 체 받는 것으로 믿고 지성으로 삼대력을 쌓으면 자연히 서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진급을 위해서는 삼학을 행해야 하고, 삼학을 행하기 위해서는 신분의성이 작용된다.

그러나 만일 진급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강한 분발이 일어날 수도, 또 그 분발이 기동력이 되어 진급할 수 있을까? 이 의문의 답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진급’이라는 것이다. 소태산의 서원이면서 모두의 서원은 진급하는 것이다. 영혼의 진급을 위해 가다보면 언젠가 일원과 같은 경지에 올라 일원의 힘을 얻고 일원과 하나가 된다. 처음부터 일원의 체성에 합하는 게 아니다. 육도 사생의 심신 작용을 따라 진급과 강급을 오간다는 내용을 다시 풀면 분발심을 내야 진급의 길로 올라간다는 것이고, 마음 낸 개인 한 사람이 해나갈 수 있는 것도 결국 진급이란 뜻이다. 진급은 나아지고 거듭나고 성장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려는 노력이 일원의 진리로 가는 핵심이다.

소태산은 우리의 분발이 무척 자연스럽고 특별하지 않다는 걸 우리에게 알린다. 누구나 삶을 살 때 아무래도 내일은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그대로 살려 “진급”이라는 표현으로 공부 길을 열어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원상서원문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더 나아지는 누군가의 모습을 그리고 그 누군가를 위해 열정과 희망을 불어넣어주면 된다. 누구의 마음도 죽지 않도록, 그 누구의 영혼도 작아지지 않도록 만드는 거다. 일원상 서원문은 후미부터 육도 사생이 진급하는 모습을 신분의성의 구조로 밝힌다. 공부심을 가진 육도 사생들이 삼학공부법을 가지고 일원이라는 목적까지 이루어 내는 것이다. 일원이 진리의 또 다른 말이라면 이러한 구조는 진리에 가까워지려는, 거의 수렴해가는 주체적인 무언가가 있어야만 성립한다. 결국 소태산의 진리관은 발휘하지 않으면 진급도, 진리적 목적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소태산은 우리의 성장 본능을 분발이라 표현했다. 내가 기어코 진급한다는 믿음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분발심, 어떻게 진급할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 의심, 이후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해서 나를 개선시켜가는 정성. 초기교서인 수양연구요론에 정정요론 속 수록된 관련 문구들을 간추려 보면 이렇듯 일원상서원문과 신분의성의 논리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선요에 이르되 큰 요긴함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가라대 크게 믿음이요, 둘은 가라대 뜻을 크게 분내는 것이요, 셋은 가라대 크게 의심 내는 것이니 의심이란 자는 신으로써 체가 되나니 심이 십 분이 있으면 의심이 십 분이 있고 깨달음이 십 분이 있다 하니 이것은 곧 정하고 고요한 빠른 법을 말함이니라.

 

큰 원이 없으면 지극한 정성이 나지 아니라고 큰 의심이 없으면 죽을 분이 나지 아니하고 큰 신이 없으면 참 의심이 나지 아니 하나니라 (중략) 한 하늘 아래에 지극히 묘하고 지극히 보패[寶貝]되고 지극히 착하고 지극히 높은 법은 오직 한 영보진국이라. 영보국은 사람사람이 각각 몸 안에 품부하여 있나니, 곧 하늘이 명하신 나의 보내 성품이니라.

 

사람사람이 각각 이 영보국이 있으니 어떠한 사람은 얻으며 어떠한 사람은 얻지 못하는고? 하고 큰 분[忿]이 나게 되면 일만 이치가 나에게 갖추고 일만 법이 여기에 갖추었나니, 오직 하나 뿐이어늘 도가 어찌 문이 많으며, 오직 하나 뿐이어늘 법이 어찌 길이 많으며, 오직 하나 뿐이어늘 사람이 어찌 많이 구하며, 오직 하나 뿐이어늘 내가 어찌 다시 의심[疑心]하리요 하고 생각한 즉 의심이 없어지고 바란 즉 의심이 있나니, 의심이 가고 의심이 오매 의심 의심할 바가 없거늘 공연히 무엇을 의심하리요. 홀연히 마음 생각을 태워 밝히면 이것이 이에 참 의심이니라. 이 의심 아래에 일만 의심이 고요하고 적적하여 주야를 분간 못하여 꿈도 같고 참도 같아서, 비고 적적한 천지에 오직 한 의심 뿐이어늘 이게 큰 의심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일원상서원문은 별 다른 게 아니다. 진행사조를 진리의 속성과 함께 풀어낸 것이다. 덕분에 일원상서원문에서는 공부하는 삼학이 나온다. ‘~하는 공부’로 진급하는 방법이 제시된다. 공부하지 않으면 진리의 속성과 맞닿을 수 없다는 뜻과 분발하는 것이 곧 공부하는 것이라는 뜻도 가능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래도록 의심의 시간으로 일생을 보낸 소태산은 대중이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의심을 갖는 것을 안타까워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이 어떻게 진급할 것인지, 어떤 방법으로 진급을 향해갈 것인지 고민하지 않도록 삼학 수행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이제 일원상의 수행을 어떻게 봐야할까? 삼학 수행을 실천하는 수행방법론으로 접근하면 될까? 삼학이 일원의 진리가 가진 속성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라면 일원상의 수행에서도 그러한 속성이 드러난 표현을 찾아야 한다. 논자는 삼학을 표현한 문장을 “일원상(空)과 같이 원만구족(圓)하고 지공무사(正)한”이라고 본다. 그에 대한 근거는 일원상 모양으로 든다. 또한 원불교 대종경 서품 제1장의 표현도 그 근거로 두겠다. 우리가 일원상을 보면 동그라미가 보인다. 그런데 저것이 어떻게 진리를 그대로 형상한, 사진과 같은 모습일까? 일원상에서 비움을 찾아보자. 어디에 비움이 있을까? 일원상에서 밝음을 찾아보자. 어디에 있는가? 일원상을 보면 어디에서 그 모습에 비움과 밝음을 상징화했는지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동그란 테두리가 아닌 테두리 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어있는 모습을 관조하여 알아채면 일원상의 테두리는 비어서 밝은 형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비움과 밝음이 적절히 섞인 형상이 일원상이다. 동그란 테두리 안의 비움에서 테두리가 두렷한 기틀로 나오는 모습이 또한 정(正)이다. 정(正)은 갖추어짐이고 조화다. 이처럼 일원상이 원불교 삼학 수행의 체계에 가장 근본적인 기조가 되려면 일원의 속성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동안 일원상의 수행에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자는 것’,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은 기존 교리해석에서 항상 삼학수행의 형태로 분석되었다. 또한 알자는 견성으로 양성하자는 양성으로 사용은 솔성으로 그 내용이 파악되어 왔다. 그러나 논자는 이 부분에서 아리송한 느낌이 있었다. 왜 갑자기 익숙한 정혜계의 순서가 아니라 혜정계의 순서로 교리를 전개해 가는 것인지, 그 동안 그 어떤 교리 강령들 속에서도 정혜계의 순서가 혜정계로 뒤바뀐 적이 없는데 어째서 일원상의 수행에서는 알아야 한다가 먼저 나온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누군가는 알아채야 다시 회복할 것이 아니냐며 의문을 일축시켰지만 논자는 일상수행의 요법과도 대치되는 전개방식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었다.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라고 하니 꼭 각자의 마음을 아는 것의 목적은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와 같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일원상의 수행에서 원만구족 지공무사가 수행문의 목적이 맞는가? 만약 그렇다면 개인의 수행에 그친 것이 아닌가? 우리의 교리도에서 진공묘유의 수행문과 대조하여 일원상의 수행 속에 정각정행에서 불법활용까지를 포함한 내용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일원상의 수행에서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 지공무사’는 어떻게 봐야할까? 대종경 교의품 5장에서는 지능과 조건에 관계없이 일원상의 수행을 하면 모두 성불한다고 되어 있다. 그에 대한 근거가 일원상의 수행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원의 진리를 요약하여 말하자면 곧 공(空)과 원(圓)과 정(正)이니, 양성에 있어서는 유무 초월한 자리를 관하는 것이 공이요, 마음의 거래 없는 것이 원이요,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정이며, 견성에 있어서는 일원의 진리가 철저하여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없는 자리를 아는 것이 공이요, 지량(知量)이 광대하여 막힘이 없는 것이 원이요, 아는 것이 적실하여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정이며, 솔성에 있어서는 모든 일에 무념행을 하는 것이 공이요, 모든 일에 무착행을 하는 것이 원이요, 모든 일에 중도행을 하는 것이 정이니라.”

 

이 법문을 근거해서 논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를 ‘알자, 양성하자, 사용하자’의 재료로 봐야한다는 입장이다. 견성, 양성, 솔성 안에도 원상이 돌고 있다. 모두를 합친 삼학도 원상이 돌고 있다. 삼학이 진리의 속성이라면 삼학이 미치지 않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정신수양 속에도 공원정이 들어 삼학이 다 들어 있고, 사리연구 속에도 삼학이 들어 있으며, 작업취사 안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일원상 법어의 원상이 가장 큰 한 원상과 작은 원상 여섯 개가 배치되는 것과 상통한다. 공·원·정을 재료의 개념으로 본다면 일원상의 수행에서 말하는 견성, 양성, 솔성의 개념을 어떻게 잡아갈 것인가? 그것은 수행정도에 따른 경로나 경지정도로 받아드리고 싶다. 견성을 하고 양성을 하며 솔성을 하는 것은 수행과정이다. 즉, 견성하여 성품자리를 알았다면 그때부터는 성품자리를 수호하여 키우고 그 과정이 익어지면 성품을 활용해서 세상에 사용하자는 말이다. 일원상의 수행에서 견성·성불·제중의 경로가 그려져야만 교리도 속 수행문과 그 맥락이 맞아진다. 또한 깨달음의 경지로 받아드려져야만 소태산이 신분의성으로 풀어낸 일원상서원문과도 그 맥락이 맞아진다. 논자가 수행에도 목적이 있지 않겠냐고 했던 것도 진리와 신앙과는 다른 형식을 취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의문이 풀린다. 그런데 왜 그동안 일원상의 수행을 삼학 수행의 방법론적 입장에 그쳐 있었을까?

그 문제는 용어의 풀이에서 그 쓰임과 맥락에 따라 달라져야 할 용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라고 본다. 이들 언어는 대체로 한자가 겸해지지만, 우리가 뜻 의미를 풀지 않고 음성으로만 그 뜻을 전하거나 들을 때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양성”이다. 양성은 ‘양성(養成)하다’라는 서술적 의미도 있고 ‘양성(養性)’이라는 인성론의 관점의 명사 표현도 있다. 하나는 ‘무언가 키워서 이루다.’ 또 다른 하나는 ‘성품을 기르다.’이다. 이중 후자인 양성(養性)은 삼대력(三大力)의 한 속성으로 인간의 심성을 어떻게 가꾸어 갈지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맥과 요지에 따라서 양성을 해석하지 않고 익숙함에 빠져 해석한다면 어떨까? 해석의 틀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다음은 불교정전에 수록된 일원상의 수행 원문이다.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므로써 수행의 표본을 삼나니 그 방법은 일원상의 진리를 오득하여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 즉 반야지를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 즉 반야지를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 즉 반야지를 사용하자는 곧 일원의 수행이다

 

불교정전에서는 현재 정전과 아주 흡사하지만 몇 가지 빠진 부분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표현이 즉 반야지(卽般若智)다. 각자의 마음에 있는 근본지혜라면 그것이 무엇일까? 각자의 마음 안에 삼학이 있음을 알자, 각자의 마음에 삼학을 양성하자, 각자의 마음에 삼학을 사용하자. 이것을 혜정계인 사리연구 정신수양 작업취사로 봐야할까? 소태산은 우리의 각자 마음에 부처의 성품이 갊아 있다 표현했다. 그 증거로 제불조사의 심인과 인체중생의 본성이 같은 자리라고 하지 않았나. 또한 그 자리가 우주만유의 근원자리와 같다고 했다. 우리는 이때에 성품이라는 용어가 가진 뜻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품을 여의지 않는 공부, 성품자리를 보는 공부, 성품자리를 아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견성이라 한다. 견성자리를 알고 나서도 우리에게 있는 건 성불이라는 과제다. 소태산은 성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견성을 해도 보기 좋은 납 도끼와 같다며 주의를 주었다. 각자의 마음을 알고 양성해가는 게 불성을 기르고 키우며, 함양해가는 과정이라 본다. 그리고 그것이 근본지혜를 깨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불교는 성불만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성불한 힘을 제중에 다시 실어야 한다. 삼학과 같은 그 근본지혜를 사용하는 것은 내 안의 근본 지혜를 알고 단련하여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 근본 지혜를 사용하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정리하자면 삼대력을 갖춘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견성으로, 양성하자는 성불로, 사용하자는 제중으로 정리할 수 있다.

수행이기 때문에 수행 방법에 조금 더 중점을 두고 중심 교리를 해석하려 하니 결국 수행을 하여 어떤 목적을 이루어 낼 것인지는 간과했을 수 있다. 우리가 수행을 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 마침내 내가 견성성불을 해서 제중을 하자는 게 아닌가? 그런 면에서 일원상의 수행에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은 삼아서’, 이 문구는 무척이나 타당한 전제다. 신앙하며 수행하는 대상이 아주 명백히 드러났으며 일원상장 전체를 통합한 맥락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러한 맥락을 놓치고 삼학 수행만을 바라보지 않았나? 혹은 원불교가 추구한 윤리적 인간상인 삼대력이 갖춰진 인물에 표면적으로만 닿아있지 않았나? 만일 윤리적 인간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면 하나의 원리에서 나온 여러 가지 표현들을 대의와 요지라는 지점 속에서 발견하고 활용할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삼학과 원만구족 지공무사에 대한 관계도 더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원만구족 지공무사를 둥그런 인간상과 같은 모호한 표현이 아니라 진리적 인격체의 개념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

 

타인의 눈으로 일원상의 수행을 보면 소태산의 그 뜻을 깊이 헤아릴 수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교리가 가진 기조 흐름을 들여다보지 못하면 문장에 그쳐 의미단위의 부조화를 간과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다층적으로 보면 문장의 요소마다 저변 개념이 들어 있다. 꼭 우리의 의식 세계처럼 찬찬히 그 교리가 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소태산의 교리도 조밀한 연결성을 이루고 있다. 교학을 하는 우리는 그 연결 중 어느 부분이 느슨한지 찾아내야 하고 구멍이 난 부분을 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리에 대한 일반론을 충분히 접한 후 스스로가 시비이해를 건설해보고 교학 발전에 필요한 창의성을 길러가야 한다.

영국의 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전 세계에 걸쳐서 공연되고 또 여전히 희곡서로 출판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수많은 또 다른 작가와 감독의 손에서 재해석되고 변용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모티브로 해 수 많은 영화와 도서가 나오고 몇 차례 가공된 부가가치들이 아직도 영국의 문화 예술에 어떤 영향력을 주고 있다. 우리는 그 고전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면 도대체 왜 대중이 아직도 셰익스피어를 이해할 수 있는지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유명한 햄릿의 대사 “to be or not to be”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극 중 햄릿의 아주 본질적은 모습을 담은 단 한마디의 대사가 햄릿을 모두 표현했기 때문이다.

소태산도 그런 작품을 세상에 남겨 둔 것이 아닐까? 교학이란 기반에서 철학과 미학, 그리고 윤리학이 갈래로 뻗어 나온다면 과연 어떤 형태가 이루어질까? 교법의 체계가 발전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이란 이름으로 전해진다면 그때는 도대체 어떤 형태로 남게 될까? 우리가 소태산이 낸 작품이 가진 기조와 근간을 통찰할 수 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을 하면 될까? 수없이 많은 변용과 재생산이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개념을 융합하고 활용할 것이다. 교학이란 작품이 많은 패러디와 오마쥬를 남기게 될 것이다. 소태산은 알고 있었다. 그가 교법의 총설에서 교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언급한 이유는 그의 모든 법이 반드시 변주될 것을 알아서였다. 그는 재해석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표현의 변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도 수많은 고전들이 고전들로 사랑받는 것처럼, 소태산의 교법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교학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이번 논고가 나에게 그리고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찬찬히 생각해보면 좋겠다. 소태산이 추구한 근본정신과 주요 교리가 가진 개념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한 번이라도 생각하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

 

 

 

참고문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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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보』 제 36호, 제 37호, 제 38호

『회보』 제 34호, 제38호, 제 40호, 제 46호, 제 49호, 제54호, 제 55호, 제 56호

 

 

<논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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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용 「수양연구요론의 구조와 성격」,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14, 원불교사상연구원, 1991

정성욱 「알음알이의 분석적 연구: 초기선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2

정순일 「일원상신앙의 초기 형성과정 연구」, 한국원불교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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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현 「수행문에서 본 일원상: 목우도와 무시선을 중심으로」,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02

한종만 「원불교 삼학수행과 사회생활」,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1996

조성훈 「원불교 일원상 법어 형성과정 연구」 원불교 사상과 종교문화, 71, 2017 pp.4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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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학과

Wonkwang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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