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견성관 연구–
이원일
Ⅰ. 서론
Ⅱ. 소태산 대종사의 견성관 1.견성의 정의 2.견성의 상태
Ⅲ. 견성과 수행의 관계 1.견성과 수행 2.견성·양성·솔성의 병행적 수행
Ⅳ.활용적 관점에서의 견성 1.견성 활용에 대한 법문 2.견성 활용의 궁극적 목적
Ⅴ.결론 |
Ⅰ. 서론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원년(1916년) 4월 28일 대각을 이루었다. 이 대각의 시발점은 어렸을 적의 한「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의심은 ‘깨끗한 하늘에서 우연히 바람이 일고 구름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의심을 시작으로 소태산 대종사는 본인이 접하고 생활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이는 ‘기필코 알아보겠다.’ 하는 구도의 발심으로 이어진다. 소태산 대종사의 구도는 간절한 염원으로 삼밭재에서 올린 산상기도, 자신의 의심된 바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스승들을 찾아 해맨 구사고행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소태산 대종사는 그 의심된 바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많은 의심들은 하나로 뭉치어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라는 큰 의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소태산 대종사는 대각에 이르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의 행보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각 이후 소태산 대종사는 모든 종교의 교법을 참고하고, 당시 시국을 살펴 시대에 부족한 정신도덕의 부활을 이야기하며「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를 정하였다. 이에 따라 정신도덕이 부활될 수 있는 실질적인 방향으로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의 진화상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이라는 최초법어를 설하게 된다. 더불어 『대종경』 실시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소태산 대종사는 스스로 솔선하는 모습을 통해 많은 사람을 감화로써 이끈다. 이러한 소태산 대종사의 면모에는 실천적인 모습이 있다. 이는 실천적으로 공부해 갔을 때 비로소 자신이 말한 일원상의 진리자리를 알아 깨치고 그 깨친 바를 행동에 옮김으로써 실질적인 성불을 이루어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태산은 분명 과거의 수행법과는 다른 실질적인 수행법으로서 수양·연구·취사의 일원화(一圓化)와 영육쌍전(靈肉雙全), 이사병행(理事並行) 등을 거론하였으며『대종경』 교의품 5장에서는 일원상의 수행은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고 그 진리를 체받아서」라는 말과 동시에 일원의 원리를 깨닫는 견성과 일원의 체성을 지키는 양성, 그리고 일원과 같이 원만한 실행을 하는 솔성으로 일원상의 수행을 표현하고 있다. 글의 마지막에는「이 공부를 지성으로 하면 학식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총명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다 성불함을 얻을 수 있다」 말하며 누구나 이대로만 한다면 성불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정리하면 일원상의 수행은 그저 실천하는 것이 아닌 일원의 원리를 깨달음과 동시에 안으로 양성하고 밖으로 실천하는 것을 같이 해야 하며 이같이 하였을 때 성불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현재 실질적인 수행과 양성하는 방법들을 밝혀놓은 많은 학술자료와 도서, 논문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에 정작 공부의 길이 되는 견성에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견성에 초점을 맞추고 소태산 대종사의 성자적 삶속에서 설해진 법문을 분석하여 견성이란 무엇인지 그 정의를 살펴보고 성불과 견성에 대하여 그 관계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견성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물론 견성에 관하여 나와 있는 학술자료 역시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가 설한 법문이 근거로 들이기에는 정리가 부족하다. 이에 학술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을 느끼고 본 논문을 통하여 소태산 대종사의 견성관을 알아보고자 한다.
Ⅱ. 소태산 대종사의 견성관
1.견성의 정의
견성은 한자를 그대로 뜻풀이 해보면 ‘성품을 보다’로 해석된다.「한국민족대백과」에는 마음 닦는 공부를 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는 체험의 경지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라 표현되는 성품이란 무엇인가.「원불교 대사전」에서 성품은 본성, 곧 태어나면서부터 본래적으로 지닌 성질을 말한다. 이에 관련하여 소태산 대종사 또한 성품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표현들로는 대종경 인도품 1장에서 우리의 본래 성품이라 표현하며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도라는 부분과 대종경 수행품 59장에서는 본래에 분별과 주착이 없는 우리의 성품이라는 표현을 통해 성품의 모습을 말한다. 또한 정산이 표현한 일원의 참된 성품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성품이라는 것은 쉽게 설명하여 소태산대종사가 밝힌『일원상』임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련하여『일원상』에 대한 설명은 뒤에 추가하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이『일원상』이 바로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성품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견성은 과연 무엇인가.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견성은 앞서 설명한 소태산 대종사가 밝힌 성품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종경』 성리품21장에서 한 제자가 견성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묻는 질문에 소태산 대종사는「우주 만물의 본래 이치를 알게 되고 목수가 잣대와 먹줄을 얻은 것 같이 되나니라」라고 이야기한다. 목수에게 잣대와 먹줄이라는 것은 어떤 관계인가. 잣대는 말 그대로 자 막대기라는 것이고 먹줄은 먹통에 딸려 목재에 검은 줄을 곧게 치는 데 쓰이는 실이나 노로 만든 줄이다. 이는 목수에게 있어서 목재를 재단할 때 정확한 표준이 되는 것들이다.
즉,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견성은 본래이치, 즉 본성을 보는 것, 다시금 알게 된다는 것은 견성이 깨달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있어 분명한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표준이 되는 방법으로 「일원상」을 이야기한다. 이 「일원상」은 소태산 대종사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표준이 되는 「일원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대종경』 제2 교의품 3장에서는 일원상을 부처님의 심체, 천지 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 유가에서 말하는 태극 혹은 무극, 선가에서 말하는 도, 불가에서 말하는 청정 법신불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 모두는 각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명칭이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일원상」 또한 진리의 명칭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진리라 표현되는 이「일원상」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 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위 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원상이라 명칭하는 진리는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그 진리가 없는 자리에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드러나는 모습까지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이「일원상」에 관한 설명은 각(覺)하면 알아지게 되는 것이라고 소태산 대종사는 말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각(覺). 즉 견성은 지극히 개인적인 깨달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문제이기에 스스로의 판단만으로는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 그렇기에 많은 선불교에서 선문답을 통해 견성에 대한 답을 찾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그 문답 가운데에는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소태산 대종사 또한 한 제자와의 문답에서 돈오돈수에 관한 생각을 말해주고 있다.
또 여쭙기를 「최상의 근기는 일시에 돈오 돈수(頓悟頓修)를 한다 하였사오니 일시에 오(悟)와 수(修)를 끝마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과거 불조 가운데 돈오 돈수를 하였다 하는 이가 더러 있으나, 실은 견성의 경로도 천만 층이요 수행도 여러 계단을 거쳐서 돈오 돈수를 이루는 것이니 비하건대 날이 샐 때에 어둠이 가는지 모르게 물러가고 밝음이 오는 줄 모르게 오는 것 같나니라.」
견성이라는 것은 일순간에 번쩍하고 깨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경로가 다양하고 수행도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견성에 관하여 그 경로가 다양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은 깨침의 정도라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나타나는 정도는 「날이 샐 때에 어둠이 가는지 모르게 물러가고 밝음이 오는 줄 모르게 오는 것」 같이 알게 모르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해가 계속해서 떠오르며 알게 모르게 날을 밝히는 것처럼 수도인이 정성으로 그 마음을 닦아 나가야 비로소 날이 밝아지는 것처럼 깨달음에 이루기 위해서는 꾸준해야함을 이야기한다. 이와 관련하여 소태산 대종사는 3명의 앉아있는 자의 이야기를 비유하였는데「무료 도일(無聊度日)한 사람은 아무 성과가 없을지라」라고 말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대로 기계 연구를 한 사람은 어떠한 발명이 나타날 것이고 좌선에 힘쓴 사람은 정신에 정력을 얻을 것이라 표현하며 무엇이나 그 하는 것을 쉬지 않은 결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즉, 꾸준하게 ‘실천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견성은「일원상」이라는 진리를 알게 됨이며 이 진리가 밝아지는 정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 돈오돈수로 한번에 깨칠 수도 있으나 마치 날이 샐 때에 어둠이 가는 것과 같이 깨칠 수도 있다. 또한 견성은 이 일원상이 표준이 되어야 하며 그 표준을 반조하여 꾸준하게 노력했을 때 비로소 견성을 통한 성불이 가능해 진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견성은 성불을 하기 위한 하나의 표준이 되는 공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견성의 상태
견성을 하게 되면 어떠한 상태가 되는 것인가. 대각을 이룬 소태산 대종사의 모습에 비추어 견성에 대한 상태를 알아보고자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견성한 상태에 관하여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목수가 잣대와 먹줄을 얻은 것 같이 된다고 표현한다. 표준이 된다는 것도 맞지만 상태로 보았을 때 이 표현은 표준이 생기었으니 이 표준을 가지고 살아감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일원상」이라는 표준이 세워지고 그 모습과 하나가 될수 있는 방향이 세워진 것이 견성이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났을 때의 상태를 일원상 법어를 통하여 밝혀주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원상(圓相)의 진리를 각(覺)하면 시방 삼계가 다 오가(吾家)의 소유인 줄을 알며, 또는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또는 제불·조사와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며, 또는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陰陽相勝)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또는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인 줄을 알리로다.(생략)
이 법어의 첫 구절은 ‘이 원상의 진리를 각하면’ 으로 시작된다. 즉, 소태산 대종사 자신이 밝힌 ‘일원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이는 이 다음에 나오는 문구가 ‘일원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이렇게 알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암시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원의 진리를 깨달은 상태 즉, 소태산 대종사가 말하는 견성의 상태라는 것은 뒤에 이어서 나오는 문구와 같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다음 문구는 ‘시방 삼계다 다 오가(吾家)의 소유인 줄을 알며’ 이다. 여기서 시방은 동·서·남·북·동남·서남·동북·서북의 팔방과 상·하를 합친 공간 전체를 뜻하며 삼계는 욕계·색계·무색계로 중생들이 윤회하는 세계를 뜻한다. 즉 시방삼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온 우주를 뜻하는 말이다. 이 온 우주가 바로 오가, 나의 집이라는 의미다. 조금 더 심도있게 해석하면 이미 성품자리에 합일하여 시방일가, 사생일신임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 말은 우주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둘이 아닌 것임을 알게 된 상태와 같다. 더불어 모든 부처와 모든 스승 그리고 범부며 중생까지도 이 성품자리는 같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종사는 만법귀일이라는 표현으로 견성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으며 정산종사도 견성오단계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이라 밝힌 바가 있다. 이는 다음에 나오는 ‘또는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와도 일맥상통한다.
다음 문구는 ‘또는 제불·조사와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며,’로 이어진다. 이 문구는 앞서 설명한 문구와 같이 만법귀일이기에 이름은 달라도 둘이 아닌 줄을 아는 것과 같다고도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그 성품의 위치가 평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분별로서 살아가기에 부처와 중생, 조사와 범부를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지 못한다. 하지만 견성을 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의 위치가 평등함을 알게 된다.
다음으로는 ‘또는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이다. 이는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생로병사가 늘 돌아오는 춘하추동의 이치와 같음을 말한다. 이는 『대종경』 제9 천도품 16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아는 사람에 있어서는 인생의 생·로·병·사가 마치 춘·하·추·동 사시 바뀌는 것과 같고 저 생(生)과 이 생이 마치 거년과 금년 되는 것 같나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우리가 생각하고있는 생로병사가 특별한의미에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아닌 그저 우주의 큰 덩치안에서 이루어 지는 작용인 춘하추동의 사시가 순환되는 것과 같은 이치임을 표현한 것이다.
다음 문구는 ‘인과 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陰陽相勝)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이다. 이 문구만 따로 두고 해석하면 앞서 설명해온 내용과는 완전 다른 관점으로 느껴진다. 그 이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보응의 수평적 사고방식과 유교에서 말하는 음양상승의 순환적인 사고방식이 하나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교의품 1장에서 「과거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가 각각 그 분야만의 교화를 주로하여 왔지마는, 앞으로는 그 일부만 가지고는 널리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 밝히며 이 두가지의 관점을 융합시켰다. 그 관점은 우주만유의 형상없는 인과보응의 이치가 나타나는 모습이 형상있는 음양상승의 순환적인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종경』 인과품 2장에서는 우주에 음양 상승(陰陽相勝)하는 도를 따라 인간에 선악 인과의 보응이 있게 되나니, 겨울은 음(陰)이 성할 때이나 음 가운데 양(陽)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양이 차차 힘을 얻어 마침내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며, 여름은 양이 성할 때이나 양 가운데 음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음이 차차 힘을 얻어 마침내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일도 또한 강과 약이 서로 관계하고 선과 악의 짓는 바에 따라 진급 강급과 상생 상극의 과보가 있게 되나니, 이것이 곧 인과 보응의 원리니라. 라고 밝히며 이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원리를 조금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또는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인 줄을 알리로다.’라는 문구를 통하여 이를 마무리하고 있다. 여기서 원만구족 지공무사는 일원상진리의 내용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 중의 하나로서 ‘법신불일원’은 조금도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추어 있되, 그것은 지극히 공평하여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침이 없고 털끝만큼의 사사(私邪)가 없다는 뜻이다. 이 또한 결국 하나로 돌아가야 함을 설명하고 있다.
이상은 일원상 법어의 앞부분은 일원상을 깨닫게 되면 얻어지는 결실에 대한 설명이다. 일원상 법어에 나온 내용만을 생각해보면 견성의 상태에 관하여는 충분한 설명이 된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는 뒤에 이러한 말을 붙힌다.
이 원상은 눈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귀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코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입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몸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마음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를 간추려 말하면 육근(안,이,비,설,신,의)을 사용할 때 그 작용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나타남을 말한다. 이는 견성을 하고난 후에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이 원상을 사용하라는 수행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Ⅲ. 견성과 수행의 관계
1.견성과 수행
소태산 대종사는『대종경』 제7 성리품 20장에서는 수행하는데 견성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묻는 제자의 질문에 국문의 본문을 아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는 견성이 수도자가 수행을 함에 있어 자신이 닦아 나아가는 바가 잘된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 반조해 볼 수 있는 근본이 된다는 말이다. 즉. 견성은 수행에 목적이 된다는 말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조금 더 자세하게 밝힌 내용이 『대종경』 제7 성리품 7장에서 나온다.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견성을 하려는 것은 성품의 본래 자리를 알아, 그와 같이 결함 없게 심신을 사용하여 원만한 부처를 이루는 데에 그 목적이 있나니, 만일 견성만 하고 성불하는 데에 공을 들이지 아니 한다면 이는 보기 좋은 납도끼와 같아서 별 소용이 없나니라.
이는 견성을 하는 이유가 성품을 알기 위함이 끝이 아니다. 성품을 분명한 목적으로 삼아서 성품의 본래자리와 같은 모습으로 심신을 사용하고 이를 토대로 원만한 부처가 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앞서 소태산 대종사는 견성을 이야기하며 후미에 자신이 말한「일원상」을 얻기 위해서는 꼭 노력하고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가 이토록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또한 뒤에 설명한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듯이 성불하는데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견성을 하였다 하여도 납으로 만들어진 도끼처럼 그 어떤 나무도 벨 수 없듯이 실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일원상」을 실천에 옮기는 방법으로「일원상의 수행」을 이야기한다. 일원상의 수행은 『정전』 제2교의편 제1장 일원상 제3절 일원상의 수행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 곧 일원상의 수행이니라.」라고 설명한다.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고 양성하고 사용하자’는 견성이 수행과 따로 동떨어져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대종경』 교의품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이를 밝히고 있다.
또 여쭙기를 「일원상의 수행은 어떻게 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고 그 진리를 체받아서 자기의 인격을 양성하나니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아 천지 만물의 시종 본말과 인간의 생·로·병·사와 인과 보응의 이치를 걸림 없이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마음 가운데에 아무 사심(私心)이 없고 애욕과 탐착에 기울고 굽히는 바가 없이 항상 두렷한 성품 자리를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모든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쓸 때 희·로·애·락과 원·근·친·소에 끌리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오직 바르고 공변되게 처리하자는 것이니, 일원의 원리를 깨닫는 것은 견성(見性)이요, 일원의 체성을 지키는 것은 양성(養性)이요, 일원과 같이 원만한 실행을 하는 것은 솔성(率性)인 바, 우리 공부의 요도인 정신 수양·사리 연구·작업 취사도 이것이요, 옛날 부처님의 말씀하신 계·정·혜(戒定慧) 삼학도 이것으로서, 수양은 정이며 양성이요, 연구는 혜며 견성이요, 취사는 계며 솔성이라, 이 공부를 지성으로 하면 학식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총명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성불함을 얻으리라.」
위 인용문에서는 앞서 일원상의 수행에서 나타난 일원상의 진리를 체받고 깨달아 양성하고 사용하는 것을 각각 견성, 양성, 솔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견성과 수행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3가지 항목이 중요하기에 <표 1>로 정리하였다.
<표 1> 원불교의 견성과 수행의 관계
견성(見性) | 양성(養性) | 솔성(率性) |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아 천지 만물의 시종 본말과 인간의 생·로·병·사와 인과 보응의 이치를 걸림 없이 아는 것. | 일원과 같이 마음 가운데에 아무 사심(私心)이 없고 애욕과 탐착에 기울고 굽히는 바가 없이 항상 두렷한 성품 자리를 기르는 것. | 일원과 같이 모든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쓸 때 희·로·애·락과 원·근·친·소에 끌리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오직 바르고 공변되게 처리하자는 것 |
일원의 원리를 깨닫는 것 | 일원의 체성을 지키는 것 | 일원과 같이 원만한 실행을 하는 것 |
혜(慧) | 정(定) | 계(戒) |
사리연구 | 정신수양 | 작업취사 |
위 <표 1>를 살펴보면 소태산 대종사가 말하는 견성과 양성과 솔성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견성은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아서 양성과 솔성을 함에 있어 표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양성은 그 깨달은 바를 토대로 두렷한 마음을 길러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솔성은 그 깨달은 바를 토대로 그와 같이 모든 일은 바르고 공변되게 처리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견성과 양성과 솔성의 관계를 살펴보면 일원의 원리를 알고 일원과 같은 마음을 기르고 일원과 같이 실행하는 것이라는 문구로 풀어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보완이 되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수행이라는 큰 틀로 보았을 때 견성과 양성과 솔성이 각각 따로 따로 움직이지 않음을 뜻한다. 같이 운용되는 관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견성과 양성과 솔성은 하나의 수행이며 서로 바탕이 되는 관계이다.
2.견성·양성·솔성의 병행적 수행
앞서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법문을 통해 일원의 진리를 견성과 양성과 솔성의 수행의 방법을 알아보았다. 일원의 진리를 알아서 그 진리를 토대로 양성하고 솔성으로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며 이 세가지 측면이 서로 바탕이 되는 것이 보완이 되어준다. 그렇다면 왜 세가지가 서로서로 바탕이 되는 것인가. 이는 견성과 양성과 솔성 모두가 일원의 진리를 닦아 나아가는 것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대종경』 교의품 7장을 보면 이를 자세히 알 수 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원의 진리를 요약하여 말하자면 곧 공(空)과 원(圓)과 정(正)이니, 양성에 있어서는 유무 초월한 자리를 관하는 것이 공이요, 마음의 거래 없는 것이 원이요,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정이며, 견성에 있어서는 일원의 진리가 철저하여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없는 자리를 아는 것이 공이요, 지량(知量)이 광대하여 막힘이 없는 것이 원이요, 아는 것이 적실하여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정이며, 솔성에 있어서는 모든 일에 무념행을 하는 것이 공이요, 모든 일에 무착행을 하는 것이 원이요, 모든 일에 중도행을 하는 것이 정이니라.」
위 글에서는 일원의 진리를 공·원·정으로 표현하며 이에 따라 견성과 양성과 솔성을 할 때 공과 원과 정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하나인 일원의 진리를 수행함에 있어 견성과 양성, 그리고 솔성의 측면에서 공부해 나아가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를 말해주며 수행하는데 있어 견성, 양성, 솔성의 표준이 공원정이 되는 것임을 말한다. 견성만이 아닌 양성과 솔성도 중요함을 말한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표 2>로 위의 법문을 정리해 보았다.
<표 2> 공·원·정
양성 | 견성 | 솔성 | |
공(空) | 유무초월한 자리를 관하는 것 | 일원의 진리가 철저하여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없는 자리를 아는 것 | 모든일에 무념행을 하는 것 |
원(圓) | 마음의 거래가 없는 것 | 지량이 광대하여 막힘이 없는 것 | 모든 일에 무착행을 하는 것 |
정(定) |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는 것 | 아는 것이 적실하여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 | 모든 일에 중도행을 하는 것 |
위 <표 2>를 토대로 견성과 양성 그리고 솔성이 하나의 모습임을 설명하기 위해 공의 측면에서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먼저 양성은 유무초월한 자리를 관하는 것, 견성은 일원의 진리가 철저하여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없는 자리를 관하는 것, 솔성은 모든 일에 무념행을 하는 것이다. 이를 하나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유무초월한 자리를 관하지 않는다면 일원의 진리가 철저하여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없는 자리를 관할 수 없고 이 자리를 모른다면 그일 그일에 무념행을 하기 어렵다. 또한 공의 자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행동이 되어야 하는데 무념행을 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공의 자리를 드러낼 수 없으며 이 또한 알았다 표현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의 도움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서로가 하나의 문제로서 같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일원의 진리에 다가가기가 어려움을 말한다. 그렇기에 견성을 설명하여도 양성과 솔성의 측면이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고 양성을 설명하여도 견성과 솔성의 측면이 없이는 설명하기 어려우며 솔성을 설명하여도 양성과 견성의 측면이 없이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즉, 견성과 양성과 솔성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같이 나아간다는 측면에서 병행적인 관계이다.
Ⅳ.활용적 관점에서의 견성
지금까지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견성이란 무엇인지 그 견성을 한 상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와 더불어 견성과 수행의 관계는 어떠한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수행을 함에 있어 견성이 실생활과는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인 법문을 통하여 실생활 속에서 견성이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활용되어야하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 견성 활용에 대한 법문
1) 현묘한 진리를 실생활에 활용하라.
소태산 대종사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삶에 일원의 진리가 실생활에 활용되기를 원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현묘한 진리를 깨치려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실생활에 활용하고자 함이니 만일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다면 이는 쓸데 없는 일이라, 이제 법신불 일원상을 실생활에 부합시켜 말해 주리라. 첫째는 일원상을 대할 때마다 견성 성불하는 화두(話頭)를 삼을 것이요, 둘째는 일상 생활에 일원상과 같이 원만하게 수행하여 나아가는 표본을 삼을 것이며, 세째는 이 우주 만유 전체가 죄복을 직접 내려주는 사실적 권능이 있는 것을 알아서 진리적으로 믿어 나아가는 대상을 삼을 것이니, 이러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일원상을 대할 때마다 마치 부모의 사진 같이 숭배될 것이니라.」
소태산 대종사는 현묘한 진리를 깨치고자 하는 이유를 실생활에 활용하기 위함이라 표현하였다. 즉 견성함이 실생활에 접목되어서 실생활을 더 잘하고자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방향으로 첫째, 일원상을 견성 성불하는 화두를 삼을 것, 둘째 일원상과 같이 원만하게 수행하여 나아가는 표본을 삼을 것, 셋째 우주 만유 전체가 죄복을 직접 내려주는 사실적 권능이 있는 것을 알아 진리적으로 믿어 나아가는 대상을 삼을 것이라 밝힌다. 여기서의 견성은 현묘한 진리를 깨치는 것, 일원의 진리를 아는 것이다. 일원의 진리가 그대로 실생활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가능해 진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문항에 일원상을 견성 성불하는 화두를 삼으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2)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육근을 사용하라.
견성의 활용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일원상 법어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원상(圓相)의 진리를 각(覺)하면 시방 삼계가 다 오가(吾家)의 소유인 줄을 알며, 또는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또는 제불·조사와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며, 또는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陰陽相勝)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또는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인 줄을 알리로다.
이 원상은 눈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귀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코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입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몸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마음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일원상 법어는 이 원상을 각하면 알게 되는 것과 그 아는 것을 육근을 운용하여 활용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밝혀둔 법문이다. 여기서의 견성에 대한 모습은 견성을 하게 되면 이 원상 즉, 일원의 진리가 알아진다는 것과 더불어 견성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견성을 바탕으로 계속 공부해 나아갔을 때 비로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견성을 하여 얻어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행을 육근(안·이·비·설·신·의)을 통해 나타내어야 함을 후미에 붙이어서 견성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그 견성을 활용하여 육근으로 행동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임을 밝히며 견성이 활용되는 모습을 밝히고 있다.
3) 수행 정도에 따른 공부법
소태산 대종사는 활용의 모습만 밝힌 것이 아니라 수행 정도에 따라서 견성과 양성과 솔성을 어떠한 방법으로 공부해야 하는지 또한 밝혀 두었다. 그것이 바로 아래 인용문으로 넣어둔 법위등급이다.
- 보통급은 유무식·남녀·노소·선악·귀천을 막론하고 처음으로 불문에 귀의하여 보통급 십계를 받은 사람의 급이요,
- 특신급은 보통급 십계를 일일이 실행하고, 예비 특신급에 승급하여 특신급 십계를 받아 지키며, 우리의 교리와 법규를 대강 이해하며, 모든 사업이나 생각이나 신앙이나 정성이 다른 세상에 흐르지 않는 사람의 급이요,
- 법마상전급은 보통급 십계와 특신급 십계를 일일이 실행하고 예비 법마상전급에 승급하여 법마상전급 십계를 받아 지키며, 법과 마를 일일이 분석하고 우리의 경전 해석에 과히 착오가 없으며, 천만 경계 중에서 사심을 제거하는 데 재미를 붙이고 무관사(無關事)에 동하지 않으며, 법마상전의 뜻을 알아 법마상전을 하되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에 대기사(大忌事)는 아니하고, 세밀한 일이라도 반수 이상 법의 승(勝)을 얻는 사람의 급이요,
- 법강항마위는 법마상전급 승급 조항을 일일이 실행하고 예비 법강항마위에 승급하여, 육근을 응용하여 법마상전을 하되 법이 백전 백승하며, 우리 경전의 뜻을 일일이 해석하고 대소 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으며, 생·로·병·사에 해탈을 얻은 사람의 위요,
- 출가위는 법강항마위 승급 조항을 일일이 실행하고 예비 출가위에 승급하여, 대소 유무의 이치를 따라 인간의 시비 이해를 건설하며, 현재 모든 종교의 교리를 정통하며, 원근 친소와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서 일체 생령을 위하여 천신 만고와 함지 사지를 당하여도 여한이 없는 사람의 위요,
- 대각여래위는 출가위 승급 조항을 일일이 실행하고 예비 대각여래위에 승급하여, 대자 대비로 일체 생령을 제도하되 만능(萬能)이 겸비하며, 천만 방편으로 수기 응변(隨機應變)하여 교화하되 대의에 어긋남이 없고 교화 받는 사람으로서 그 방편을 알지 못하게 하며,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 사람의 위니라.
법위등급에서는 법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자신이 진리에 얼마나 부합되어있는가를 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그 법을 실지로 활용하면서 법이 백전백승되어지며 마지막에는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 사람에 까지 이르도록 가르치고 있다. 법위등급을 단계로서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대각여래위에 오르기까지의 순서를 보면 다른 법문들과 마찬가지로 견성을 통하여 알아진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본래정신을 양성하고 활용함을 알 수 있다.
이 법문들 외에도 원불교 교도라면 외우는 일상수행의 요법이나 일원상서원문을 비롯하여 소태산 대종사가 설한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대종경의 많은 법문들 속에 견성은 녹아있다. 그만큼 견성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견성이 활용되기 위해서는 역시 아는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그 진리를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에 정산종사도 참다운 자성 반조의 공부는 견성을 하여야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역시 견성을 해야 참다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즉, 견성은 견성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활용적으로 사용되어 삶에 녹아 들어야 그 의미가 살아난다. 다시 말해 일원의 진리를 실생활에 활용하자는 것이다.
- 견성 활용의 궁극적 목적
그렇다면 견성 활용의 궁극적 목적은 성불이다.『대종경』교의품 5장에서도 일원상을 수행공부를 지성으로 하면 학식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총명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다 성불함을 얻으리라. 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인 대산종사 또한 이렇게 말한다.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법신불 일원상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성불 제중의 큰 서원을 세워야 할 것인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견성을 해야 하나니 견성은 청정법신불을 보는 것으로 우주 만유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임을 아는 것이요, 성불은 원만보신불이 되는 것으로 모든 행동이 다 선(禪)이 되고 법이 되어 자신 제도를 하는 것이며 (생략)
견성은 양성과 솔성 이 두 가지와 함께 더불어 성불의 한 방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불을 위해서는 견성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견성만큼 양성과 솔성 또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렇기에 소태산 대종사는 수양·연구·취사의 일원화(一圓化) 를 강조한 것이다.
수양·연구·취사의 일원화(一圓化)라는 것은 결국 수양과 연구 그리고 취사가 하나로 되어 진다는 말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처럼 공부의 병행을 이야기한다. 병행이 되어졌을 때 견성과 양성 그리고 솔성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성불의 입장에서 치우치지 않는 중도에 가깝다. 정리하면 견성은 성불을 하기 위함이며 이 성불은 견성뿐만이 아니라 양성과 솔성이 일원화(一圓化)로 같이 병행되어야 한다.
Ⅴ.결론
논자는 지금까지 소태산 대종사라는 인물을 통하여 그가 이야기한 견성이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견성은 일원상 법어에서 설명 되었듯이 원상을 각하여 알아지는 것이며 그것을 육근을 통하여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행을 닦아 나아가서 성불을 이루는 것 까지가 견성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의미가 살아남을 살펴보았다. 또한 이 견성과 수행의 관계를 통하여 각각의 항목으로 되어있는 견성과 양성과 솔성이 각각 그 드러나는 바는 다르지만 일원의 진리를 얻기 위한 방향성이 같으며 관계를 통한 활용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임을 알아보았다.
더불어 본 논문에서는 소태산 대종사의 견성관을 세움과 동시에 그가 강조한 견성과 양성과 솔성의 일원화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보다 활용적인 측면에서의 견성의 의미를 알아보았다. 이를 통하여 견성이 그저 관념이 아닌 양성과 솔성처럼 공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실생활에 접목되었을 때 보다 폭넓은 수행의 길이 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앞서 서론에서도 이야기 했듯 견성에 관하여 나와 있는 학술자료는 부족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본 논문을 통하여 한 성자가 이야기한 견성에 관한 법문과 내용을 정리하였다. 본 논문과 같이 견성에 관한 논문을 작성함에 있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참 고 문 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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