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참회문에 대한 고찰
-‘일원상의 진리’와 참회의 관계를 통한 전 지구적 문제해결–
김인준(金仁俊)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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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작하는 말
Ⅱ. 참회의 원리와 방법 1. 참회의 원리와 일원상의 진리 2. 일원, 성품, 인과와 참회 3. 참회의 방법
Ⅲ. 전 지구적 문제와 참회 1.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 2. 공업의 참회 3.원불교 사은사상과 참회적 접근
Ⅳ.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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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작하는 말
“종교란 일정한 종지(宗旨)를 세우고 그 종지 아래 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여러 종교마다 그 궁극의 대상 또는 신앙과 수행의 체계가 다르지만, 그 종지에 바탕해 더 나은 삶으로 거듭나고자 함은 공통적이다. 전날의 죄과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참회’의 개념 또한 종교마다 용어는 다르나 그 의미는 대체로 공용되기 마련이다. 진리의 궁극에 다다르게 하는 길로서는 같은 맥락인 것이다. 원불교 ‘참회문(懺悔文)’은 참회의 의미와 방법을 밝혀둔 원불교의 대표적 경문으로「정전」제3수행편 제8장에 있다.
본 연구는 ‘제생의세’를 주창하는 원불교의 목적에 비해 원불교 참회문에 대한 선행연구들이 대체로 참회의 유래와 원리, 그리고 방법에 대한 원론적 해석 차원이 주를 이뤘으며, 참회의 대상이 다소 개인의 수행에 국한된 소승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한계와 경향이 있음을 파악하였다.
21세기 현대사회는 과학혁명, 인지혁명, 생명공학을 통해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초지능’,‘초연결’, ‘초융합’으로 이름 되는 ‘제4차산업혁명(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빚어온 합리와 편리라는 문명의 빛 이면에 다원적이며 복합적인 전 지구적·사회적 문제가 도출되어 인간을 잠식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한 개인의 노력과 수행으로는 뒤바꿀 수 없는 범위의 업력이 작용하여 그 영향을 끼치고 수많은 개인의 업을 선도가 아닌 악도로 쉽게 이끌어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 지구적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이다. 진정한 개인의 해탈과 자유는 타인과 만물의 상호연관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한 개인의 참회만을 강조하는 것은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 하자는 소태산의 개교정신과 부합되지 않는다. 공업의 결과인 인류가 직면한 전 지구적 위기에 대해 원불교의 참회는 실천 이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논한다.
먼저 원불교의 참회문(懺悔文)에서 밝힌 참회의 원리를 해석하며 그 근거를 소태산의 깨달음인 ‘일원상의 진리(一圓相-眞理)’와 ‘일원상법어(一圓相法語)’를 근거하여 살펴본다. 성품, 인과, 육도윤회, 해탈의 개념들을 소태산의 법통을 이어 후계 종법사가 된 정산종사(송규,1900-1962, 이하 ‘정산’이라 칭함)의 「불교정전 의해」를 기반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의 방법의 관계가 ‘해탈(解脫)’을 이루기 위한 상호보완적인 관계임을 입증한다. 또한, 현대사회의 다단한 문제해결은 업의 해석에 있어 그동안 도외시 되었던 공업(共業)의 문제이기에 이에대한 해석을 연기(緣起)와 유식(唯識)의 관점을 더불어 해석하며 원불교 참회가 나아가야 할 시대적인 사명을 재조명하여 관념적 깨달음만이 아닌 사실적이고 제중적인 의미를 실현하는 참회를 실현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원불교 참회의 원리와 그 방법이 곧 이 시대가 해결할 수 없는 전 지구적 공업의 문제를 일국적 차원이나 전통종교의 한계를 뛰어넘어 원만히 해결할 대안임을 제시한다.
Ⅱ. 참회의 원리와 방법
참회(懺悔)란 자신이 범한 죄나 과오를 깨닫고 뉘우치는 일을 의미한다. ‘참(懺)’은 싼스끄리뜨의 끄샤마(kṣama)의 음역으로 ‘인(忍)’을 의미하며 타인에게 자기 죄의 용서를 비는 그것을 뜻하는 말로써, 엄밀히 따지면 실수를 뉘우치는 ‘회(悔)’와는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점차로 ‘참’과 ‘회’가 동일시되어서 ‘참회’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참(懺)에 회(悔)자를 보탠 것은 싼스끄리뜨와 한어(梵漢) 두 말을 합쳐서 사용한 것이다.
참회의 어원을 찾아보자면, 본래 불교 용어로 그 연원은 석가모니불의 당대로부터 시작된다. 매월 초하루나 보름에 승가의 대중이 모여 250계의 조목 하나하나를 청정한지 반조하던 포살(布薩, Posadha), 하안거가 끝나는 7월15일에 전 대중이 모여 자기반성과 함께 안거기간 저지른 죄에 대해 대중 앞에 고백하던 자자(自恣, Pravarana)와 대승불교의 역사적 맥락에 있어지는 여러 참법등이 불교적 참회의 대표적 형태이다.
여러 종교에서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참회의 용어로 회과(悔過)가 있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교 등에서 종교적인 용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불교에서는 타인에게 자기 죄의 용서를 비는 뜻으로 쓰인다. 개신교에서는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죄악으로 가득 찬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교에서는 ‘고해’라고 하여 세례를 받은 자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받는 의식절차를 뜻한다.
원불교에서는 참회의 원리, 의미 그리고 방법을 ‘참회문(懺悔文)’에서 밝히고 있다.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의 대각 이후 그가 열반하기 전에 친감하여 발행한 『불교정전』 제3편 수행편 제11장에 ‘참회문’의 이름으로 처음 교리화 되어 등장한다. 이후 ‘참회문’ 중 고경론에서 인거한 부분을 전부 삭제하는 등 수정을 거쳐 원기47년(1962) 「정전」제3 수행편에 수록되었다.
1. 참회의 원리와 일원상의 진리
참회의 원리와 방법은 원불교 교리의 귀결점인 ‘일원상 진리’에 기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참회문의 첫 단락은 ‘음양상승의 도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동일한 이치를 밝히고 있는 ‘일원상 법어’에 대한 정산종사의 의해에 근거하여 참회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음양 상승(陰陽相勝)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相生)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相克)의 과보를 받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으되, 영원히 참회 개과하는 사람은 능히 상생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제불 조사가 이구 동음으로 참회문을 열어 놓으셨나니라”.
참회문에 따르면 참회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며,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오는 초문”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앞선 단락의 내용이 곧 참회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된다. 음양상승의 도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는 ‘일원상 법어’에서도 설명이 되고 있다. 원불교 신앙과 수행의 표본이자 모든 교리의 귀결점은 곧 일원상의 진리라는 점에 있어서 참회의 원리는 일원상의 진리와 연관되어 설명되어야 한다. 유가의 우주론 및 존재론인 음양상승의 도가 유정의 업력을 존재의 근원이 되는 불교의 인과보응 되는 이치가 표층적 차원에서는 상충되며 이율배반적일 수 있으나 소태산의 일원상의 진리의 체계 안에서 융합될 수 있다.
일원상 법어에서는 이 원상의 진리를 깨달을 때의 결과를 6가지의 내역으로 설명하고 있다. 법어의 논리적 구조는 “이 원상의 진리를 각하면, A가 B인 줄을 알며”이다. 이 원상의 진리를 각하면 첫째, 시방 삼계가 오가(吾家)의 소유임을 알고, 둘째,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셋째, 제불·조사와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며, 넷째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다섯째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陰陽相勝)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여섯째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인 줄을 안다.
이와 같이 참회문 첫 단락 인과보응의 이치와 음양상승의 관계가 일원상 법어에서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로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참회문의 원리를 밝히기 위해서는 일원상의 진리와 음양상승의 이치 그리고 인과보응의 이치의 상호 내역됨을 분석하는 것이 참회의 원리를 해석하는 데 있어 관건이 된다.
일반적으로 인과보응은 유정의 업력으로 인한 불교의 존재론으로, 음양상승은 도가와 유가의 존재론으로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 불교적 차원에서 인과보응의 관점으로 음양상승을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유교적 차원에서 음양상승을 이해하여 이 둘 간의 관계를 설명할 것인지, 아니면 불교와 유교의 어떤 특정한 입장이 아닌 소태산의 깨달음에 기반한 제3의 방식의 관계로 설명한 것인지가 해석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역사적 종교인 불교나 유교의 특정한 관점에서 소태산의 깨달음과 교리를 해석하지 않는다. 소태산의 깨달음의 차원에서 상호 이율배반적인 전통종교의 존재론은 융합될 수 있다고 본다.
2. 일원, 성품, 인과와 참회
「불교정전 의해」의 ‘성품 또는 성리와 인과의 관계’ 그리고 ‘진리의 양면관’에 대한 해석 참회문의 원리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정산은 상산 박장식 종사의 ‘진리의 양면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 여쭙기를 “성리와 인과는 진리의 양면관이니 부합된 점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정산종사 답하시기를 인과의 체가 성리(性理)이요, 성리를 운용하면 인과라, 이 성리를 깨달으면 인과의 변화를 알게 되고 인과를 알게 되면 성리를 깨닫게 되어, 인과가 성리요 성리가 인과이니라. 우주는 항상 산 기운인지라, 이 산 기운으로 일체 만물이 연(連)한 음양상승의 이치가 작용하여 저절로 은원(恩寃)을 만나게 되나니라.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곧 인과의 체가 성리이며 성리를 운용하면 인과이다. 인과가 성리요 성리가 인과인 것이다. 성리는 성품의 이치다. 성품을 오롯이 알면 인과의 변화를 알게 된다는 것이며 개념적 구분으로서는 하나가 아니나(不一) 이나, 또한 둘이 아닌 불이(不異)의 진리의 양면관을 밝히고 있다. 정산은 “성품과 인과가 둘이 아닌 관계”로 설명하고 있고 인과가 성품의 체이며 “성품의 운용이 인과”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성품(性稟)과 인과(因果)가 둘이 아니니 인과(因果)의 체(體)가 성품(性稟)이요, 성품(性稟)의 운용(運用)이 인과(因果)이라, 고금을 통해서 유아(唯我) 종사님 같이 불교의 강령(綱領)을 이와 같이두렷이 내 놓으신 분은 희유(稀有)하나니라.
참회문의 첫 단락은 음양상승의 이치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성품에 대한 직접적 말씀은 없다. “영원히 참회 개과하는 사람은 능히 상생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나니” 라는 설명만 있을 뿐 성품과 관련된 말씀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참회문 첫 단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과의 체가 성품이며 성품의 운용이 인과’인 관계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필요하다.
성품의 운용이 인과라는 정산의 의해에 근거하여 성품과 인과의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이기에 육도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할 수 있게 된다.「정산종사법어」 원리편 2장에서는 ‘일원상의 진리’를 ‘일원의 진공체’, ‘일원의 묘유’, ‘일원의 인과’, 세 가지로 나눠 일원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말씀하시기를 [일원상의 원리는 모든 상대가 끊어져서 말로써 가히 이르지 못하며 사량으로써 가히 계교하지 못하며 명상으로서 가히 형용하지 못할지라 이는 곧 일원의 진공체(眞空體)요, 그 진공한 중에 또한 영지 불매하여 광명이 시방을 포함하고 조화가 만상을 통하여 자재하나니 이는 곧 일원의 묘유요, 진공과 묘유 그 가운데 또한 만법이 운행하여 생멸 거래와 선악 과보가 달라져서 드디어 육도 사생으로 승급 강급하나니 이는 곧 일원의 인과인 바, 진공과 묘유와 인과가 서로 떠나지 아니하여 한가지 일원의 진리가 되나니라.
인과의 체란 곧 일원의 진공체이며 그 진공체는 다름 아닌 성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진공한 중에 매하지 아니한 영지가 있고 그 광명이 또한 가득 차 있으니 곧 묘유이다. 이 묘유의 세계를 작동하는 것이 곧 인과의 원리이다. 원리편 2장에 따르면, 정산종사는 일원상의 진리를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동시에 이 세 가지가 하나의 진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원의 진공체, 일원의 묘유, 일원의 인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이 세 가지가 하나의 일원상의 진리이다. 일원의 묘유가 다시 일원의 인과로 구분되는 것은, 「정전」 ‘일원상의 진리’에서의 ‘진공묘유’의 구조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일원상의 진리를 진공과 묘유 그리고 진공과 묘유를 주재하는 공적영지의 광명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 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공적영지의 광명’을 통해 나타난 세계가 묘유의 세계라고 한다면, 그 묘유의 세계에서 대는 소로 소는 대로의 상호 관계가 인과의 원리에 따라 운동, 생성, 소멸, 순환이 시작되는 것이고, 대와 소의 관계뿐만 아니라 동일한 원리에 따라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묘유와 인과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일원상의 진리’와 ‘일원상 서원문’에 따르면 일원은 ‘심인’이며 ‘본성’이며 제불·조사·범부·중생의 성품이다. 성품은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설명되고 있다. 각각 상이한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없는 자리와 돈공한 자리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그 없는 자리를 설명하는 대소유무, 생멸거래, 선악업보의 범주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대소유무는 「정전」 ‘사리연구’에서 밝히고 있는데, 소, 유,무의 의미와 같이 그 자체로 특정한 의미를 갖고 있기보다는 현상세계의 일체의 상대적인 것들과 그 관계를 포괄하는 추상 수준이 높은 범주로서 사용되고 있다.
일원상 진리의 대·소·유·무가 특정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세계의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다. ‘일원상 서원문’에서 일원을 성품이라고 밝히고 있기에, 바로 성품은 유와 무, 대와 소의 분별이 없는 자리로서 일체의 상대를 넘어서 절대며 초월이다. 이것이 성품의 체라고 할 수 있다.
인과의 체가 성품이라고 했으니 성품과 인과의 관계는 분별없는 자리와 분별있는 자리의 관계가 된다. 분별없는 자리가 체인데, 그 체로서의 성품의 작용이 공적영지의 광명이 되어 체와 용을 주재하게 된다. 그 광명이 빛을 비춰 대소·유무의 분별, 선악업보의 차별, 언어명상이 완연하게 된다. 그것이 묘유이다. 묘유의 세계에서 대는 소로, 소는 대로,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선은 악으로 악은 선으로 변화한다. 묘유의 세계는 변화, 생성, 운동의 세계다. ‘체’ 자리를 단순히 공허하고 추상적인 ‘체’로서만 이해해 버리는 것은 영지가 발하는 자리를 한정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때문에 체와 용을 주재하는 ‘영지’의 개념이 중요하다.
“우주 만유의 본원은 법신불의 체요, 그 체 가운데에 한 기운이 순환하여 천변 만화를 행하는 것은 법신불의 용이요, 그 체용 가운데에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무엇으로 가히 말할 수가 없으나 항상 허령 불매하여 엄연히 체용을 주재하는 것은 법신불의 영지(靈知)니, 체와 용과 영지가 다 법신불 하나이며 우리들의 육체와 기운과 마음도 또한 법신불의 한 분자로서 서로 통하여 둘이 아니니, 그 둘이 아니므로 생로병사와 인과보응이 다 법신불의 도를 따라 호리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요, 그 둘이 아니므로 마음에 법신불을 상대하여 무슨 서원을 올린 때에도 일심이 지극하면 자연 우주의 위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 둘이 아니므로 열반인의 영을 상대하여 무슨 행사를 할 때에도 일심이 지극하면 비록 어떠한 세계에 있을지라도 서로 통하여 감응되고 또는 그 위력이 미쳐 가나니 이것이 곧 일원의 융통한 진리니라. ”
정산종사 예도편 9장 법문은 우주 만유의 본원인 법신불의 체와 천변 만화를 행하는 법신불의 용, 그리고 체용 가운데 허령불매하여 엄연히 체용을 주재하는 영지의 개념을 밝히며 성품의 이해를 돕는다. ‘체’는 곧 일원상의 진리에서의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 ‘본래 선악 염정이 없는 우리 본성자리’를 뜻한다. 용은 대소유뮤의 분별이 나타나는 자리는 곧 수연응용의 자리로서 이 용의 측면에 있어 영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관건이다. 체용을 주재하는 대상에 따른 지각적 앎이 아닌 본래의 앎 그것이 바로 자성본용으로서의 영지이다. 이렇듯 분별 없는 자리에서 분별 있음이 나타나고 진공과 묘유를 주재하는 것은 바로 일원상의 진리에서의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분별이 나타는 것은 우리 본성에 소소영령한 영지가 있기 때문이다. 개념상의 구분이지만 앞서 법문의 내용과 같이 이 체와 용과 영지가 다 법신불 하나이며 또한 하나의 성품이다. 다음의 도표는 성품의 체와 용, 영지의 관계를 통해 성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1. 체 자리로서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청정심과 맥락을 같이하는 경지, 2. 마음 자체의 본래적 작용의 의미로서 자성본용, 3. 대상에 응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인 수연응용이다.
마음의 체 | 청정심 | 체 |
마음의 용 | 자성본용=영지 | 성 |
수연응용 | 상 |
<표1 마음의 체와 용 >
본래 선악 염정이 없는 우리 본성에서 범성과 선악 또한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수연응용은 대소유무에 분별이 있는 자리, 그리고 진공과 묘유를 주재하는 것은 바로 일원상의 진리에서 나타난바 ‘공적영지의 광명’이다. 성은 작용으로서 공적영지의 광명의 작용이다. 바로 이 매개가 비유하자면 그 빛이 광원이 되어서 비추고 그 빛의 비춤에 의해 각각의 구별과 경계가 형성되어 상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체와 상의 관계가 또한 둘이 아닌 관계이기 때문에, 육도윤회 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세계의 온갖 차별과 구별이 실은 본성을 여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영지가 단지 심성론적 차원이 아닌 존재론적 차원에서 현상세계가 형성되어 있는 원인을 함장식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보조국사 지눌은 “본심을 깨치고 제 마음 거울 속에 제망처럼 겹겹한 다함이 없는 법계를 본 이런 일들은 선문의 기록 가운데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있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깨달음을 본성의 자각으로만 생각하고 법계와의 연관성에 대해 해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한자경은 ”지눌은 특히 선을 마음의 본성 자각만 내세우고 법계와의 연관성은 해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지눌이 강조하는 일심은 그냥 청정심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연하여 형성되는 법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한 마음 본성의 자리는 심성론적인 입장으로서 자성의 체 자리가 되는 동시에 용의 측면에서 생멸변화하여 작용되는 존재론적 입장에서도 그 현상세계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죄업이 공한 자리를 깨쳤다고 하나 거기서 그쳐버리고 ‘유근신(有根身)’과 ‘기세간(器世間)’에 지어놓은 업장을 소멸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저 관념에 치우쳐져 버린 참회에 머문다. 이는 온전한 참회라 이름할 수 없을 것이다. 한자경은 이를 ”돈점의 상호연관성을 밝히며 ”곧 그 본심의 자각이 곧 그 순간 마음의 모든 오염을 당장 없애 버린다는 것은 아닌 것.“ 이라 하였다. 이는 ‘이참의 죄업의 공성을 발견한 것’ 만으로 참회를 다 알고, 사참을 등한시하는 경우에 비판의 근거가 된다.
‘천업을 임의로 하는 것’의 의미는 『정산종사 법설』「불교정전의해」에서 천업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있는지를 보면 참회문의 요지가 더욱 선명해진다. 「불교정전의해」에 따르면 정산은 천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음(陰)이 극(極)하면 일양시생(一陽始生)하여 차차 음(陰)은 밀리고 양(陽)이 세력(勢力)을 잡는 것과 같이, 선악(善惡)도 꼭 이와 같이 되어 극(極)히 선한 자가 변하여 악할 수 있고, 극히 악한 자가 선으로 변하여 선자(善者)가 될 수 있나니 이것이 천업(天業)이니라.
천업은 다름 아닌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 ‘천업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는 자리인 진공의 체, 성품의 체를 통해서 가능하다. ‘성품의 운용이 인과라는 것’은 성품의 체와 작용의 결과인 묘유 그리고 인과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곧 극선자(極善者)가 그 선으로 인하여 사상(四相-人相, 我相, 衆生相, 壽者相)이 다북 차 악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니, 육도(六途)에 자주력(自主力)을 얻지 못한 자는 아무리 선하다 하여도 결코 천업(天業)을 면치 못하나니라. 그러므로 사상(四相)이 공(空)한 자라야 지선(至善)이니, 비하건대 저 허공(虛空)이 본래는 한 점 구름도 없는 청정(淸淨)한 것과 같이 우리 심중에도 먼저 사상산(四相山)이 부서져야만 지선(至善)에 이르러, 선악업보(善惡業報)를 초월(超越)하고 육도(六途)를 자유로 하여 음양상승(陰陽相勝)도 없나니라. 대저 우주(宇宙)는 한 기운이라, 그러기 때문에 살아있는 우주이요 산 우주이기 때문에 음양상승(陰陽相勝)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되나니 또한 이 성품(性稟)과 인과(因果)가 둘이 아니니 인과(因果)의 체가 성품(性稟)이요 성품(性稟)의 운용이 인과(因果)이라.
선악업보를 초월하고 음양상승도 없는 경지 즉 천업을 돌파할 수 있는 원리는 바로 일원의 진공체이다. 일원의 진공체는 대와 소, 유와 무로 나뉘기 전의 자리로 일체의 분별도 경계도 없는 절대와 초월의 경지이다. 이것이 분명히 밝혀질 때, 바로 참회 개과가 가능하고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본래 선악 염정이 없는 우리 본성에서 범성(凡聖)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본성에 소소 영령한 영지(靈知)가 있기 때문이니, 중생은 그 영지가 경계를 대하매 습관과 업력에 끌리어 종종의 망상이 나고, 부처는 영지로 경계를 비추되 항상 자성을 회광 반조하므로 그 영지가 외경에 쏠리지 아니하고 오직 청정한 혜광이 앞에 나타나나니, 이것이 부처와 중생의 다른 점이니라.”
곧 영지가 경계를 비추되 바로 자성에 회광반조하는 부처의 경우와 업력에 끌리는 중생의 경우를 대비한 법문이다. 이러한 영지가 성품의 체를 놓지 않고 작용하는 부처의 작용과 반대되는 중생의 차이는 「대종경」 불지품 법문에서 밝히는 범부 중생과 부처가 육도윤회에 자유하고 못하며 천업을 돌파하고 못 하는 차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앞서 분석해본 바 참회문의 첫 단락 즉 음양상승의 도를 따라 상생상극의 과보를 받는다는 묘유와 인과의 원리는 현상세계와 우주 자연의 이치만을 말할 뿐이지 그런 변화와 구별과 경계지어진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성품의 체 자리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음양상승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이치만이 언급되고, 참회개과를 해야 하며,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다는 선언적인 법문이며, 참회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는 참회문의 첫 단락이 온전히 설명되기 위해서는 일원의 진공체, 일원의 묘유, 일원의 인과를 명확히 하여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3. 참회의 방법
근본적이고 영원한 참회의 방법은 원리에 바탕한 참회여야 한다. 방법은 원리에서 도출되어야 하며 원리에 합일할 수 있는 경로이다. 참회의 원리와 방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원불교 참회의 방법은 이참과 사참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이 두 가지 구분과 유사한 구분은 중국 천태종의 개조(開祖)인 천태지의(天台智顗·538 ~ 597)의 설법 내용인 <마하지관(摩訶止觀)>의 실상의 이치를 깨치는 관법으로서의 ‘이참’과 참회를 행동으로서 나타내는 것을 ‘사참’으로 구분하는 데에서 유래한다. 원불교 참회의 방법은 ‘이참’과 ‘사참’ 두 가지로서 이참은 참회문에 밝힌바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감 ”이다.
“죄짓는 원리를 깨달아서 죄업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며 죄짓는 심법 구조를 알아서 그 구조를 바꿈으로써 상극을 상생으로 악업을 선업으로 바꾸는 것이다. 사참이 밖으로 사은 당처에 불공을 계속함으로써 미래의 복덕을 축적하는 것이라면, 이참은 죄짓는 심법을 복짓는 심법으로 그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밖으로 정치나 경제에 우선하여 고통을 안겨 주는 죄업을 짓게 되는 원천적인 원리를 깨달아서 스스로 자기의 죄업을 극복하는 길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이참이다.”
경산의 이참에 대한 해석을 통해 이참이라 하는 것은 죄업의 근본적인 극복을 위해 원리를 깨닫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적으로 심법으로 악업을 짖는 구조의 변화를 통해 원천적으로 죄업을 극복하는 구원의 실천이 된다.
또한 사참은 참회문에 밝힌바 “성심으로 삼보(三寶)전에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을 이름”이다. 앞선 이참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경산은 사참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나의 성격, 나의 주변 환경을 깊이 반성하고 나를 바루지 않으면 죄악을 벗어날 수 없음을 확실하게 깨달아서 새롭게 살기로 결심하는 것이며 구업(舊業)을 청산하고 새 생활, 진리적인 생활, 복전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
마음은 무명의 극복인 해탈이 아니고서는 늘 지난 날의 업을 벗어나지 못하여 늘 그 업장의 경향성을 따라 마음이 발하여 지기 때문에 형성되어진 내적인 성격과 주변 환경을 적극적으로 바루어 가는 구업의 청산이 필요하다. 이것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환경까지도 그 범위에 이르기에 그 대상과 영역을 한정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원불교적 삼보의 의미가 갖는 특징이 되기도 한다. 원불교적 삼보의 의미는 다음의 법문을 통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삼보(三寶)를 신앙하는 데에도 타력신과 자력신의 두 가지가 있나니, 타력신은 사실로 나타난 불(佛)과 법(法)과 승(僧)을 사실적으로 믿고 받드는 것이요, 자력신은 자성 가운데 불과 법과 승을 발견하여 안으로 믿고, 수행함이라, 이 두 가지는 서로 근본이 되므로 자력과 타력의 신앙을 아울러 나가야 하나, 공부가 구경처에 이르고 보면 자타의 계한이 없이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한 가지 삼보로 화하나니라.”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불교에서의 삼보의 의미는 협소한 해석과 비교적 현실 세계에 나타난 대상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다. 소태산의 삼보신앙의 관점은 그 공부의 구경처까지 명확히 밝히며 사참의 대상이 자타의 경계를 초월하고 사참의 대상이 한 사람의 부처님, 문자화된 경전, 절간의 승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관념과 실재의 국한을 초월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까지 확장되는 광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서 그 죄과를 뉘우칠 대상이 소극적으로 해석되던 기존의 불교 해석과는 차원이 다른 범위를 밝히고 있다.
사참과 이참을 개념화하여 구분 지을 수 있으나 원만한 참회에 있어서 이참과 사참 모두가 중요하며,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가 결여될 때에는 완전한 참회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쌍수를 강조한 것이다. 참회를 함에 있어 이참만을 강조하여 죄업의 공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허무적멸의 강조만 이루어짐은 곧 전통종교의 형해화(形骸化)를 초래했다. 반대로 사참만을 강조하여 밖으로 죄과를 뉘우치고 선업을 행하기에 집중하지만, 심중의 탐진치가 멸한 자성의 원리를 깨치지 못한다면 또한 영원한 참회가 되어지지 못하여 표층적 차원의 참회 또는 일시적인 참회에 그칠 수 있다.
경산은 이참과 사참의 경우를 각각 사은 불공과 삼학의 선공부가 됨을 밝히며 병행을 강조하였다.
”밖으로 사은 불공 하는 것은 사참이요, 안으로 삼학의 선공부는 이참공부가 된다. 이 두 가지는 인생에 있어서 지혜와 복덕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선과 불공, 이참과 사참을 함께 닦는 것이 완전하고 신속하게 죄업을 선업으로, 상극을 상생으로, 죄고를 극락으로 바꾸는 첩경임을 알아야 한다.“
정산의 공부인들에게 일원상에 대하여 말하며 신앙 수행의 병진을 강조한 법문은 앞서 사참과 이참의 개념을 사은불공과 삼학의 선공부로 연관시켜 설명한 경산의 해석과 더불어 참회의 방법이 상호연관성에 기반하여 병행으로 이루어 져야 진리적으로 원만한 참회가 됨을 알 수 있다.
“우리 공부인들은 일원상(一圓相)에 대하여 신앙과 수행을 병진(竝進)하여야만 개인으로 보나 전체로 보나 많은 전진이 있을 것인바, 그러나 대개 지극한 신자(信者)들은 수행(修行)에 등한시 하는 자가 많고, 수행에 근행(勤行)하는 자는 또 신앙에 부족한 자가 많나니라. 그러므로 신앙에만 지극한 자는 무명(無明)을 면치 못하여 악도 타락할 것이요, 수행에만 지극한 자는 사미(邪迷)를 면치 못하여 악도 타락할 수 있으니, 이 두 가지를 병진하여야만 대반야지(大般若智)를 얻어 피안에 도달하리라.”
경산은 또한 삼학과 참회의 방법을 연결시키어 병진의 필요성을 해설하였다. 사은과 삼학 뿐만이 아니라 삼학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병진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지듯 사참과 이참의 관계에서도 원만한 이참을 이루어 가는 것은 곧 사참이 자연스레 병행되어지며 사참 또한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사참은 삼학으로 말하면 작업취사에 속하고 이참은 사리연구 정신수양에 속하기 때문에 직접 당처를 만나서 작업취사도 하여야 하고 당처를 만나기 전에 준비 공부로써 연구와 수양을 해야만 작업취사를 잘할 수가 있어서 이참과 사참은 함께해야 한다.“
이러한 교리의 상호연관성에서의 구분과 병진의 관점은 교리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이참과 사참, 신앙과 수행이라는 개념적 구분을 이원적인 두 개를 절충하는 것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며, 사참과 이참을 어느 하나에 고정된 것으로 정형화해 버리면 원만한 해석이 되지 못한다. 이 모든 설명은 상호보완되고 병진 되는 체계 속에 존재하는 불가분의 관계와 그 구분되는 내역을 이해시키기 위한 관계이므로, 어느 한쪽에 편벽되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신앙 안에 수행이 있고 수행안에 신앙이 있으며, 삼학 안에서의 해석도 또한 마찬가지로 어느 하나가 이루어지기 위해 자연히 두 가지가 더 하여 따라와지는 ‘쇠스랑의 세발’과 같이 병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참과 사참의 상호연관성에 기반하여 정성으로 쌍수하여 나오는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공부인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 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여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어서, 삼계 육도(三界六途)가 평등 일미요, 동정 역순이 무비 삼매(無非三昧)라”
참회의 결과는 곧 육도윤회에 초월하는 자유를 얻은 ‘해탈(解脫)’ 의 지경이다. “적적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에서 ‘적적성성’은 수행편 12장에서 밝히고 있는 선의 강령이다. 그 유래는 영가 현각(永嘉玄覺. 665-713)의 적적성성에 대한 해석과 같다.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은 옳고, 적적한 가운데 무기(無記)는 그르며, 또는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은 옳고, 성성한 가운데 망상은 그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자경은 ‘적성등지법’을 설명하며 “마음에서 마음 내용을 다 지워 적적하면서도 혼침에 빠지지 않고 성성하게 깨어 있는 것, 이것이 적성을 함께 유지” 한다고도 표현하였으며, 『선종영가집강해』에서 현각이 보여주고자 했던 세계를 표현하며, “대상을 반연하지 않고 의식 차원의 주객분별을 넘어선 마음의 ‘적적(寂寂)’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마음의 ‘성성(惺惺)’ ”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보조국사 지눌은 ‘적성등지법’을 통해 적적성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에 고요히 온갖 반연을 잊고 우뚝하게 단정히 앉는다. 바깥 경계를 취하지 않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비추어 본다. 우선 고요함[적적]으로써 반연하는 사려를 다스리고, 그다음 또랑또랑함[성성]으로써 혼침을 다스린다. 혼침과 산란을 고루 제어하되 취하고 버린다는 생각도 없게 한다.”
적적성성(寂寂惺惺)의 마음이 곧 마음이 육도윤회를 초월한 해탈의 경지이며 사참과 이참의 상호연관성에 기반한 쌍수로서 드러나지는 참회의 결과이다. 이 경지여야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완전한 참회의 완성은 곧 마음의 자유를 얻는 해탈의 경지이다.
Ⅲ. 전 지구적 문제와 참회
우리는 ‘초지능’,‘초연결’, ‘초융합’으로 이름 되는 ‘제4차산업혁명(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차세대 산업혁명’이라는 걸출한 이름 뒷면에는 급진적으로 발달한 문명의 이면에 묻어뒀던 문제점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무지와 빈곤 전쟁과 자본주의 체제가 빚은 양극화와 사회문제도 물론이거니와 그 범위가 어느 국가와 대륙을 넘어 전 세계가 직접적으로 그 영향과 해결의 선을 갖고 있는 문제는 전 지구적 문제인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이다. 이는 곧 어느 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나 특정 집단만이 빚어낸 업의 결과가 아닌 다수가 함께 공유하고 지어낸 ‘공업(共業)’의 결과이므로 참회의 규모 또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만이 아닌, 전 지구적 규모의 참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원불교 개교의 동기가 지향하는 목적성은 곧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전 지구적 위기상황에서 공업에 대한 이해와 원불교 참회의 원리와 방법의 실천은 곧 곧 원불교의 목적인 제생의세의 경륜을 실천하는 길이자 전 세계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해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
1.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
오늘날 지구촌은 이전에 없던 급진적인 변화와 위기의 시대에 처해있다. 이러한 때의 위기의식은 지난날 이성에게 맡겨두었던 인간 이기의 전말이 불러온 참상임을 알아 참회하여야 하며 이러한 참회의 규모 또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만이 아닌, 전 지구적 규모의 참회여야 한다. 대표적 전 지구적 문제로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상황의 문제가 있다.
“국제사회에서 ‘기후변화(climate change)’ 대신 ‘기후 위기(climate crisis)’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류가 직면한 위험성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취지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기후위기 외에도 ‘기후 비상사태Emergency’, ‘기후실패Breakdown’ 등의 표현을 사용하기로 발표했다.”
지구온난화, 해수면 온도상승, 이상기후 등의 그 단순한 ‘변화’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위기’와 ‘비상사태’라는 경각심을 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한자경은 현대의 체계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 상황을 “지구 표면의 넘치는 인간, 그 인간의 욕구충족을 위한 천연자원의 고갈, 지질·수질 및 공기의 오염, 그리고 오존층파괴와 지구온난화, 이제 재앙처럼 닥치는 해빙, 이상기류 현상, 해일 등” 으로 열거하며 이러한 위기상황이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자연환경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이토 코헤이(Saito Kohei)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생태파괴와 기후 붕괴의 전 지구적 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으로 보며 사회의 급격한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기후 붕괴라는 형태로 가장 첨예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알래스카, 캘리포니아, 아마존, 오스트레일리아는 더위와 불길에 휩싸였고 남극과 그린란드의 빙하는 빠르게 녹고 있으며 해수 온도상승으로 산호초가 죽어가고 있고 초대형 태풍과 허리케인이 도시를 파괴한다. 이 모든 현상은 산업혁명 이후 전 세계 평균 기온이 ‘고작’ 1.0℃ 높아진 데 따른 결과다. 기후 변동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 보고서는 현재의 CO2 배출 수준이 지속될 경우 세계의 평균 기온이 최대 5.0℃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지만 IPCC 보고서가 고려하지 않은 다양한 선순환 기제를 고려한다면 기온이 그 이상으로 상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의 CO2 배출 수준이 유지된다면 세계 평균 기온은 10년 안에 1.5℃ 상승할 것으로 예측되는데, 2100년까지 세계 평균 기온이 1.5℃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제한하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CO2 배출을 대략 절반 수준으로 줄여야 하고 2050년에는 CO2를 전혀 배출하지 않게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당장 CO2 배출을 매년 약 10퍼센트가량 감축해야 한다. ”
AP, AFP통신에 따르면 안토니오 구테흐스 총장은 제25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5)를 앞둔 기자회견에서 그는 “우리는 자연과의 전쟁을 반드시 그만둬야 한다”라고 말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우리는 지금 글로벌 기후위기에 직면했다”라며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점(환경 복원이 불가능한 수준)이 더는 지평선 너머에 있지 않으며 가시권에서 우리를 향해 세차게 다가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테흐스 총장의 발언은 세계에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고 있으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권고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언 안에 숨어있는 시각의 전제에는 심각한 오류가 숨어있다. 바로 여전히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은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인간은 자연을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없다. 절대적으로 대립된 관계가 아닌 자학행위로서 얻어진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불가분 관계 즉 유식에서의 유근신과 기세간의 형성과정을 보아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러한 통찰에 입각해서 해결 방법도 원불교적 관점에서 제시할 수 있다.
2. 공업(共業)의 참회
현대사회의 다단한 문제점들은 인간 한 개인의 업으로 인한 과업도 있지만, 집단적 무의식으로서의 체제와 구조로부터 와지는 업이 대다수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공업(共業)이라고 이름한다.
“공업이란 유정이 공동으로 짓는 업을 말하며 그 업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업의 총화보다 훨씬 커다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또 그 과보를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궁선은 공업의 개념을 정리하며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며 공업 측면에 대한 업설이 소홀했음을 지적했다.
“불교의 업사상을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으로 나누면 불공업 (共業, sadharana- karma) 과 공업(共業, sadharna – karma)으로 나눌 수 있다. 인도의 재래 업사상에서 자업자득의 업 개념이 강조되듯이 불교에서도 역시 개인 행위에 의한 개인의 과보가 주로 강조되었을 뿐, 행위의 결과를 사회구성원 전체가 공유하게 된다는 개념의 공업 사상은 그리 강조되지 않았다.”
공업 사상의 핵심은 곧 중생 모두의 생각과 행동이 서로 영향 관계에 있으며 업을 짓게 되고 그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를 서로 공유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초기불교의 부파불교 시대부터 기세간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으로 처음 등장 하였을 정도로 업사상 속에 이미 공업 사상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다만 그 용어가 분화되지 않았음을 명시한다. 또한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과 무아사상을 근본교의로 하는 불교의 업설에서, 상의상관성과 상호 의존성을 근간으로 하여 업보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공업 측면의 업설을 소홀히 취급하였음을 경계하고 있다.
한자경은 유식의 관점에서 불공업 종자와 공업 종자의 현행으로 구분을 하였다.
“마음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원리적으로 명확히 밝혀내고 있는 유식적 관점에서 보면 불공업 종자의 현행결과가 곧 나의 몸인 유근신(有根身)이며, 우리가 모여살며 나의 몸이 속하는 기세간(器世間)은 공업종자의 현행이다. 그 외에 우리 의식이 포착하는 관념들도 종자의 현행결과로 본다.”
또한, 이 유근신과 기세간, 그리고 제6의식이 만든 세계인 관념마저 모두 실유(實有)가 아닌 가유(假有)로서 설명한다.
“유근신과 기세간과 관념 모두 마음과 독립적으로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실유가 아닌,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서만 존재하는 가유(假有)이다. 때문에 유식무경(唯識無境)이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다.”
이는 참회문에서 밝히고 있는 죄와 업에 관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마음이 멸함을 따라 반드시 없어질 것이며, 업은 본래 무명(無明)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지나니”
“모든 것이 마음의 변현이라는 것, 유근신도 기세간도 마음 바깥의 객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무명을 벗는 길. 이다. 남궁선은 특히 연기설에서의 불교의 업설이 인간의 행위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는 불공업과 공업의 두 가지 의미를 공유하는 업 사상이어야 이론적인 완벽성을 갖추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전 지구적 문제가 곧 공업의 결과이며 우리 개인의 신앙과 수행의 측면으로서 작은 시야로 머물러 있는 참회의 의미를 대사회적인 시야로 확장 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김도공은 이러한 연기성에 기반하여 현대사회의 공업의 문제에 대한 참회를 제언했다.
“개인과 개인간, 개인과 조직간, 조직과 조직간, 국가와 국가 간 서로의 관련 속에서 수많은 죄업이 양산되고 있다. 이제는 죄업을 청정히 해가는 것도 개인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서로간의 관련 속에서 만들어진 죄업의 연기성을 인식한다면, 그 죄업을 지워가는 것도 서로의 관계 속에서 협력적으로 해가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는 조직과 단체 국가의 참회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의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상황에 있어서 그 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이 문제의 원인를 다수의 업으로서만 이루어 졌다는 관계성에 대한 강조만 할 뿐 실질적 해결에 대한 실천이 없는 것이다. “연기성은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를 기술하는 사실명제이며, 우리는 그 연기에 따른 개체생성의 반복을 연기의 유전문(流傳門)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자경은 이 연기에 있어 이 유전문만을 밝히는 것은 곧 현상적인 인과관계의 설명으로서의 인연화합의 산물일 뿐이며, 그 어떤 목적과 지향을 가질 수 없는 유교에서 말하는 기(氣)의 이합집산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때문에 불교의 연기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자 오늘날 공업의 문제의 해결을 향한 방향을 연기의 환멸문(還滅門)에 있음을 강조했다.
“불교가 연기로써 상호의존성을 논하는 것은 그러한 현상적 차별상에 입각한 상호의존관계의 모든 것이 허망분별이고 가상이며 거짓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연기의 산물인 현상세계를 허망분별의 가(假)로 규정하면서, 그보다 더 심층의 진실, 본래 평등한 생명, 불생불멸의 진여심, 유정의 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불교 연기의 핵심은 상호의존관계를 따라 윤회하는 유전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의존 관계를 벗어나 심층의 핵심에 도달하는 환멸문에 있다. 불교의 연기는 만물의 현상적 상(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내제되어있는 평등한 본성, 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생태학적 위기의 논의에 있어 자신이 속한 환경과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는 체계이론이 도입되었으나 이 체계이론에는 환멸문이 존재하지 않음을 밝힌다. “체계이론은 우리가 엮어놓은 생태학적 위기의 그물망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으며 그 이유를 그것이 현상세계의 질서를 서술하고 설명하는 경험과학이기 때문”으로 보았다. 만물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는 유전문만의 설명으로는 그 연관성으로 인한 도덕적 책임의 결단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비유로 목욕탕에서는 방뇨하지 않지만, 대형수영장이나 바다에서는 쉽게 방뇨하는 것, 폐수를 자기 집 연못이 아니라 하천으로 방출하는 예를 들었다.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상황이 공업의 결과임을 알았다면, 그 관계성은 곧 한 몸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때문에 죄업의 공성을 드러내는 이참은 곧 나를 떠난 빈 공간이나 무한 지평으로의 발산이 아닌, 자타 간의 무분별로서의 생명사상과 만물을 하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만물일심(萬物一心)의 관점으로서 사실적인 참회와 노력의 실천이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종교의 지구화를 비판하며, ‘선교활동’ 이라는 이름에 가려 보편주의들이 항구적으로 충돌하는 상태로 귀결되는 타 종교에 대한 반대를 일삼는 모순적인 설정의 노동을 비판했다. 즉 신자와 이교도와 불신자의 대립 관계에 놓였을 때는 선교의 과정과는 달리 강요가 나타나고 그런 불안으로 인한 정치적 대립에서 폭력적인 양상을 수반할 수 있음”을 경계하였다. 또한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뉴욕과 도쿄의 주민들이 새로운 댐을 건축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기후변화의 사회적·정치적 결과를 일국적 행보를 통해 예방할 수 있다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표현했다.
전 지구적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상황과 같은 문제는 지구촌 그 어느 국가와 집단, 또는 특정 종교만의 협의와 이행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음을 자각해야한다. 즉 생명의 문제에는 종교와 사상과 국가의 울을 넘어선 연대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연하여져 있다는 유기적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3. 원불교 사은사상과 참회적 접근
전 지구적 문제 중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는 어느 국가나 대륙만이 그 결과의 영향 범위에 있지 않고 지구촌 전 인류와 모든 생명까지 포함된 범위를 가지게 된다. 천지·부모·동포·법률의 원불교 사은(四恩)의 교리는 곧 우주만유에 대한 존재 인식과 생명윤리를 밝히고 있다. 사은은 우주만유의 본원인 일원을 “인간을 중심으로 맺어진 은적관계를 네 가지로 범주 지은”것이기에 곧 일원즉사은(一圓卽四恩)이며, “일원상의 내력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력을 말하자면 곧 우주 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라는 일원상과 사은의 관계에 대한 법문은 천지만물과 허공법계로 그 지평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를 단순히 관념적으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라는 인식에만 그친다면 앞서 거론된 체계이론이 생태학적 위기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문제와 같이, 또는 연기론에서의 유전문만 밝히고 환멸문을 제시하지 못하여 그 악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와 같은 꼴이 되어버린다. 박상권은 자신의 생명에 관한 본질을 아는 것이 곧 원불교적인 생명인식론이나, 이러한 인식론은 원불교와 전통종교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며 원불교의 특징을 이러한 인식 이후의 실천론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사은을 관계적 의미해석에 편중하지 않고 보은의 실천 또한 함께 드러나야 하는 데에 있어 의의가 있다.
창조론을 말하는 기독교의 경우 개체 생명의 種이 창조되었느냐, 진화되었느냐의 논쟁은 기독교의 본질과 거리가 먼 문제이다. 창조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피조물이 인간이 창조주의 절대적인恩寵을 입었다는 사실의 인식시키는데 있다. 불교의 불교의 연기적 존재론도 관계성의 원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원불교의 특징은 인식 이후의 대응, 즉 실천론에 있다.
이는 참회에서도 죄업이 공한 자리에 대한 깨침인 이참만을 강조하여, 죄업의 굴레를 무한히 양산하고 있는 체제적 문제나 현실의 오류를 바로잡지 않고 이참의 지경에 도달하는 삼보전에 대한 뉘우침과 선업의 수행을 소홀히 생각하여 이참과 사참의 병진이 아닌 관념적 참회로서의 기도나 깨침만으로 생각함에 오늘날의 공업의 문제가 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즉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를 해결해가는 데 있어 사은의 생명관과 더불어 특히 천지은과 동포은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보은이 필수 불가결임을 밝힌다.
하늘의 공기와 땅의 바탕, 풍·운·우·로·상·설의 작용의 혜택을 알아 천지 팔도에 밝혀진 보은의 조목을 일일이 실행함으로써 지구촌 모든 생명의 존재 바탕이자, 생로병사의 요람이 되는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닌 지경을 실천해야 할 것이며, 사·농·공·상 의 인간 생활을 이루는 관계는 물론 초목 금수도 서로 상생의 관계로서 바라보는 동포은의 핵심인 자리이타의 실행은 곧 전 지구적 생명과 환경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앎과 실천이 되고 오늘날 공업의 업보로서의 위기상황에 원불교 참회가 바로 짚어야 할 중요한 생명윤리이자 이참과 사참의 병행 필요성과 방향을 동시에 제시하는 데 있어 중요한 관계가 있음을 짚는다.
원불교 개교의 동기는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함에 있다. 원불교의 제생의세 목적은 곧 개인의 종교적 깨달음 또는 궁극적인 해탈의 지경만이 아닌 전 인류와 만 생령들과의 관계성까지 바라보고 있음에 그 범위는 결코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가에만 머물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원불교 3대 종법사인 대산종사(김대거,1914-1998)는 교조인 소태산의 대각 일성에 담겨진 일원상의 진리에 줄 맞는 참회를 강조하며 오늘날의 지구촌 시대가 직시해야 할 참회의 필요성을 드러냈다. “진정한 참회는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여실히 믿고 깨달아서 남을 속이고 해(害)함이 곧 나를 속이고 해하는 것임을 알 때 행해질 수 있느니라.” 하였으니, 전 지구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시대적 사명감을 직시하여야 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공업에 대한 해결을 위해 앞장서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사은에 대한 보은 불공이 되는 동시에 제생의세의 목적성을 실현하는 길이 될 것이다.
Ⅳ. 맺는 말
본 연구에서는 원불교 참회문의 원리를 원불교 교법의 귀결점인 ‘일원상의 진리(一圓相-眞理)’와 ‘일원상법어(一圓相法語)’를 근거해 탐구하며『정산종사법설』에서 성품과 인과의 둘 아닌 관계를 통해 참회의 원리 근거를 성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원리에 기반한 참회의 방법으로서 이참과 사참의 상호연관성을 밝혀보며 참회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주요개념인 ’적적성성’과 ’천업을 돌파함‘을 중심으로 탐구해보았다. 또한, 그 중심에 ’영지‘의 개념을 통해 성품을 심성론적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닌 생멸 변화하는 존재론적 관점도 있음을 바라보았으며 이것이 참회의 근거가 되는 성품에 대한 원만한 이해임을 밝혀보았다.
’4차 산업혁명(The 4th Industrial Revolution)’이라는 문명의 발전 이면에서 대표적으로 기후위기와 생태학적 위기 등으로 불리는 전 지구적 문제들이 도래한 현실에 종교가 제시해주어야 할 윤리적인 기반과 실천에 대한 제의는 바로 지난날의 과업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선업을 짓는 ’참회’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기세간(器世間)이 공통으로 지은 공업(共業)이라는 이해와 더불어 불교의 연기법에서의 유전문(流轉門)과 더불어 환멸문(還滅門)의 부재를 발견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원불교 사은사상을‘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지은(知恩)의 인식과 더불어 늘 보은(報恩)의 실천이 따라야 원만한 교리해석이자 오늘날 공업의 문제에 대한 참회를 이룰 수 있는 교리적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밝힌다.
본 연구의 한계는 21세기가 직면한 전 지구적 문제의 하나를 실례로 잡아 직접적인 조사와 탐구를 이루지 못하였고 다소 원론적 차원에서 살펴본 것이 한계이다.
그러나 원불교 개교의 동기에 입각하여 기후위기를 비롯한 공업의 문제해결이 제생의세의 경륜을 실현하는 길임과 동시에 시대적 사명이며 그러한 위기의 극복이 단지 정치적, 경제적,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또한 오늘날 원불교의 참회에 대한 인식과 연구가 다소 소승적인 개인의 수행에 머물러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공업의 문제를 해석하고 다양한 사회 실천적 행동과 연대로 제생의세의 경륜을 실현하기를 촉구하는 것이 본 연구의 의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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