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학과

Wonkwang University

원불교 교서에 나타난 무위의 의미-조성원

교학대학 원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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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서에 나타난 무위의 의미-조성원

 

원불교 교서에 나타난 무위(無爲)’의 의미

 

조성원

 

 

. 시작하는 말

 

. 이웃 종교에서 바라본 무위의 의미

1. 도가의 교서에 나타난 무위

2. 불교의 교서에 나타난 무위

3. 유가의 교서에 나타난 무위

 

. 원불교 교서에 나타난 무위의 의미

1. 진리의 속성

2. 본래 성품

3. 수행의 표준

4. 기타

 

. 이웃 종교와 원불교의 무위 의미 비교

 

. 맺는말

 

 

 

 

 

 

 

. 시작하는 말

 

본 논문에서는 원불교 교서 속에 담긴 ‘무위’에 대한 의미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원불교 대사전에 무위를 찾으면 주로 도가와 불교에서 바라보는 무위를 설명하고 있다. 도가의 내용으로는 중국 철학에서 주로 도가(道家)가 제창한 인간의 이상적(理想的)인 행위로써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다. 인간의 인위적인 행동을 부정하고 자연의 이치대로 행위하는 것을 이상적인 행위로 무위를 의미 짓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유위를 인간의 후천적인 위선(僞善)ㆍ미망(迷妄)이라 하여 이를 부정하는 무위를 제창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만들어내는 유위를 부정하는 말로써 무위를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불교의 내용으로는 여러 가지 원인ㆍ인연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닌 존재(asam skrta). 시간적인 생멸변화(生滅變化)를 초월하는 상주(常住)ㆍ절대의 진실로, 열반(涅槃)의 이명(異名)으로도 사용이라고 되어 있다. 무위를 인과가 끊어지고 불생불멸한 자리, 열반의 또다른 언어로 무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생멸 변화가 없는 모든 법의 진실체를 설명하는 말이라고 했고, 인연에 의한 위작ㆍ조작을 떠나서 생주이멸의 변천이 없는 진리. 열반ㆍ진여ㆍ법성ㆍ실상과 같은 뜻이라고 했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궁극적인 경지로 무위의 의미를 사용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불교의 단어를 설명하고자 만들어진 사전임에도 불구하고 원불교에서 의미하는 무위에 대해서는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에 반해 원불교 교서와 자료에서는 무위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무위’의 표현이 원불교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물론, 도가에서 도를 무위로 표현하였고 그것을 원불교가 모든 종교의 교지를 통합 활용하면서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만 원불교에서는 무위를 어떠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교서 내용의 흐름을 통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또한, 이웃 종교에서 무위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원불교에서 표현하고 있는 무위는 무엇을 지칭하고 있으며 주로 어떤 의미로서 무위를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렇게 교서 속에 담긴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고 정리하게 되면 여러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같은 단어지만 원불교의 의미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원불교 교서 속 무위라는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는 본 논문의 목적은 또한, 무위 단어의 해석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해석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종이 글씨를 읽는 것이 현저히 줄었고 빠르게 탈종교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현 시대 사람들에게 전서를 읽는 것, 특히 생활 속 단어가 아닌 전서 속 법문들의 단어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주로 한자어로 되어 있기에 그 뜻이 함축적이어서 진리의 뜻을 이해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될 수 있고 더욱 알아가고자 하는 관심이 생기기가 쉽지 않다고 보았다. 원불교 교서의 내용을 전달해야 할 예비 교무들도 법문을 읽을 때 법문의 내용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인터넷 사전을 사용한다. 어려운 단어들을 마주하게 되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생겨 단어의 뜻을 찾아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르는 단어를 찾아보고 이에 더하여 찾은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글의 문맥에 맞는 의미를 또 찾아야하는 것이다.

“도덕은 원래 문자 여하에 매인 것이 아니니 그대는 이제 그 생각을 놓으라. 앞으로는 모든 경전을 일반 대중이 두루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편찬하여야 할 것이며”,라고 하신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대종사의 말씀처럼 현 시대에 교서를 읽고 이해하는데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쉬운 말로 편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거리감 있는 종교가 아니라 친근하고 쉽게 생활 속에 스며드는 종교가 되어 법문이 생활이 되고 생활이 법문이 되어져서 불법시 생활, 생활시 불법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각 법문 흐름에 맞는 표현의 의미를 보고 문맥에 맞게 의미를 찾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 이웃 종교에서 바라본 무위의 의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위라는 단어는 여러 종교에서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이웃 종교인 도가, 불교, 유가에서 무위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도가의 교서에 나타난 무위

 

도가에서는 무위를 인간의 이상적인 행위로 보고 있다.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한다. 무위라는 개념은 노자의 사상에서 도와 더불어 그의 철학 세계에서 중요한 범주에 속한다. 그리하여 노자의『도덕경』에서 더 넓은 의미의 무위를 찾아볼 수 있다.

 

“만물은 道를 따라서 生育化成되고 있다. 그러나 道는 스스로 만물을 주관하지 않는다. 또 道는 모든 功을 이룩하면서도 스스로 취하는 것이 없고, 만물을 감싸고 사랑해 키우면서도 주재하지는 않는다.

萬物恃之以生, 而不辭, 功成而不有, 衣養不物而不爲主(『道德經』 34장)”

 

만물은 도를 따라서 길러지고 화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도가 직접 만물에 간섭하여 주관하거나 주재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도의 본질적 특성으로 항상 작위를 하지 않으면서 이루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을 이루고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도의 특성으로서 무위를 말하고 있음이 보인다. 그래서 노자는 인위적인 조작을 부리면 해롭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과 멀어지는 만큼 인위적인 세계라는 뜻과 상통하게 된다라고 하며 무위를 강조하였다.

 

“천하는 신통한 보물이다. 억지로 다룰 수 없고 억지로 다루려면 망가지고 움켜지려면 없어진다.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道德經』 29장)”

 

그래서 인간의 조작을 멀리하라고 했다. 천하를 인위적으로 하려고 할 때에 그것은 자신의 신통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은 성인에 대해서도 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聖人은 무위로 세상사를 처리하고 말없이 교화를 실행한다.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道德經』 2장)”

 

세상을 교화할 때에 인위적인 말로써 교화하지 말라고 하였다. 인간의 분별로써 만들어진 언어로 교화를 하는 것은 진정한 교화가 아니며 만약 그렇게 할 때에 도와 멀어지는 교화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하는 자는 실패하고, 인위적으로 잡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고 했다. 그래서 노자는 언어를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의 존재이다. 그래서 노자는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라고도 하였다. 글을 배울 때 우리는 생각을 하고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통해 인위적인 것들을 만들어내며 편리한 삶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다보면 무위의 삶과는 멀어지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몸은 편하지만 마음에는 근심이 쌓여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 빛깔은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고, 다섯가지 音은 사람으로 하여금 귀먹게 하고, 다섯 가지 맛은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어긋나게 한다.

말 타고 달려 사냥함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고, 얻기 어려운 귀한 재물은 사람의 행동을 비뚤어지게 만든다.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田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외부로부터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들은 오관(五官)을 자극한다. 욕망을 자극하는 오관에 끌리어 사람들은 점점 눈이 멀게 되고 귀가 멀고 입도 어긋나게 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위적인 것들에 몸과 마음을 끌려 살면서 본래 마음은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근심은 더욱 생겨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노자는 인간의 삶 속에서도 무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도가에서 무위는 도의 특성으로 그 의미가 쓰여짐을 알 수 있다. 인간에 있어서는 ‘행동하지 않음’의 태도로서, 도로써 살아가는데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도와 인간과의 거리를 제거하는 행위로서 바라보는 적극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본래 성향대로 되돌려 놓으려는 노력”으로 무위를 의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 무위로서 살 때에 도와 같이 인위적인 행동과 조작을 부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본래 성향으로 돌아가 도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위적으로 생겨진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을 놓고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불교의 교서에 나타난 무위

 

불교에서도 무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열반의 다른 표현으로 무위를 사용하고 있다. 열반은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무위를 수행으로부터 진리를 체득한 경지인 해탈의 다른 말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 무위를 언급하고 있는 것 역시 볼 수 있다.

초기 불교의 텍스트에서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입장들을 모두 뒷받침하는 표현들이 공존하고 있다.

 

“먼저 열반은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6) 존재의 소멸(bhava-nirodha), 갈애의 소진(taṇhakkhaya), 무위(無爲, asaṅkhata), 탐욕의 빛바램(virāga), 소멸(nirodha) 등과 같은 부정적인 용어들로 표현된다.”

 

즉, 여러 가지 불교 텍스트 속에서 열반이 다른 언어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열반을 표현한 언어들이 긍정적·부정적 용어의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에서 무위는 열반의 부정적인 용어들 중 한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부정적 의미로 해석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열반(涅槃)은 산스끄리뜨어 니르바나(nirvāṇa)와 빨리어 닙바나(nibbāna)의 음역어이다. 니르바나와 닙바나는 모두 부정 접두사 nir와 √vā(불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글자 그대로 ‘(불이) 꺼짐’이나 ‘소멸’을 뜻한다. 이와 같이 열반이 그 일차적 의미로 ‘(불이) 꺼짐’이나 ‘소멸’이기 때문에 소극적 ․ 부정적인 뉘앙스를 분명히 담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비록 초기 불교의 텍스트는 아니지만 『담마상가니(Dhammasaṅgaṇī)』에서는 열반이 무위계(無爲界, asaṅkhatā-dhātu)52)나 무위법(無爲法, asaṅkhatā-dhamma)53)이라는 이름으로 빈번하게 등장한다.『담마 상가니』는 세 가지로 분류된 팔리 삼장에서 나온 것이다. 불교의 대장경 중 하나인 삼장에서 불교의 교법에 대한 연구 해석을 독립적으로 집대성한 것을 논장이라 하는데 논장에서 칠론을 주장하고 그 중 처음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법취론, 법집론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경을 해석한 법문에서도 열반이 무위로써 사용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수양에 있어서 불교에 핵심적인 개념으로 무위가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무위는 인간의 수양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며 인간의 순수한 가치와 본연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는 일체의 인위적인 것이 배제된 무위를 내세우고 유위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며 무위법으로 인간의 집착이나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불교는 수양의 한 방법으로 무위법을 내세우고 이를 통해 인간이 집착과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의 본래 가진 성품을 찾고 그 성품대로 살아가는 것, 어떠한 꾸밈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가치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하여 생기는 상의적인 것을 자각하고 무명과 미망에서 벗어나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명으로부터 나오는 고를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무위의 뜻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불교 한 교서에서 무위를 이렇게 정의했다. 붓다는『상윳따 니까야』 에서 무위법(無爲法, asaṅkhatā-dhamma)을 탐욕(貪, lobha) ․ 성냄(瞋, dosa) ․ 어리석음(癡, moha)의 소진으로 정의한다. 삼독심이 지혜를 어둡게 하고 악의 근원이 됨으로 자유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에게 결정적인 장애가 되는 어두운 마음이기에 그것을 소진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위법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 번뇌와 욕망인 주체로부터 벗어나서 무아가 되는 것이다. 그 무아라는 것을 깨닫는 바른 통찰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통해 무위의 의미가 불교에서는 지향하는 궁극의 경지인 열반을 표현한 단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긍정적·부정적 두 가지 측면의 표현에서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언어 표현으로 사용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삼독심을 소진하여 열반에 이루도록 하는 수양의 한 방법으로써 무위가 사용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유가의 교서에 나타난 무위

 

유가에서도 무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유가에서 태초의 언어를 무위로 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을 인의예지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단’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도가와 유가는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 ‘본래 그러한것[本然]’, ‘진실로 그러한 것[固然]’ 등의 개념을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도가가 강조한 무위자연의 사상적 토대를 유가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가도 도가의 스스로 그러한 것이란 외적인 영향력에 의해 조작되지 않고 존재 스스로 자신의 특성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부분을 밝혔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본래적인 것을 사상적 토대로 삼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가는 인간에게 존재론적인 본래 언어가 있다고 보면서 유위적 언어의 모태인 무위적 언어를 제시한다. 주돈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무극이면서 태극’인 상태의 언어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언급하며 존재론적인 본래 언어가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무극이면서 태극인 상태의 언어라고 하였고, 무위적 언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무위적 언어는 선한 본성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선한 본성이야말로 유위적 언어를 가능케 하는 무위적 언어 혹은 ‘본래 언어’이다. 라고 하며 언어로 나오기 전에 가지고 있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무위적 언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그 무위적 언어는 인(仁)에서 우러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우러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우러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유가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능과 본성이라는 두 종류의 본래 언어 안에서 살아간다. 모든 것은 언어 이전의 본능과 본성을 먼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규약을 맺어놓은 언어적 규약 이전의 본능과 본성이 먼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본능과 본성이야말로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무위 언어 라고 한 것인데 그것을 유가에서는 무위의 언어, 태초의 언어로서 ‘선한 본성’, ‘사단’을 말한 것이다.

또한, 정치를 할 때 무위를 언급하고 있다.『논어』에 ‘無爲而治’라는 말이 나온다. ‘無爲而治’란 ‘아무런 인위적 작위가 없는데도 잘 다스려짐’, 또는 ‘인위적 작위가 없는 통치’를 뜻하는 말이다. 정치를 하는데 어느 인위적인 것, 억지로 만들어낸 것 없이도 잘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위이치에 대해서 두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솔선수범하라. 백성을 복종시키기 위한 별도의 노력을 하지 말라. 다만 솔선수범하면 백성이 저절로 심복한다. 둘째, 委任責成하라. 모든 일을 혼자 다 처리하려고 하지 말고, 신하들에게 나누어 맡기라라고 하였다.

 

‘무위이치’란 성인의 덕이 성대하여 백성이 감화된 것으로서, 작위하는 바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홀로 舜을 일컬은 것은, 堯의 뒤를 이어 또 사람들을 얻어 여러 직책을 맡겼으니, 그러므로 더욱 그 유위의 자취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주자는 무위이치에 대해서 성인의 덕으로 백성이 스스로 감화된 것이라 보고 있으며 백성을 인위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통치자는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재를 찾아서 일을 나누어 맡기면 알아서 맡은 일을 충실히 한다고 하였고 그러기에 인위적으로 통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위’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대하게 덕을 닦는 일’과 ‘아랫사람에게 위임을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무위이치로 통치를 한 인물로 요순을 지목하였다.

 

공자 말씀하시다. 무위로 다스린[無爲而治] 이는 순임금(舜)일 터다. 어찌 하였던고? 몸을 공손히 하고 남면(南面)하였을 따름인 것을.

 

몸을 공손히 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치가 된다고 본 것이다. 요순의 정치가 이러하여 ‘억지로 행하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정치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순은 부지런히 조회를 보고 각지를 순수했으며, 산을 북돋고 하천을 준설했으며,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흉악한 사람을 처형했으니 무위이치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직접 천자의 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9관과 12목을 임명한 것’ 외에는 특별한 정사가 없었다는 것을 통해 무위로 다스리고 있다고 보았다. 이렇듯이 정치를 함에 있어서 덕으로 인재들을 각자의 맞는 자리에 배치만 해준다면 억지로 다스리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정치는 되어지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하지 않은 정치를 통해 덕이 넘쳐 백성들은 감화가 되었기에 자신들도 각자가 덕으로 살아가고자 기준을 세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이 유가에서 무위는 언어 이전의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 즉, 사단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를 함에 있어서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덕으로써 인물을 등용하여 자리를 만들어줄 때 저절로 정치는 되어진다는 의미로서 무위를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원불교 교서에 나타난 무위의 의미

원불교에서도 교서에서 무위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원불교 대사전에는 원불교가 의미하고 있는 무위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원불교가 종교를 통합 활용하면서 도가의 무위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짐작해볼 수 있으나 원불교의 의미로 해석된 무위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는 무위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하였다. ‘무위’가 나오는 교서 내용을 통해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살펴본 교서로는「정전」,「대종경」,「정산종사법어」,『대산종사 법어』,『대산종사법문집1,2,3』,『한울안 한이치에』전 6권이다. 다른 종교를 설명하며 언급한 것은 제외하고 고유의 법문 속에서 쓰인 무위만을 발췌하였다. 분류 방법으로는 본 연구자가 자연,이화,대행의 단어가 무위 뒤에 붙여져서 무위자연, 무위이화, 무위대행 등으로 사용 되어진 단어들도 함께 언급하고 문맥을 통해서 그 의미를 분류해보았다. 그 결과, ‘무위’라는 표현이 수록된 자료는 총 47건이었다. 의미 별로 분류하여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1. 진리의 속성

 

원불교는 일원상의 진리를 밝혔다. 그리고 그 진리의 속성을 기본적으로 두가지로 밝혔다. 진공묘유와 공적영지이다. 진공묘유가 주로 존재론적, 우주론적 입장에서 진리의 속성을 밝힌 것이라면, 공적영지는 주로 인식론적, 인성론적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진리를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나 최대한 인간 차원에서 가능한 작업을 통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진리 작용을 밝혀주신 것이다.

그 중 먼저 「정전」제2교의편 제 1장 일원상 제1절 일원상 진리장을 보면서 진공과 묘유의 양면관을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일원상 진리를 본체론적 입장에서 본 ‘진공의 체성’ 그 자리는 대소유무, 생사변화, 선악업보, 길흉화복 등 일체의 상대적 차별현상을 초월한 진공의 경지를 말한다.

그리고 현상론적 입장에서 본 ‘묘유의 작용’이란, 일원의 체성이 일체의 상대적 차별을 넘어선 무상(無相)의 진공체이나, 그것은 물리적 진공이나 무기공(無記空)과 같은 악취공(惡趣空)이 아니라, 공적영지의 광명과 묘유의 조화작용을 포함한 신묘한 공(空)이다. 그렇게 공적한 가운데 영지(靈知)가 내재되어 있어 묘유의 조화작용이 전개되므로 진여 본체로서의 진공의 체성에 바탕하여 묘유의 조화가 작용함으로써, 천차만별한 현상세계가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춘하추동과 주야로 운행하며, 만물은 형형색색 천차만별로 나타나고 생로병사로 변화하면, 진공에 바탕한 묘유의 조화에 의하여 우주의 삼라만상이 생사유전하고, 선악업보가 상응하며, 유무ㆍ음양ㆍ길흉ㆍ화복 등 일체의 상대세계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즉 진공ㆍ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해서 무시광겁토록 은현자재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일원상의 진리가 진공하여 차별적인 현상이 없는 텅빈 진공의 자리이나 신령스러운 영지를 통해 차별이 생겨나고 변화가 생겨나 우주 만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공적 영지의 개념적 의미는 진리의 본체가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는 가운데 신묘불측하고 소소영령한 지혜광명이 무궁무진하게 비추고 있음을 뜻한다. 그 중에서 공적은 우주의 본체인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다. 공적이 되면 영지가 나오고, 영지가 나오면 광명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본성도 공적이며 그 안에서 영지가 나와 인간의 마음도 본성을 깨쳐 마음이 공적해지면 영지의 광명, 곧 무루의 반야지혜가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다. 이 둘이 표현은 다르나 둘이 아닌 진리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진리의 속성이 무위로 표현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한 제자 심고의 감응되는 이치를 여쭙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심고의 감응은 심고 하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 무위 자연한 가운데 상상하지 못할 위력을 얻게 되는 것이라,” 라고 하였다. 인간이 진리에 심고를 드리고 그에 대해 감응되는 이치를 묻자, 무위 자연한 가운데 상상하지 못할 위력을 얻는다고 한 것이다. 위력을 얻는다는 것은 진리에 합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으로 들리지도 않게 고하는 기도를 통해서 위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텅 비었지만 영지로써 나타나는 일원의 속성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공적 영지의 진리가 있기에 감응은 일어나는 것이고 진리와 합일하는 경지에도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정산종사법어」 예도편 10장에서도 진리의 속성으로 바라본 무위의 표현을 살펴볼 수 있다. 한 제자가 “열반인을 위하여 법요(法要)행사를 하오면 영가에게 어떻게 공덕이 미쳐가나이까”라는 질문을 한다. 답으로써 이렇게 말씀하였다.

 

“도는 재주(齋主)나 주례나 대중이 일심으로 기원하면 법신불과 우리가 둘 아닌 이치를 따라 영가의 업장이 자연 녹아지는 수도 있고, … 부지중 열반인의 혜로가 혹 열리는 수도 있고, … 영가의 명복에 도움이 되는 것이며, … 이것이 다 무위자연한 이치를 따라 되는 것이므로 다만 현장에 나타난 것만으로는 능히 판단하지 못하나니라”

 

영을 위해서 우리가 하는 행동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한 때의 행사 뿐 아니라 관계자가 그 영을 위하여 많은 공사를 하고 모든 선행을 닦으며 수도 문중에 도력을 얻은 자손이 있다면 그 음덕이 또한 그 영에 미쳐 갈 수 있나니, 라고 하신 말씀은 더욱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간접적인 행위들이 죽은 사람의 이후 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무위 자연한 이치가 있고 그것에 따라서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위자연한 이치는 무엇일까? 바로 텅 빈 가운데 묘하게 있어지는 진리의 작용이다. 우리의 행위가 전혀 관련없는 것 같으나 신령스러운 영지로써 죽은 영에게까지도 미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법요 행사를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고 공덕도 미쳐갈 수 있는 것이다.

 

“일원 대도를 선양하기로 하면 수신으로 근본을 삼고 정법으로 계몽하며 자비로 호념해야 하나니, 이처럼 하고 보면 대도 정법은 무위이화로 드러나고 세상은 자연히 지상 낙원이 될 것이니라”

그래서 우리가 이 도문에 들어와서 내 몸을 다스리고 공부하는 것이 어찌 세상이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으나 그 또한 무위이화로 드러나는 일원상 진리의 특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수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바른 법으로 사람들을 깨우치게 해주고 자비로써 행할 때 그 행이 진공 묘유의 진리 작용으로 인해 널리 퍼져서 그것은 진리를 선양하는 일이 되고 그렇게 자연히 세상은 지상 낙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신을 근본으로 삼으며 공부를 해나가는데 있어서 원불교는 삼학 공부를 두었다. 삼학 공부 중 정신 수양이 있는데 정신 수양 훈련법 중 하나인 좌선법에서도 위와 같은 의미로 무위를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정신을 차리고 망상에 흐르거든 정념으로 돌이켜서 무위 자연의 본래 면목 자리에 그쳐 있으라.” 라고 좌선의 한 방법이다. 본래 면목은 사람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 심성 자성불(自性佛)을 뜻한다. 본성을 이르는 말로 좌선을 하는 중에 새로운 정신과 정념으로 무위 자연의 본래 자신이 지닌 성품의 자리에 있으라 한 것이다. 이러한 성품을 일원상의 진리라고 하였다. 그렇다는 것은 진리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진리 속성을 지닌 무위 자연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뜻과 달리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진리 자리에 그쳐 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일원 대도를 세상에 나타내고 지상 낙원을 만들기 위해서 대종사는 이렇게 희망을 주고 있는데, “우리가 이 회상을 창립 발전시키는 데에도 이소성대의 정신으로 사심 없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결국 무위이화(無爲而化)의 큰 성과를 보게 될 것이요,” 라고 하였다. 수행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꾸준히 해나가고 망상에 흐르는 것을 다시 붙잡아 정념으로 돌이키고 사사로움 없이 계속해나간다면 무위이화의 큰 성과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소성대의 정신으로 사심 없는 노력을 계속 한다는 것은 진리의 작용과 다르지 않은 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 작은 것들이 성장하여 커지나 아무런 사심없이 하고 만물의 어느 것도 빠짐없이 이소성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천지가 아무도 모르게 바람을 일으켜 무위이화로 만물을 화육하듯”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소성대의 정신으로 사심없이 노력하는 것은 진리의 합일로 가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리와 같은 무위이화의 큰 성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정간 삼학수행을 몸소 실천해서 대중의 사표가 되어 무위이화로 천하가 감화를 입게 하는 것(교화사업)”을 말씀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대산 종사는 대각 경축날에 경축사로 이렇게 언급했다.

 

“온 인류가 한결같이 바라는 도덕과 평화는 한갓 갈망하는 뜻만으로 이룩될 수 없을 것이요, 오직 도덕생활의 실현으로써만이 가능할 뿐이니 오늘을 기념하여 우리가 다같이 크고 원만한 도덕을 갖추어 실생활에 활용할 몇가지를 밝히고자 하는 바입니다.… 다섯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다 법이 되고 대인접물이 다 덕으로 화하는 실천이 되어야 천하가 그 마음과 그 말과 그 행을 본받아 따르고 육도사생(六途四生)이 다같이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감화를 입는 대교화가 베풀어지는 것이요. 여섯째, 무위이화의 대교화가 널리 미쳐야 남녀노소 선악 귀천과 유무식이 다같이 그 도덕에 회향하고 천하창생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고해에서 낙원으로 널리 구제를 받게 되는 것이요.”

 

갈망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평화를 실현 시키기 위해서는 수행과 공부로 육근을 사용할 때마다 법이 되고 대하는 모든 것들에게 덕으로 화할 때에 모든 것은 본받아서 다같은 무위이화의 감화를 입는 교화가 이뤄진다고 한 것이다. 도를 체받아서 덕을 나투는 삶을 살 때 교화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도를 체받고 덕을 나투는 것은 일원상의 진리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위이화의 감화를 입는 대교화가 베풀어 지는 것이고, 이러한 일원상의 진리를 지닌 교화라야 대교화가 되고 모든 것들이 고해에서 낙원을 널리 구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오직 바르고 원만한 도덕을 갖춘 무위이화의 덕화라야 오랜 세상에 많은 사람을 널리 교화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진리 작용으로서의 무위를 사용한 법문을 통해서 진리와 합일된 마음과 공부로서 진리와 합일된 교화를 해나가서 일원대도의 실현을 언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본래 성품

 

본성은 인간의 근원적 본래 성품을 이르는 것으로 본래 마음을 의미한다.「정전」제2교의편 제 1장 일원상 제1절 일원상 진리장에서 진리가 일체 중생의 본성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즉, 앞에서 말한 진리의 공적영지, 진공묘유의 속성이 인간의 본성에도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래 성품을 ‘무위’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정전에서 정신을 수양하기 위한 훈련 과목으로 염불을 제시하고 있는데 염불법의 염불의 요지에 무위로 표현된 본래 성품의 의미가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염불의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이 먼저 이 이치를 알아서 생멸이 없는 각자의 마음에 근본하고 거래가 없는 한 생각을 대중하여, 천만 가지로 흩어지는 정신을 오직 미타 일념에 그치며 순역 경계에 흔들리는 마음을 무위 안락의 지경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곧 참다운 염불의 공부니라.”

 

「정전」제3수행편 제 3장 염불법 1.염불의 요지 마지막 즈음에 참다운 염불 공부는 무위 안락의 지경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수행을 통해서 다가가야할 목적지로서 무위 안락의 지경을 말하고 있는데 ‘돌아오게하는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돌아오다는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오거나 다시 그 상태가 되다를 의미한다. 그렇다는 것은 마음이 처음부터 무위 안락의 지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순역 경계에 흔들려서 천만 가지로 정신이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염불을 통해 생멸이 없고 거래가 없는 인간의 본래 성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을 요지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 성품을 무위로 표현하여 어떠한 것도 없는 안락한 성품으로 다시 오게 하자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원상을 체받는 법에서도 우리의 본성을 무위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원래 생멸이 없고 거래가 없고 분별 주착이 없는 오직 두렷한 참 성품이건마는 육근이(육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를 말함) 육식(육식은 육근이 각각 분별력이 있으므로 육식이라 함)으로 화하고 육식이 육진(육진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말함)을 응하여 그 가운데에서 자연 무수한 망상, 번뇌가 일어나서 드디어 그 진성을 버리게 되는 것인 바 공부인은 먼저 각자에게 그러한 성품이 근본적으로 품부해 있음을 각오하여 최상 표본을 삼고 항상 그 육근을 조복하며 망심을 제멸하여 다시 이 일원의 진경이 회복되기를 노력하는 것이니, 우리가 매일 염불을 하고 좌선을 하며 기타 모든 시간에도 오직 전일을 연마하는 것이 이에 대한 실행적 과정이 아닙니까. 그러한 중에 이 공부를 긴밀히 하기로 하면 그 마음 가운데에 항상 일원상을(망상 없는 곳) 깊이 인상하여 잠깐도 잊어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 … 이 법을 오래 계속하면 필경 낱(個)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진망이 구공하고 물아 동일하여 능히 생사를 초월하고 무위에 안주할지니 이런 자는 곧 일원상에 회복되어 여래의 법신을 여실히 확득하였다고 할 것”

 

이라고 하였다. 본래 인간이 일원의 진리인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육신의 육식으로 인해 접촉 되어지는 육진으로 망상과 번뇌가 일어나서 가지고 있는 참된 본성을 버리고 살아간다. 그래서 공부인으로서 생멸이 없고 거래가 없고 분별 주착이 없는 두렷한 참 성품을 본래 지니고 있음을 최상 표본으로 삼고 매일 염불, 좌선, 미리연마등의 수행을 하라고 하였다. 그러하면 어떠한 망상도 없고 너와 나라는 분별도 없으며 불생불멸되는 이치를 알게 되어 무위에 안주한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본래 참된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잊어버리지 않고 수행을 오래오래하면 결국에는 본래 가지고 있던 참된 성품을 되찾는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성품을 떠나지 않고 그 곳에 항상 주하여 살아갈 수 있음을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위는 인간이 가진 본래 성품을 의미하고 있다.

 

  1. 수행의 표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수행의 과정 속에서 표준을 세워야 하는데 무위를 수행의 표준으로 삼고 행하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여래의 세가지 큰 원은 만능(萬能)·만지(萬智)·만덕(萬德)를 갖추는 것이니, 이를 위해서는 무능(無能)·무지(無智)·무덕(無德)이 되어야 하고 전능(全能)·전지(全智)·전덕(全德)이 되어야 하느니라. … 만덕을 갖추려면 무덕으로써 덕을 온전하게 하여 전덕이 되고 만덕이 되어야 하나니, 무등등한 만능, 대반야지(大般若智)의 만지, 무위대행(無爲大行)의 만덕을 ‘우리의 수행 표준으로 삼아야 하느니라.”

 

진리를 깨달은 여래의 세가지 원은 만능, 만지, 만덕을 갖추는 것이다. 그 중 만덕을 갖추려면 ‘무위대행의 만덕’을 수행표준으로 삼으라고 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래가 되고자 한다. 그 여래는 만덕을 갖추고자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위대행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큰 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위로써 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대치 공부의 표준으로써 무위를 말씀하고 있다.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나는 다음과 같은 대치 공부를 표준으로 잡고 살았나니, 첫째는 절대(絶對)공부요, 둘째는 무심(無心) 공부요, 셋째는 지선(至善) 공부요, 넷째는 무루지 통달(無漏智通達) 공부요, 다섯째는 무위법(無爲法) 공부니라.」”

 

대치 공부는 “경계를 당해서 마음이 끌려가지 않고 일어난 번뇌를 끊어 바른 공부를 해나가는 방법”인데 그 방법 중 다섯 번째로 무위법 공부를 언급하고 있다. 수많은 경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경계를 직접 당했을 때 내 마음이 끌려가지 않고 일어나는 번뇌를 끊게 하는 것으로써 무위를 표준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수행의 표준인 무위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위 한다는 것은 상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법을 오래 계속하면 필경 낱(個)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진망이 구공하고 물아 동일하여 능히 생사를 초월하고 무위(무위 한다는 것은 상[相]이 없는 것)에 안주할지니 이런 자는 곧 일원상에 회복되어 여래의 법신을 여실히 확득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당하는 경계를 무엇이라고 규정짓는 순간 그것에는 스스로에게 어떤 상이 생긴다. 그러면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것이냐에 따라 집착하여 괴로워하게 되는데 그러한 상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지고 있는 상으로부터 일어나는 번뇌도 잠재울 수 있는 것이다. 순간순간 당하는 경계에 상을 씌우지 않고 대할 때에 행동은 가벼워지고 진리와 같은 응용무념의 도를 따라 행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무위를 수행의 표준으로서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기타

 

위와 같이 진리, 성품, 수행의 표준으로서 사용되어진 것과 달리 부정적인 의미로 무위가 사용 된 법문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생(生)에 금사망보(金絲網報)를 받을 죄인은 속인에게 보다도 말세 수도인에게 더 많다는 말이 있사오니 어찌 그러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속인들의 죄악은 대개 그 죄의 영향이 개인이나 가정에만 미치지마는, 수도인들의 잘못은 정법을 모르고 남을 그릇 인도하면 여러 사람의 다생을 그르치게 되는 까닭이니라. 또한 옷 한 벌 밥 한 그릇이 다 농부의 피와 직녀의 땀으로 된 것인데 그만한 사업이 없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한다면 여러 사람의 고혈을 빨아먹음이 되는 연고요,

 

사람들을 법으로 인도해야 할 수도인이 공부하지 아니하여 남을 그릇 가르치게 되면 그것은 여러 사람의 생을 망치게 하는 것이기에 더욱 조심하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길을 인도하는 지도자로써 영향이 크게 미치기에 제대로 법을 공부하지 않으면 죄인이 더 많이 나옴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다면 그것은 곧 피를 빨아먹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여기에서 무위는 하는 일 없이 노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인 것이다.

 

이와 같이 법문의 문맥을 따라서 무위의 의미를 네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진리를 나타내는 무위의 의미가 가장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가 무위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진리의 속성, 본래 성품, 수행의 표준으로 분류하는데 하나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하나의 일원의 진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본래 내재되어 있으나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본성, 그러한 본성을 찾기 위한 수행, 이러한 수행을 통해 본래 내재되어 있는 본성을 찾아가고 본래 성품과 같은 일원의 진리로 무위의 의미가 꿰어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무위의 단어를 통해서 수도인으로서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더욱 살피고 주의심을 가져야겠다는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죄인이 아닌 정법으로 인도하는 수도인이 되기 위해서 무위도식의 삶은 멀리해야 할 것임을 말이다.

기타를 제외한 세 가지 의미로 바라본 무위자연, 무위이화, 무위대행은 다양한 법문 내용에서 다르게 보일 수 있으나 무위라는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내용에 따라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 이웃 종교와 원불교의 무위 의미 비교

이웃 종교 교서에서 사용된 무위의 의미와 원불교 교서에서 사용된 무위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살펴보니, 서로 같은 의미로써 사용된 점이 있었고, 원불교만의 전혀 다른 의미로서도 사용 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통합적으로 살펴보면, 도가와 불교, 유가 그리고 원불교에서 무위가 진리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가에서는 진리의 도를 자연을 통해서 나타내며 인간도 자연과 같은 무위의 도로써 살아가기를 주장하였다. 불교는 궁극적 경지인 해탈의 의미로 무위를 말하고 있다. 유가는 나라를 다스릴 때에 인위적으로 하지 않음으로써 제대로된 정치가 이루어진다고 보며 무위를 언급하였다. 원불교도 이웃 종교들과 같이 무위를 일원의 진리 작용으로 나타내며 보이지 않는 와중에 자연히 되어지는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불교와 같이 수행의 차원에서 무위의 의미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불교에서 무위법을 언급하며 인간이 집착과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의 본래 가진 성품을 찾고 그 성품대로 살아가는 것, 어떠한 꾸밈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가치대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삼독심을 제거함을 주장한다. 원불교도 이와 같이 수행의 표준으로서 무위를 나타내고 있는데 다른 점으로는 원불교에서 무위를 상 없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규정하는 상을 만들지 않을 때 응용무념한 진리의 도를 행하게 되어 삼독심과 같은 마음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유가와 같이 인간의 본성으로서 무위의 의미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가는 인위적인 언어가 나오기 이전의 마음, 본래 심성인 사단을 무위로써 표현하고 있다. 원불교에서도 본래 성품을 일원의 진리라고 하는데 이러한 성품으로 염불과 좌선등을 통해서 다시 돌아가자고 하며 본래 성품을 무위자연한 자리로 보았다.

원불교는 위의 종교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모두 포함하여 무위라는 단어를 법문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에게 본래 내재되어 있는 심성, 그것을 알아가기 위한 수행, 수행을 통해 합일 되어야할 진리로써 무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징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무위 뒤에 ‘자연,이화’와 같은 현상적인 단어가 있으면 주로 진리의 작용으로서 그 의미가 드러나고, ‘대행’과 같은 행위의 단어가 있으면 주로 수행의 표준으로서 그 의미가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원불교만의 특징으로 부정적인 의미로도 무위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 법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고, ‘무위도식’이라는 표현으로 무위의 부정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무위는 앞에서 언급한 무위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무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태와도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다. 앞의 의미들과 아주 반대되는 의미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원불교에서는 본래 앞선 이웃 종교에서 의미하는 것으로 무위를 사용하고 있으면서 실생활에서 수도인에게 주의를 주는 법문 속 무위도식이라는 단어를 통해 전혀 다른 의미로서 무위의 의미를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맺는말

 

본 연구에서는 원불교 교서와 자료에서 무위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파악하고자 하였다. 먼저, 이웃 종교에서는 무위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이전에 나온 논문을 통해서 확인해보았다. 다음으로 원불교 전서「정전」을 비롯한 6가지의 교서 및 자료에서 ‘무위’라는 단어를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법문 내용의 흐름을 통해서 무위의 의미를 네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이웃 종교에서는 진리를 나타내는 말로 무위를 나타내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행위로써 나타내고 있으며 교화하고 정치를 해나감에 있어서 무위로써 행하고자 하였다.

원불교에서는 무위가 ‘무위’ 뿐만 아니라 ‘무위자연’, ‘무위이화’, ‘무위대행’으로 더욱 자주 쓰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의 속성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무위, 본래 성품으로서의 의미를 가진 무위, 수행의 표준의 의미를 지닌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전혀 다른 의미로서 ‘무위도식’이라는 단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원불교 교서 속에 담긴 무위의 단어를 찾고 그것을 분류하여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교서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매우 필요한 작업이다. 무위 뿐만 아니라 이웃종교에서 먼저 사용했던 단어들을 원불교가 받아들이면서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이해하여 원불교에서 나타내는 의미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록 단어는 똑같으나 풍부한 원불교의 의미가 생길 것이고, 법문을 전할 때에 그 내용은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또한, 원불교가 모든 종교를 통합한 종교로서 다양한 종교의 언어들이 교서 속에 담겨있다. 그러다보니 아쉬운 점은 원불교만의 언어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도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이웃 종교의 단어를 원불교에 맞게 해석하려고 하는 노력이 매우 필요한 상황이다. 모든 종교가 하나의 진리를 말하고 있으나 그 색채는 다를 수 있으며, 그것은 교서 속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웃 종교 단어지만 원불교 교서 속 법문들의 문맥을 통해서 그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고, 정리할 때에 그 단어는 원불교에 맞게 새롭게 살아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무위라는 단어의 의미를 교서 속에서 찾고 그 의미를 문맥을 통해서 해석해본 것에 불과하지만 아직 원불교가 뜻하는 이웃종교의 단어들은 수없이 남아있고 그것을 우리는 하나씩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또한, 이웃종교와 달리 원불교에서는 어떻게 그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는지도 살펴볼 바이다.

앞으로 사오백년 결복 성업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원불교가 더 큰 정체성을 드러내고 법의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원불교만의 의미로 해석하고 그 뜻을 알아가는 것이 절실하다고 본다. 그리하여 한국의 경전이 되고 세계의 경전이 되어 경전의 내용을 통해서 누구나 일원의 진리에 대해서 더욱 쉽게 이해하고 수행으로써 자신의 본성 자리로 돌아가서 대종사가 염원하신 정신이 개벽되는 시대가 오리라 기대해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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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원불교 전서에 나타난 무위의 의미 분류

 

진리의 속성

「정전」 제3 수행편

제4장 좌선법

2. 좌선의 방법 6

만일 혼침에 기울어지거든 새로운 정신을 차리고 망상에 흐르거든 정념으로 돌이켜서 무위 자연의 본래 면목 자리에 그쳐 있으라.

「대종경」

제2 교의품 17장

한 제자가 심고의 감응되는 이치를 여쭙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심고의 감응은 심고하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 무위자연한 가운데 상상하지 못할 위력을 얻게 되는 것이라,

「대종경」

제2 교의품 39장

“저는 아직 대종사의 깊으신 뜻을 다 알지 못하오나 대종사의 법은 지극히 원만하고 지극히 평등하사 세계의 대운(大運)을 따라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모든 인류가 개선될 줄 믿나이다.”

「대종경」

제9 천도품 5장

그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노·병·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왕래하여 주야를 변화시키는 것과 같이, 너의 육신 나고 죽는 것도 또한 변화는 될지언정 생사는 아니니라.

「대종경」

제13 교단품 30장

우리가 이 회상을 창립 발전시키는 데에도 이소성대의 정신으로 사심 없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결국 무위이화(無爲而化)의 큰 성과를 보게 될 것이요,

「정산종사 법어」

세전 6장 국가

2. 치교의 도

첫째는 ‘도(道)’로써 다스리고 교화함이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본래 성품인 우주의 원리를 깨치게 하여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대도로 무위이화의 교화를 받게 하는 것이요,

「정산종사 법어」

제2 예도편 10장

이것이 다 무위자연한 이치를 따라 되는 것이므로 단지 현장에 나타난 것만으로는 능히 판단하지 못하느니라.”

「정산종사 법어」

제4 경륜편 24장

하늘의 기운 하나가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우주 만유를 생성하듯이, 우리의 정성 하나가 새로운 도덕으로 만생을 제도할 것이니라.

『대산종사 법어』

제11 교훈편 58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아무도 모르게 바람을 일으켜 무위이화로 만물을 화육하듯, 성인들도 아무도 모르게 자비 바람을 일으켜 그 은덕으로 만 생령을 화육하느니라.”

『대산종사 법어』

제15 경세편 3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원 대도를 선양하기로 하면 수신을 근본으로 삼고 정법으로 계몽하며 자비로 호념해야 하나니, 이처럼 하고 보면 대도 정법은 무위이화로 드러나고 세상은 자연히 지상낙원이 될 것이니라.”

『대산종사 법어』

제15 경세편 20장

대산 종사, 기원문을 지으시니 무위자연의 도심을 길러 주어 도국을 만들고…

『한울안 한이치에』

제1편 법문과 일화 6. 돌아오는 세상 17절

남북 통일과 세계 평화는 무위이화로 될 것이다. `우리 이러지 말자.` 하고 손잡을 날이 올 것이다.“

『한울안한이치에』

제2편 평상심

8.유념과 무념

대도(大道)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든지 상덕(上德)은 부덕(不德)이라든지 상천지재(上天之載)는 무성무후(無聲無嗅)라든지 하는 등 말씀이 모두 이 무념 하나를 잘 공부하라는 교훈이 아닌가.

『대산종사법문집 제1집』

정전대의 8. 사요

공도주의를 실현하면 인류의 생활이 무위이화(無爲이化) 로 골라질 것이요,

『대산종사법문집 제1집』

정전대의 9. 삼학

그러나 이렇게 된 뒤에도 늘 계속 정진해야 상(相)없는 무위이화의 덕화(德化)가 나타날 것이다.

『대산종사법문집 제1집』

수신강요 1.

106. 교화의 삼단

동정간 삼학수행을 몸소 실천해서 대중의 사표가 되어 무위이화로 천하가 감화를 입게 하는 것 (교화사업)

『대산종사법문집 제1집』

수신강요 1.

125. 유아교육

도인은 천지의 질서를 잃지 않는 자연이니 오직 어긋침이 없는 무위자연의 생활을 하도록 하자.

『대산종사법문집 제1집』

수신강요 2.

15. 중용의 대의

일인이 지성 즉 천하가 성실무위(一人至誠則 天下誠實無僞)하고

『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 1부 교리

삼학공부

9)상을 없애는 공부

상이 떨어진 행이라야 천지 같은 무위 자연행(無爲自然行)이 될 것이요,

『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4부 신년법문

대도선양의 길

자연 대도정법은 무위이화로 들어날 것인바 이가 바로 대도선양의 기본 강령인 것입니다.

『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4부 신년법문

인화하는 길

오직 순실한 마음으로 어떤 처지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 그 도(道)와 법(法)을 잘 알아서 그 실행에 정성을 다하여야 무위이화(無爲而化)로 심화(心和) 기화(氣和) 인화(人和)가 되어

『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4부 신년법문

중도로 세계평화

한 사람이라도 이 도에 큰 원(願)을 발하여 지극(至極)히 정성(精誠)하고 보면 천하(天下)가 드디어 성실(誠實) 무위(無爲)하여 가고,

『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4부 신년법문

사요실천으로 평등 세계 건설

공도주의를 실현하면 인류의 생활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골라질 것이요,

『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5부 대각개교절 경축사

교화의 삼단

동정간(動靜間) 삼학(三學) 수행을 몸소 실천하여 대중의 사표가 되어 무위이화로 천하가 감화를 입게 하는 것으로서 교화사업이 바로 그 길인 것입니다.

『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5부 대각개교절 경축사

도덕세계 건설

다같이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감화를 입는 대교화가 베풀어지는 것이요. 무위이화의 대교화가 널리 미쳐야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2편 교법

87. 사요

공도주의(公道主義)를 실현하면 인류의 생활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골라지고,

『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9부 행사치사

대적공실

①무위대도를 행하자는 것은

②천지가 무위자연으로 운행하기 때문에 천장지구(天長地久), 곧 하늘은 길고 땅이 오랜 것입니다.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3편 수행

39. 중앙훈련원의 원훈

다음은 무위대행(無爲大行)이다. 유위행(有爲行)은 오래 가지 못한다. 천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므로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이 길고 땅이 오래인 것이다.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7편 법훈

276. 성현의 은덕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만물 모르게 바람을 일으켜 무위이화(無爲而化)로 화육(化育)시키듯이 성인들도 만생령 모르게 일을 하시나 만생령은 그 은덕(恩德)에 화육되어 진다.』

본래 성품

「정전」 제 3 수행편

제3장 염불법

염불의 요지

천만 가지로 흩어지는 정신을 오직 미타 일념에 그치며 순역 경계에 흔들리는 마음을 무위 안락의 지경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곧 참다운 염불의 공부니라.

『한울안한이치에』

제1편 법문과 일화 7.기연따라 주신말씀. 12절

정성숙에게 글을 주시었다. “天地無心成化 聖人有心無爲”

번역하면, `천지는 마음이 없으나 소소 영령하게 만물을 화육하고, 성인은 마음이 있으나 무위이화로 중생을 제도한다.`

『한울안한이치에』

제1편 법문과 일화 8.화합교단 51절

한 제자가 자기 사람을 만들려고 분당을 지으려 함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대인은 자비심이 충만한지라 무위심으로 사람을 대하되 만인이 귀의하여 멀리 있으면 그립고 가까이 모시면 싫지 아니하나…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대중의 인심 얻기에 힘 쓸 것이 아니라 자기 공부 잘 하여 도력만 갖추면 제자 없어서 교화 못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대산종사법문집 제1집』

수신강요 2.

9. 교화의 도

8. 오직 바르고 원만한 도덕을 갖춘 무위이화의 덕화라야 오랜 세상에 많은 사람을 널리 교화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9부 행사치사

대적공실

①무위대도를 행하자는 것은

②천지가 무위자연으로 운행하기 때문에 천장지구(天長地久), 곧 하늘은 길고 땅이 오랜 것입니다.

수행의 표준

『대산종사 법어』

제4 적공편 63장

무등등한 만능, 대반야지(大般若智)의 만지, 무위대행(無爲大行)의 만덕을 우리의 수행 표준으로 삼아야 하느니라.

『대산종사 법어』

제4 적공편 68장

유위위무위 무상상고전 망아진아현 위공반자성(有爲爲無爲 無相相固全 忘我眞我現 爲公反自成).

『대산종사 법어』

제5 법위편 36장

또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다.’라는 것은 일이 없을 때는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준비 공부를 하자는 것으로, 선정 삼매(禪定三昧)와 나가 대정(那伽大定)과 적멸 궁전(寂滅宮殿)과 대적 광전(大寂光殿)과 무위 대행(無爲大行)의 정정 공부(定靜工夫)를 하자는 것이니라.”

『대산종사 법어』

제9 동원편 17장

‘모든 성현이 다 무위법(無爲法)으로써 차별이 있게 한다.’ 함은 오직 함이 없는 법으로 차별함을 보임이요,… 이상은 여래의 참뜻을 밝혀 간추린 바이니, 남에게 알리는 것도 중요하나 먼저 각자의 마음에 표준으로 삼고 마음 쓰는 길이 되어야 하느니라.

『대산종사 법어』

제11 교훈편 71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나는 다음과 같은 대치 공부를 표준으로 잡고 살았나니, 첫째는 절대(絶對) 공부요, 둘째는 무심(無心) 공부요, 셋째는 지선(至善) 공부요, 넷째는 무루지 통달(無漏智通達) 공부요, 다섯째는 무위법(無爲法) 공부니라.”

『한울안한이치에』

제2편 평상심

5.일원상에 대하여 5.일원상 체받는법

이 법을 오래 계속하면 필경 낱(個)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진망이 구공하고 물아 동일하여 능히 생사를 초월하고 무위(무위 한다는 것은 상[相]이 없는 것)에 안주할지니 이런 자는 곧 일원상에 회복되어 여래의 법신을 여실히 확득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대산종사법문집 제2집』

제9부 행사치사

대적공실

①이 적공실에서는 각자 각자가 정신을 수양하여 나가대정·용상대정(那迦大定·龍象大定)을 쌓고 사리를 연구하여 무루대지(無漏大智)를 얻고 작업을 취사하여 무위대도(無爲大道)를 실천하여 삼대력을 얻자는 것입니다.

②무위행(無爲行)이라야 참이요, 유위행(有爲行)은 조작이며 일시적인 것이니 이 조작행이나 일시적인 행은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③각자가 이 적공실에서 나가대정을 쌓고 무루대지를 얻고 무위대도를 실천하는 공부로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1편 신성

4.법륜

유위위무위(有爲爲無爲) 무상상고전(無相相固全) 망아진아현 (忘我眞我現) 위공반자성(爲公反自成).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3편 수행

37. 대치공부의 표준

다섯째, 무위법공부(無爲法工夫)이다. 행(行)에 있어서는 무위법. 무위행을 하여야 천지대행(天地大行)에 합하여 진다.}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3편 수행

39. 중앙훈련원의 원훈

①그러니 우리도 무위행이라야 한다.

②훈련원을 대적공실로 삼아서 정신수양을 하여 용상대정을 얻고 사리 연구를 하여 무루대지를 통달하고 작업취사를 하여 무위대행을 실천하여 삼대력을 얻어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3편 수행

140. 작업취사 공부

작업취사의 구경(究竟)은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되고 자비만행(慈悲萬行)을 나토게 되어 만덕존상(萬德尊上)이 되고 무위대행(無爲大行)의 천지행을 이루어 대소를 자유하게되는 것이다.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7편 법훈

96. 무위유위

말씀하시기를 『함이 있는데 함이 없는 것 같고 〔有爲無爲〕함이 없는 것 같은데 함이 있는 것〔無爲有爲〕이라야 크게함〔大爲〕이다.』

기타

「대종경」

제13 교단품 9장

또한 옷 한 벌 밥 한 그릇이 다 농부의 피와 직녀의 땀으로 된 것인데 그만한 사업이 없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한다면 여러 사람의 고혈을 빨아먹음이 되는 연고요,

 

 

 

 

 

 

 

 

 

 

원불교학과

Wonkwang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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