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학과

Wonkwang University

원불교 저축조합 정신의 지역경제적 활용 – 손인관

교학대학 원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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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저축조합 정신의 지역경제적 활용 – 손인관

원불교 저축조합 정신의 지역경제적 활용

 

 

손인관(孫仁貫)

 

Ⅰ. 서론

 

 

Ⅱ. 저축조합 운동과 방언공사

 

1. 협동조합을 통한 경제적 토대 마련

 

2. 저축조합 운동과 방언공사의 의미

 

 

Ⅲ. 諸 종교의 협동조합

 

원주지역의 신협운동

 

홍성의 풀무학교

 

3. 원불교의 신협

 

 

Ⅳ. 저축조합 운동 정신의 지역 경제적 활용

 

저축조합 운동 정신과 원불교 봉공회

 

원불교 봉공회 활동의 지역경제 활성기여 방안

 

 

Ⅴ. 결론

 

 

 

 

 

 

 

 

 

 

 

. 서론

 

 

자본주의가 주된 사회이념으로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각 종교는 자신들의 교리와 사상을 더욱 힘주어 강조하고 있지만, 돈과 물질적 가치의 성장만을 추구하는 현실을 극복하기에는 그 한계점이 명확하다. 양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해온 현재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차 종교에 의지하기보다는 더욱더 다양한 이상과 가치체계가 분화됨과 동시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삶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종교는 점차 의미부여, 가치 창출 및 사회 통합 같은 전통적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과거의 불교는 출세간 생활을 강조하며 세간 생활의 의미를 부정함으로써 재산축적이나 과학 문명의 발달이 무엇을 시사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평가절하해왔다. 따라서 세간 생활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소태산 대종사는 일제 치하에서 아직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여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경제발전에 긍정적 세계관을 지닌 종교 경제 윤리의 방향을 제시하며 인간 삶의 장소인 세간 생활 속에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고 조화하는 생활을 강조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세간 생활을 여의지 않는 종교, 세간 생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며, 직업까지라도 불고해서는 안 되는 종교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불교 개교의 이념으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를 주장한다. 즉, 인간 생활에서 물질과 정신, 영과 육, 일과 공부를 둘로 보지 않은 주체적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고 있는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세간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맞는 대응의 준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강조한 것은 현실의 복락이 신통 묘술에 있지 않고 현실 속에서 땀 흘리고 노력하며 합리적이고 사실적인 실천을 해야 만이 가능한 결과라는 방향전환이다. 그가 깨달음을 통해 통찰한 시대 인식에는 물질문명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면모가 선명히 드러나고 그에 필요한 사회개혁안이 종교 구원의 핵심메시지로 정확히 잡혀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실천의 시작이 바로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을 필두로 한 순수한 민간 주도의 조합운동으로 소태산 대종사가 8인의 제자들과 창설한 저축조합 운동이며 이러한 저축조합 운동은 원불교 창립의 정신적ㆍ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저축조합 운동은 초기교단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었지만 저축조합 운동의 성공과 그에 이어서 진행된 소태산 대종사의 또 하나의 개척 정신이 바탕된 방언공사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잘 사는 내일의 사회를 제시하여 낙후된 영촌지역에 밝은 내일을 제시해 준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저축조합 운동과 방언공사에서 발휘했던 우리 교법의 뛰어난 역량이 현대 사회에도 적용이 되고 있는가. 소태산 대종사가 가르친 교법의 정신이 잘 계승되고 있는가. 새 시대 새 종교로서 역할과 사명을 다 하고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당당하게 ‘그렇다!’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원불교가 새 시대 새 종교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려면 어떤 부분을 살펴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보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해보고, 새 시대 새 종교로서 원불교가 지역사회에 밝은 내일을 제시해주는 선구자적 역할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 저축조합 운동과 방언공사

 

 

  1. 협동조합을 통한 경제적 토대 마련

 

길룡리는 원불교의 제1성지인 영산성지 일대로 전남 영광군 백수읍에 소속된 마을이다. 옛 민적에는 길흥리라고 표현되어있으며 원불교를 창립한 소태산대종사가 탄생하고 성장했으며, 구도생활과 대각을 이룬 마을이다.

길룡리는 영광군 백수읍에 있는 리이며, 수리봉에서 이어지는 산지들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길룡리는 앞쪽으로 법성포에서 해수로 4Km의 내해에 있는 농어촌이나 현재는 언답을 막아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며 어업에는 종사하지 않는다.

소태산 대종사가 당대의 길룡리는 해수로를 제외한 사방이 구수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여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산간지대 궁촌벽지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1891년 5월 5일(음력 3월 27일)에 산간지대 궁촌벽지 중에서도 개펄가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이곳에서 큰 깨침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는 회상을 펴고 장차 조선을 세계의 대정신 문명국으로 만들리라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에 길룡리는 서해 바다를 접하고 있으되 망망한 수평선이라곤 보이지 않고, 겨우 개울 폭 밖에 되지 않는 한줄기 바닷물이 법성포 앞 바다에서 굽이굽이 산속의 골짜기를 끼고 하루에 두 차례 드나들었기 때문에, 변변한 논두렁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평지라곤 모두 개펄이 되어 수많은 세월 동안 쓸모없는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새 회상 창립과 더불어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리라는 서원을 가지고 있었던 소태산 대종사는 대각 후 제자들과 교단 창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했으며 그 노력의 시작은 금주 금연, 보은미 저축, 공동 출역을 근본정신으로 조직된 저축조합을 결성하여 구체적으로 금주 금연, 허례 폐지, 미신 타파, 절약 절식, 폐물이용 등으로 교단의 정초는 물론 가난한 마을에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저축조합이란 명칭이 처음 보이는 것은 1937(원기22)년 <회보44호>의 시창 4년항의 <불법에 대한 선언>장에 “대종사께서 이에 사업기관인 저축조합의 이름을 고쳐 불법연구회기성조합이라 명칭하시고 그 외 모든 기록에도 일제히 불법의 명호를 쓰게 하시니 때는 (원기4년)시월열여세날이었다”라고 한 것이 유일한 자료이다.

기성조합이란, 주로 어떤 사회적인 사업을 이루고자 그 준비사업을 하려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조직한 모임체로, 어떠한 일을 꼭 이루기 위해 때를 정하고 약속된 구성원들이 출자하여 공동사업을 경영하는 단체를 말한다. 원기 9년 불법연구회 설립 이전의 모든 사업체는 기성조합의 범위에 속한다. “대종사 회상 창립의 준비로 저축조합을 실시하시고”라 서술한 ‘대종경 서품 7장’이나 “회상기성의 한 기관으로 저축조합을 실시하여 앞일을 준비”한 것이라 ‘교사’에 서술한 것이, 모두 불법연구회를 설립하기 위한 기성조합의 전초기관으로서의 저축조합임을 알 수 있다.

저축조합운동을 통해 저축 금액이 2백여원에 이르렀고 소태산 자신도 가산을 정리한 400원, 그리고 인근 부호에게 400원을 대부받아 총 1,000원의 자금을 마련했으며, 모인 돈으로 목탄을 구입했는데, 마침 목탄 시세가 올라 8,000~9,000원의 자금을 확보했다. 자금이 어느 정도 확보되자 방언공사를 결심하고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어떠한 사업이나 가히 경영할 만한 약간의 기본금을 얻었으니 이것으로 무엇이라도 착수하여야 할 것인바 나의 심중에 일찍이 한 계획이 있으니 제군은 이 말을 잘 생각해 보라.” (길룡리 전면에 해수가 냉왕하는 간석지를 바리키며) “이것은 중인의 버린 바라, 우리가 방언하여 작답할진대 불과 기년에 완전한 토지가 될 뿐 아니라 폐물이요으로 인하여 비록 적으나마 또한 국가 사회의 생산 중 한 도움이 될 것이니 우리는 이러한 개척 사업에 노력하여 처음부터 공익의 길을 나아감이 어떠하냐?”

 

그 후 원래 신념이 독실한 중에 겸하여 몇 번의 경험이 있는 조합원들이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에 다른 사량계교를 내지 아니하고 이구동성으로 오직 유유복종하였으며 곧 방언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소태산은 방언공사를 시작하여 감역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 9인은 본래 일을 아니하던 사람들이로되 대 회상 창립 시기에 나왔으므로 남다른 고생이 많으나 그 대신 재미도 또한 적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소태산은 일부 제자들에게는 새끼를 꼬게 했고, 다른 제자들에겐 말뚝으로 사용할 나무를 베어오게 하는 등 간척사업의 방축선을 정하고 방축재료는 갯벌 흙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8인 조합원만 일을 하다가 근처 개흙땅의 소모가 넒어짐에 따라 품을 얻어 일을 벌여 나갔다. 인부를 많이 얻을 때는 50여명이나 되었고 품삯이 많이 나가게 되니 공사중 자금난으로 부득이 조합원의 출자가 요하게 되기도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 조합에 돈을 대부해 준 적이 있는 이웃 마을사는 부호 한 사람이, 저축조합이 간척사업을 하여 막대한 농지를 얻게 됨을 보고 자기의 권세와 금력을 믿고 욕심을 내여 간석지 대부 원서를 관계 당국에 제출하는가 하면 요소 요처에 맹렬히 청원 운동을 전개하여 곧 그에게 허가권이 나올 조짐까지 보였다. 아직 저축조합에도 개척 허가권이 나오지 않은 때라 조합원 중에서도 낙심하여 그 부호를 원망하는 마음이 대단하였는데, 그때 소태산 대종사는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함으로써 진정한 저축조합 운동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수 있다.

 

“공사 중에 이러한 분쟁이 생긴 것은 하늘이 우리의 정성을 시험하심인 듯하니 그대들은 조금도 이에 끌리지 말고 또는 저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지도 말라. 사필귀정이 이치의 당연함이어니와 혹 우리의 노력한 바가 저 사람의 소유로 된다 할지라도 우리에 있어서는 양심에 부끄러울 바가 없으며, 또는 우리의 본의가 항상 공중을 위하여 활동하기로 한 바인데 비록 처음 계획과 같이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나 그 사람도 또한 중인 가운데 한 사람은 되는 것이며, 이 빈궁한 해변 주민들에게 상당한 논이 생기게 되었으니 또한 대중에게 이익을 주는 일도 되지 않는가. 이 때에 있어서 그대들은 자타의 관념을 초월하고 오직 공중을 위하는 본의로만 부지런히 힘쓴다면 일은 자연 바른 대로 해결되리라.”

 

이를 통해 저축조합과 방언공사는 교단의 경제적 자립을 세우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었으나 어디까지나 그 본의는 항상 공중을 위하여 활동하기로 한 바였으며,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모든 사업을 진행하되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자타의 관념을 초월하여 오직 공중의 이익을 본위로 생각하는 무아봉공의 정신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길룡리 간석지 대부 허가는 1919년 9월 16일 김광선 외 8인의 명의로 <전라남도국유미간지허가장부>에 제 161호로 등록되었다.

이처럼 힘겨운 방언사업을 시작한 지 1년만인 1919년(원기4) 3월에 준공이라는 교단사적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소태산은 저축조합을 설립하고 조합원들로 하여금 사업육성의 기본 요건으로 간척사업을 성공리에 준공하였고, 또 단 조직을 하여 세계 인류를 위하는 일이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정신에 입각한 기도를 하여 정신적 결속을 다지었다.

그 결과로 마을 앞의 간척지를 개간하여 2만 6천여평의 농토를 얻게 되었으니, 이는 초기교단의 기초가 되는 귀중한 토지가 되었으며 소태산과 제자들이 합심 노력한 결정체였다. 간척을 통해 얻은 농토는 ‘정관평’이라 했다.

 

  1. 저축조합 운동과 방언공사의 의미

 

길룡리 주민들은 외부의 권장이나 협조를 받은 바 없이 순수한 조합원들의 근검저축과 합력으로 완공된 ‘정관평’을 ‘구호농장’이라고 불렀다. 정관평이 생김으로서 변변찮은 논두렁 하나 구경할 수 없었던 길룡리 주민들도 드디어 논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근방에 사는 농민들은 소태산 조합장을 ‘구호농장 농장장’으로 존경하였으며 농성으로 우러러 받들었다.

피땀의 정성 어린 새 농장 ‘구호농장’은 오직 조합장의 탁월한 영도력과 8인 제자의 일심 합력으로써 영육쌍전의 실지 표본을 보였고 새 회상 창립의 경제적 기초를 세운 일대 작업으로서, 쇠퇴해가는 지역사회 속에서 종교 혹은 소수의 단체가 하나의 구심점이 되어 그 지역사회 전체와 더불어 경제적 성장과 자립, 그리고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어떤 형식으로, 어떤 과정으로 적립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성공적인 모델중 하나가 된 것이다.

한편 방언 공사의 의미는 1923(원기8)년 가을 소태산과 그의 제자 이춘풍이 나눈 대화에서 비로소 언급이 된다.

 

하루는 이춘풍이 와서 뵈오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도덕을 배우려 함이어늘, 나는 무슨 뜻으로 도덕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이같이 먼저 언을 막으라 하였는지 그 뜻을 알겠는가?”···(중략)··· 수만년 불고하던 간석지를 개척하여 논을 만들기로 하매 이웃 사람들의 조소를 받으며 겸하여 노동의 경험도 없는 사람들로서 충분히 믿기 어려운 이 일을 할 때에 그것으로 참된 신심이 있고 없음을 알게 될 것이요, 또는 이 한 일의 시와 종을 볼 때에 앞으로 모든 사업을 성취할 힘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또는 소비 절약과 근로 작업으로 자작 자급하는 방법을 보아서 복록이 어디로부터 오는 근본을 알게 될 것이요, 또는 그 괴로운 일을 할 때에 솔성하는 법이 골라져서 스스로 괴로움을 이길만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 모든 생각으로 이 일을 착수시켰노라.

 

비록 소규모의 개펄 막이에 불과하지만 만 1년간의 방언공사를 통해 소태산이 훗날 교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많다. 회상 창립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한 것은 물론이요, 조합원들 상호간에 근검절약 정신, 협동정신, 이사병행 정신, 영육쌍전 정신 등 생활 종교로 지향하는 계기가 이 방언공사를 통해 굳건하게 다져진 것이다. 또한 이 저축조합 운동과 방언공사는 본디 새 회상의 창립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소태산 대종사를 비롯한 생활이 곤궁한 사람들이 경제적 자립을 세우기 위하여 시작된 사업이었으나, 이웃마을 부호와의 허가권 분쟁이나 이웃 주민들에게 노동의 기회와 수입의 여건을 제공해주고 타성에 젖은 지역 주민들에게 삶의 희망과 가능성을 심어준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복록이 어느 곳으로부터 나오는지의 사실적인 면과 방언공사가 교단의 발전만을 위하는 일이 아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저축조합운동과 방언공사의 핵심 정신은 자리이타를 본위로 하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무아봉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종교의 협동조합

 

 

  1. 원주지역의 신협운동

 

1966년 11월 13일에 원동성당의 신자들 35명이 출자금 6만 4천 1백 90원을 모아 ‘원주신협’을 원동성당에 창립하고, 이사장에 장일순을 선출한 것에서 원주지역의 신협운동은 시작된다. 당시 원주신협이 조직될 수 있도록 원동력 역할을 한 사람이 지학순 주교와 지역사회운동가 장일순이었으며 이들이 전개한 1960 ~ 70년대 신협운동은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농촌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농가 경제는 낮은 농업 생산력, 높은 조세부담, 전후 인플레이션, 정부 경제정책의 미비 등으로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50년대 말 ~ 1960년대 초 한국 가톨릭 성직자들은 한국전쟁 이후 가난해진 농민들의 경제적 자립과 생활개선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빈곤한 농촌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신협을 한국에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학순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가난한 이를 찾아 나서는 교회, 본당 재정 자립을 위한 노력, 교우들의 신앙 의식계발, 교회 일치 운동의 전개, 학교의 설립, 지역 문화의 발전을 위한 회관 건립 등 세상의 모든 이에게 ‘빛이 되는 교회’를 이루고자 하였다. 특히 지학순 주교는 당시의 사회문제였던 농촌경제의 자립과 낙후된 지역의 개발이 가장 중요한 해결과제라고 보았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저소득 계층의 가난 극복을 위한 특수사목을 강조했으며 그 일환으로 신협운동을 전개하였다. 신협운동은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일회성 자선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직접 가난을 제거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이때 원주 출신의 사회운동가 장일순이 합류하였고 지학순 주교는 국가 민족의 장래와 이 사회를 위해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진실한 인간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교육사업을 착수하였다. 당시 지학순 주교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학순 주교는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계층끼리 상부상조하여 잘 살기 위한 방법으로 협동교육과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였고, 나아가서는 도내 지역사회로 확대하는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지역 농민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협동교육연구소를 설립하였다. 협동교육연구소는 도내 최초로 진광학원 학생들에게 ‘협동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1970년 5월 15일 교내 238명의 학생 및 교직원들이 도내 최초의 학교신협인 ‘진광신협’을 창립할 수 있었다. 전교생에게 1969년 11월부터 1975년 10월에 이르기까지 주 1시간씩 정규적으로 협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협동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증가하면서 학생들은 신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협동교육연구소는 학생교육과 동시에 지역사회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신협교육을 원주 가톨릭센터에서 진행하였다. 이는 지역사회 교도사업으로 협동 정신의 저변확대와 조합운동의 대동사회 실천으로 근면·검소·절약을 통한 저축심을 함양시키고, 민주적 사회인으로 육성하는 데 있다. 이에 도역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협동교육연구소에서는 원주 교구청에서 활동에 따른 재정지원을 받아 경영관리를 지도하기에 이른다. 협동교육연구소의 활동 이후 신협운동은 원주지역에서 더욱 활성화되었으며 협동교육연구소는 원주 가톨릭센터와 원주문화방송국을 이용하여 대중교육에도 힘썼다.

신협운동에 있어서 교육에 대한 중요성은 1973년 2월 19일 ‘서울신문’에 실린 장상순 간사와 진광중학교 김용연 교감(협동교육연구소 부소장과 강원지구평의회 간사장 역임)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장상순 간사) 우리조합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넉넉하게 살고 기쁘게 살 수 있는가를 학교에서부터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경제적 자유경쟁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의 하나인 빈부(貧富)의 격차를 같은 단위 조직 속으로부터 줄여나감으로써 평등과 우애와 사랑에 넘치는, 그야말로 경제적 민주주의를 「신협」이라는 하나의 인격(人格)단체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이루어보자는 것입니다. ……” 장 교사의 열띤 「신협」「이데올로기」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저소득 층(低所得層)사이에 만연된 불신(不信). 그 속에서 자란 고리(高利)정신. 월5푼・6푼의 고리채를 극복하고 저리(低利)사회로 도약할 수 있는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주자는 조직운동이 「신협」교육이라는 것이다. …… “(김용연 교감) 「신협」운동은 교육이 중요합니다. 하나의 단위조합이 만들어질 때까지는 먼저 최하 50명이상의 동질(同質)집단을 택해 그 구성원들을 교육해야합니다. 「신협」의 개념부터 상업부기와 같은 경제 지식을 가르쳐서 조합원들 자신이 자신의 의무와 권리를 바로 알아 조합이 과연 유리(有利)하다고 깨달았을 때 비로소 성공적인 단위조합이 가능 합니다.”

 

이후 1970년 5월 15일 진광학원은 교내의 모든 학생들과 임직원 238명의 출자로 총 자산 47,590원으로 교내에 진광신협을 창립하였다. 진광신협은 신용사업(저축·대출)과 공동 구매·소비사업에서 얻은 수익으로 학생들의 자율에 맡겨 운영되었다. 진광신협의 신용사업은 교내 재학생과 학부모들 뿐 만 아니라 교내 교직원과 그들의 자녀들이 대상이었으며, 이후 1970년도 진광신협의 한해 총자산은 약 100만원으로 짧은 기간동안 약 20배 이상 증가하였고, 이후에도 진광신협의 자산규모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또한 진광신협에서 주목할 것은 교내 학생·학부모·교직원 등에게 저리로 대출사업을 운영했다는 점이다. 당시 대부분의 진광학원 학원 학생들은 가난한 농촌 환경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에 진광신협은 저리의 대출이자로 가난한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학교 공납금 및 생활비를 대출해주었다.

협동교육연구소와 진광신협의 활동을 통해 협동 생활의 중요성을 알게 된 학생들은 학부모들을 설득하여 마을에 협동조합을 만들게 하였다. 이후 학부모들과 농촌의 청년들이 진광신협의 운영실태를 보면서 마을마다 협동조합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지학순 주교는 원주지역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과 생활개선을 위해 신협운동을 전개했으며, 진광학원 내에 협동교육연구소를 설립하여 원주지역 신협운동을 지원하였다. 협동교육연구소의 활동 이후 진광학원은 저축의 생활화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상부상조하는 ‘협동정신’을 고취시킴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참되게 사는 민주적인 인간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70년 5월 15일 교내 학생・교직원・학부모를 중심으로 진광신협이 창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진광학원의 학생들은 조합원으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율적으로 신협을 운영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조합원 활동을 통해 상부상조하는 공동체 의식과 민주주의 의식을 함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의식의 전환을 통해 가난이 농민들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당시 한국사회의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진광신협의 활동은 지학순 주교가 실현하고자 한 밑으로부터의 개혁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의식을 고취시킨 사회교육 운동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1960-70년대 원주지역의 신협운동에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톨릭 교회 즉, 종교의 현실참여와 생활 실천을 위한 활동이며 특수사목으로써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교육을 필두로 밑으로부터의 개혁이자 사회교육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지역 주민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교의 설립, 그리고 그 학교 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합원 활동으로 거듭나게 하는 교육은 학생들 스스로가 빈곤퇴치와 생활개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근본적인 농촌 빈곤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위의 두 활동을 통해 지역·종교·학교 등이 유대관계를 통하여 신협운동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례라는 점이다. 종교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이 협동조합 운동은 지역사회에 신협을 보급하고 지역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여 자력을 세우는 것에 일조했다는 점이다.

 

  1. 홍성의 풀무학교

 

홍동은 1958년 설립된 풀무학교를 중심으로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되어 있는 마을이다. 풀무학교는 전인교육을 바탕으로 위대한 평민을 기른다는 풀무의 교육목표 아래 농촌을 이끌어 나가는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고등학교 과정과 전문교육 과정으로 구성된 풀무학교의 졸업생들은 협동조합 등 공동체의 가치를 통해 아동교육, 초보 귀농귀촌인 교육등 홍동마을에 연쇄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뿌리내리고 있다. 홍성군은 전국적으로 인구의 감소로 지방도시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때, 많은 농촌 지방자치단체에서와 같이 꾸준히 귀농·귀촌인을 유치하려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중 홍성은 귀농·귀촌과 관련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홍성은 농림축산식품부의 2016년 도시민 농촌 유지 지원사업 성과평가에서 2년 연속 우수상을 받았고 이러한 노력에 대한 성과에 걸맞게 홍성군의 귀농·귀촌 인구는 2013년 131명에서 2016년 421명으로 3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 중 홍성에서 대표적인 귀농·귀촌 사례지역은 홍성군의 중남부에 위치해 말을 곳곳 젊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홍동마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홍동마을이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가장 기초적인 토대는 바로 ‘풀무교육’과 ‘풀무학교’이다. 풀무학교는 민족학교로 유명한 평안도 오산학교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오산학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산실로 자리매김하면서 ‘민족학교’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오산학교를 졸업해 ‘교육, 기독교, 농촌’에 의한 민족을 살리려던 이찬갑 선생과 신학대를 나온 뒤 홍동에서 전도를 하며 농민의 수호자 양성을 위한 설립을 염원하던 주옥로 선생이 뜻을 합쳐 1958년 홍동마을에 풀무학교를 조성하게 된 것이다.

<표1> 풀무학교의 교육목표
성서 위에 학원

기본층의 평민

머리, 가슴, 손의 조화

4. 작은 학교

5. 전원 생활관 생활

6. 머리도 꼬리도 없다

7. 밝은 학교 생활

8. 더불어 사는 지역과 학교

9. 국제 이해

10. 사학의 책임

기독교 가치
유기적 공동체
창조와 교류
노력과 책임

표<1>은 풀무학교 홈페이지에 게시된 풀무학교의 교육목표이다. 그 중 주된 교육 목표는 세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바로 ‘성서 위에 학원’과 ‘기본 층의 평민’, 그리고 마을과 학교의 관계를 나타내는 ‘더불어 사는 지역과 학교’라는 항목이다.

‘성서 위에 학원’은 기독교 정신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기본 층의 평민’은 풀무학교가 풀무학교 설립자들의 설립 이념 중 하나인 ‘전인교육’을 통해 올바른 인간을 키우는 가르침을 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목표인 ‘더불어 사는 지역과 학교’는 이찬갑 선생의 무교회주의자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보여주며 학교는 학생뿐만 아니라 지역의 중심이 되어 교육을 포함한 농촌 주민들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지역은 더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됨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풀무학교는 더불어 사는 지역과 학교라는 교육목표를 통해 학교와 마을이 모두 교육의 장이자 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을과 학교가 서로 공존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홍동마을은 1959년 풀무학교에서 만든 풀무협동조합으로 시작해 국내 협동조합의 메카로 불리고 있다. 홍동은 4,000여명도 채 살고 있지 않는 마을이지만 열 개 이상의 정식으로 등록된 협동조합과 수 십여개의 마을 소모임이 운영되고 있다.

홍동마을의 초창기 협동조합은 풀무학교에서 시작한 1969년 ‘풀무신용협동조합’과 1980년 ‘풀무소비자협동조합’이다. 이곳을 시작으로 현재는 원예조합, 생활기술협동조합, 건축협동조합, 반찬제조협동조합, 의료협동조합 등 다양한 협동조합이 있다.

이러한 협동조합의 특징은 홍동마을 주민들이 직접 조합원으로 나서서 투자를 할 때에 경제적 이익 창출의 목적이 아닌 실제 자신들이 농촌에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해결했다는 것이다. 그 실례가 바로 풀무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카페, 술집, 만화방 등 자신들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마을이 필요로 하는 시설을 자연스럽게 발생시키고 있는 점인데, ‘풀무학교생협’은 1977년 갓골어린이집 주차장 터에 건물을 하나 짓고 작은 오븐 한 대를 들여놓아 풀무식가공조합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작은 빵집이 1993년에 선생님과 학생들, 뜻을 같이하는 마을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풀무학교 생활 협동조합을 열었고, 이어 2009년 갓골 유기농업 영농조합법인으로 정식허가를 받아서 지금은 유기농산물과 유기농 빵에 관심있는 풀무학교 학생들과 지역 주민이 모여 소중한 우리 농산물로 만든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을 수 있겠다. 이처럼 홍동마을은 풀무교육의 정신과 목표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교육들을 바탕으로 현재 마을의 모습을 만들고 지속가능한 농촌의 형태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

홍성의 풀무학교의 지역사회 공헌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 가치를 바탕으로 전인교육을 통해 위대한 평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특별한 소수가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닌 지역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특기를 살려내고 이러한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특별한 지역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둘째, 홍동마을의 협동조합은 경제적 이익의 창출이 목적이 아닌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지역사회에 필요한 여러 시설 및 서비스를 생성하거나 관리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출자하여 투자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지역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역사회의 주인으로서 마을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셋째, 앞서 말한 두 가지가 지역사회를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있다. 지역사회가 쇠퇴하고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 인구가 감소하는 것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도시에서의 삶보다 소규모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때 자신들의 욕구 해소 또는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에 불편을 느끼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홍동마을의 주민들은 이러한 문제를 교육과 더불어 협동조합의 힘인 공동출자와 공동 투자를 통해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을 해왔으며 그 결과로 경제적인 문제와 더불어 지역사회의 약점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1. 원불교의 신협

 

원불교신용조합의 뿌리는 1917년(원기2)부터이다. 소태산대종사가 대각을 이룬 후 모여든 제자들과 더불어 ‘저축조합’을 창설하고 허례폐지ㆍ미신타파ㆍ금주단연ㆍ근검저축을 제자들에게 실행하게 하여 여기서 얻어지는 돈으로 기금을 육성해 나갔다. 교단 창립 초기의 금융기관의 시초는 1917년에 설치한 ‘저축조합’으로부터 비롯된다.

이후 소태산이 불법에 대한 선언을 한 1919년(원기4)에 저축조합을 ‘기성조합’으로 개편했다. 다시 1924년(원기9)에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마치고 ‘상조조합‘을 설치하여 총부 10부서중 하나인 상조부에서 운영하도록 했다. 이때 상조조합의 중요업무는 각종 자금의 저축ㆍ관리였다. 총부 각부의 자산을 통일ㆍ저축하는 각부자금, 회원들의 유지ㆍ의무금 납입을 위한 의무자금, 정기훈련의 선비 조달을 위한 공부비용 자금, 선조들의 제사 기념을 위한 헌공 자금, 회원들의 각종 사업을 위한 사업비 자금, 회원들의 자녀 교육을 위한 교육비 자금, 회원들의 생활을 위한 생활비 자금 등을 저축 관리하도록 했다. 이 자금으로 토지매입과 영농ㆍ양잠ㆍ과수원ㆍ축산ㆍ원예 등에 투자하는 한편, 영세민들에게는 저리로 융자해 주었다. 상조조합은 교단 초기에 금고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과 같은 원불교신용협동조합은 1972년(원기57)에 전주교당에서 설립한 ‘전주원광신용협동조합’이 효시이며, 1977년(원기62)에는 광주교당에서 ‘광주원광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후 각지에 원불교 공동체의 신협이 다수 설립되었는데 익산에 위치한 ‘중앙신용협동조합’이 1978년(원기63)에 창립되었고, 같은 해에 ‘영광신용협동조합’, 1980년(원기65)에 ‘부산원광신용협동조합’, 1981년(원기66)년에 ‘동광주원광신용협동조합’, 1982년(원기67)에는 서울 종로교당에 ‘종로원광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한편, 신용협동조합법(1972.8.17. 법률 2338호)의 실시로 마을금고 설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원불교에서도 정토회가 주축이 되어 정토들의 공동유대와 생활토대 마련을 지원하기 위해 1979년(원기64)에 ‘원광새마을금고’가 설치되어 점차 건실한 대형금고로 발전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새마을금고’와 ‘신용협동조합’은 원불교의 양대 금융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신용협동조합은 자조ㆍ자립ㆍ협동의 정신과 잘살기 위한 경제운동, 사회를 밝힐 교육운동, 더불어 사는 윤리운동 등 3대 실천운동을 목적으로 한다. 원불교신용협동조합은 초창기 저축조합과 상조조합의 정신을 계승하며 ‘신협’의 정신과 실천운동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신용협동조합의 운영방식을 도입하되 원불교적인 조합정신을 근간으로 삼는다. 소태산 대종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최초법어로서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의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을 설하였다. 이 최초법어에서 밝힌 내용이 바로 저축조합의 핵심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수신의 요법을 통한 학문의 준비와 정신수양을 비롯한 시비 이해의 판단과 지행대조, 제가의 요법을 통한 경제적 자립과 일상생활 및 가정의 안정,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을 통한 강약의 진화 원리와 영원히 지속되는 강자가 되는 방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을 통한 지도인의 자격요건을 갖추는 것 등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최초법어의 내용을 직접 실천에 옮김으로써 영광군 길룡리라는 지역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불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외치며 영육쌍전, 이사병행,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이라는 표어를 바탕으로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생산과 노동을 중시하며 종교에 종사하는 교역자 스스로가 생산성 있는 활동을 생활 속에서 감행해 가면서 종교수행을 하도록 가르치고, 단조직과 병행하여 저축조합을 설립하고 방언공사를 진행함으로써 안으로는 단결심과 교육의 내실을 다지고 밖으로는 회상설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경제력을 확립한 것이다.

인간을 이루는 것은 정신과 육신이기 때문에 만약 그 중 어느 하나가 소홀하게 되어 부족해진다면 원만한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종교인들이 세간 생활에 대한 것, 즉 물질생활과 경제를 멀리하고 금기로 어긴 것은 원만한 인간 생활을 포기했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불법을 공부하여 불제자가 됨으로써 세상에 유익을 주는 원만한 인간상을 강조한 소태산 대종사는 저축조합 운동과 방언공사를 통해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 즉 지역사회 속에서 헐벗고 굶주린 주민들이 자력을 세워 생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생산적 생활과 더불어 정신적 구도의 길을 열어 줌으로써 구도적 정신개벽과 삶의 풍요를 기약하는 물질개벽을 병립할 수 있는 대승적 종교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협동조합은 상호부조의 단체이기 때문에 지역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소태산 대종사의 변산 입산과 동시에 자연히 조합은 해체되었으나, 삼산 김기천은 길룡리 이웃 마을 천정리에서 천정 조합을 설립하고 공동작업, 면화재배등 동민들과 상부상조를 통하여 상당한 자금을 확충하여 동민들의 사기와 결심을 공고히 하였고, 일산 이제철은 육촌동생 이동안과 더불어 영광 묘량면 신홍마을을 중심으로 종래 씨족 단위의 계를 확충시켜 묘량수신조합을 설립하고 도내 유수의 모범마을로 평가받는 등 조합원들이 다시 종래의 단원의 자격으로 돌아가서도 각기 고향에서 조합 운동을 적극 전개함으로써 그 정신은 계속해서 이어져왔으며, 이러한 영산방언 간척사업의 투자와 그의 성공,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협동조합운동 전개는 결국 원불교 창립의 근간이 됨으로써 지금의 원불교 신협, 마을금고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원불교 신협은 원불교 창립 당시의 저축조합 운영과 우리나라 고유의 상부상조 정신, 회원의 자발적인 참여로 자금을 조성하여 편리하게 대출을 받는 등 회원들의 가계에 유익을 주며, 영육쌍전의 정신으로 교단 경제와 교화발전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신협’ 운영의 실제에 있어서는 교단의 통합경제를 지향하는 실천적 방법으로 원불교은행 설립의 기초를 다지며, 현실적으로는 교도들의 경제적 상부상조와 지역사회의 금융활동에 이바지하고자 함을 목적으로 한다. ‘신협’의 주요업무는 예ㆍ적금의 수납, 대출 등의 신용사업, 복지사업, 조합원을 위한 공제사업, 조합원의 경제적ㆍ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교육 등의 사업을 수행한다.

 

. 저축조합 운동 정신의 지역경제적 활용

 

 

  • 저축조합 운동 정신과 원불교 봉공회

 

소태산 대종사는 원불교 초기교단 형성과정에서 실시한 저축조합 운동과 방언공사는 토지확보, 회상 창립의 자금 마련과 같은 경제적인 목적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품 10장에서 소태산은 방언공사를 실시한 이유로 가장 먼저 제자들의 신심의 유무를 알고자 함이라 하였으며 그 외에도 일의 본말의 이치를 알게 하고 노동의 가치와 복록의 원천 그리고 솔성의 도를 알게 함이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경제자립을 위해 소태산 대종사가 착수했던 사업들은 경제적 목적 외에 비경제적 목적이 포함되어 있으며, 경제 가치를 창출하는데 신심, 솔성과 같은 비경제적 요인이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간척 사업의 동기가 토지를 소유하려했던 목적보다는 대중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초기 교단의 경제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공공의 이익과 사회가치 창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저축조합 운동 정신은 자리이타이며 궁극적으로 무아봉공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대사전』에 의하면, 봉공은 개인보다 전체 사회를 위한 것, 곧 사사로운 이익보다 공익을 우선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즉, 무아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데 성심성의를 다하자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무아봉공의 정신을 가장 잘 실행할 수 있는 조직이 바로 ‘원불교 봉공회’인데, 원불교 봉공회는 인류의 무지·빈곤·질병·재해 등 모든 고통을 없애기 위해 무아봉공을 실천하는 원불교인들의 모임으로서 전국 원불교 교당에서 1969년부터 자생적으로 결성되어 활동을 펼쳐오다가 1977년에 원불교중앙봉공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현재 원불교중앙봉공회 산하에 전국 13개 교구 봉공회, 350여개 교당 봉공회가 활동하고 있으며, 해외에서도 1979년부터 교당 봉공회가 결성되어 현재 1개 교구 봉공회(미국서부)와 14개 교당 봉공회가 조직되어있다.

봉공회의 의미는 대산종사가 제 19회 중앙교의회에서 설한 “우리들은 무아봉공의 봉공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사대봉공회의 실현으로 세계의 고통인 빈곤과 무지와 질병을 퇴치하는 데 이바지해야 하며, 인류의 영과 육을 제도하여야 하겠습니다”라는 법문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상 대산종사의 법문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봉공회는 소태산 대종사의 저축조합 운동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자리이타, 무아봉공의 정신의 맥이 흐르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봉공회원들의 봉공활동 실천경험을 통해 분석된 봉공의 본질적인 의미는 ‘함께살고, 함께 나누며, 서로 배우고 같이 성장하는 것’이었으며, 봉공활동 행위 그 자체가 무아봉공을 행하는 자의 인격적 성숙을 도와주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현재 봉공회에서 진행되는 사업이 대부분 지나치게 비전문적인 수익사업에 치중되어있다는 것과, 여성 교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업주부의 희생이 강요된다는 점, 젊은 봉공회원의 확보와 참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 봉공활동의 체계적인 관리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점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1. 봉공회 활동의 지역경제 활성기여 방안

 

원불교 헌규집에 “봉공회는 일원대도와 삼동윤리의 정신 아래 재가, 출가, 국가, 세계의 모든 인류의 영과 육의 빈곤, 무지, 질병 및 재해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정신, 육신, 물질로 봉공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한편 서울교구봉공회 규정을 살펴보면 추가적으로 부속기관 및 단체에 대한 조항이 있는데 32조를 보면, “1. 본 회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수익기관이나 봉사대 등 부속기관이나 단체를 둘 수 있다. 2. 부속기관 및 단체에 관한 규정은 따로 정한다.”로 규정되고 있다. 이 말인 즉 일원대도와 삼동윤리의 정신 아래 재가, 출가, 국가, 세계의 모든 인류의 영과 육의 빈곤, 무지, 질병 및 재해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정신, 육신, 물질로 봉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봉공사업과 더불어 추가적으로 새로운 봉공사업을 운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해된다.

현재 원불교 봉공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표2>와 같이 정리된다.

 

 

 

<표2> 원불교 봉공회 주요 사업
바자회·보은장터 수익활동을 통해 어려운 약자들을 보호하고, 사회와 국가에 의미있는 일들에 보템이 됨
2. 한울타리 운동 모든 이들을 내 가족같이 보듬고 받들어 여러 방면에서 형제, 자매 그리고 부모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함
3. 국내·외 구호활동 국가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건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현장에 뛰어가 구호의 손길을 보내줌
4. 새생명 운동 건강을 잃은 모든 이에게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함
5. 북녘동포 돕기 북한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식량지원 및 새터민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

원불교 봉공회는 현재에도 여러 사업을 운용하고 있는데 크게 다섯가지 사업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바자회·보은장터는 운영으로 얻어진 수익금을 소년원, 경로잔치, 독거노인 돕기, 소년가장의 장학금지원, 추위·폭설·지진 등 국내의 각종 재난을 위한 보호비용을 지원하는 등 어려운 약자들을 보호하고, 사회와 국가에 의미있는 일들에 보탬을 주었으며,

둘째, 한 울타리 운동은 모든 이들을 내 가족같이 보듬고 받들어 여러 방면에서 형제 자매 그리고 부모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다. 교도소 교화·혼인상담소·은혜 호스피스·한울안 생활 협동조합등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셋째, 국내외 구호활동은 국가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건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현장에 뛰어가 구호의 손길을 보내준 것인데, 추위·폭설·지진·해일 등 생활 터전이 파괴된 지역에서 벌였던 복구지원사업들이 이에 해당한다.

넷째, 새생명 운동은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학생들의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이클 운동으로 시작되어 현재는 건강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도록 심장병 어린이 수술, 개안 수술, 안구 기증, 헌혈 운동, 장기 및 시신 기증, 난치병 치료 지원 등으로 실천되고 있다.

다섯째, 북녘동포 돕기는 북한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식량지원 및 새터민이 정착할 수 있도록 정신, 육신, 물질로 도움을 주고있는 활동이다.

이와 같이 현재도 원불교 봉공회는 자리이타로써 무아봉공하는 정신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본 논문에서는 봉공회 활동의 지역경제 활성기여 방안으로 지속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는 봉공사업을 제시해보려 한다.

소태산 대종사의 저축조합 운동, 원주지역의 신협운동, 홍성의 풀무학교에는 공통적인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바로 자력을 갖춘 개인으로 구성된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자력이란 경제적 안정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수행에 있다.

직업은 경제적 안정과 사회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경제자립의 원천이며 사회참여의 통로이다. 그리고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

소태산 대종사는 타자녀 교육을 통해 모든 사람을 두루 교육하여 세상의 문명을 촉진시키고 일체동포가 다 같이 낙원 생활을 하자고 하였다. 소태산은 과거 공도 사업이 부족한 것은 사농공상에 대한 전문 교육이 적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공도사업이란 개인의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업인 직업에 기반하는 것인데 과거에는 직업교육 즉 사농공상에 대한 교육이 적어서 결과적으로 공도에 헌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봉공회에서 진행되는 사업이 대부분 지나치게 비전문적인 수익사업에 치중되어있다는 것과, 여성 교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업주부의 희생이 강요된다는 점, 젊은 봉공회원의 확보와 참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 봉공활동의 체계적인 관리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점을 앞서 언급하였는데,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기대되는 것들을 몇가지 제시해본다.

첫째, 전업주부위주로 구성된 봉공회의 인식을 개선하여 지역경제에 필요한 업종, 예를 들어 카페, 농사, 빵집 등 비교적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봉공회원을 영입해야 한다. 생산적이고 지속가능한 가치를 지역사회에 확산시킴으로써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젊은 봉공회원을 영입하여 봉공의 가치를 조기에 교육하여 봉공회 활동을 통한 일자리 교육과 더불어 다음 세대의 봉공회를 준비하도록 하는 지속가능한 봉공회 활동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직업교육을 받은 봉공회원이 지역에 필요한 업종을 새로 시작할 때에 앞서 본문에 있었던 원주지역의 신용협동조합에서 행하였던 바와 같이 공동 출자로 모여진 금액 안에서 저금리 대출을 통해 봉공회원의 지역경제 참여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창업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고 이러한 선순환이 계속된다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봉공회의 분야별 전문화와 조직화가 필요하다. 하나의 봉공회에서 양성된 인재가 새로운 봉공회를 조직하고 그러한 봉공회가 하나 둘 모여서 지역사회 경제의 구심점이 되어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한다.

교육과 도움을 통해 봉공회원의 자력을 확립시키고 자력을 세운 봉공회원은 다른 사람이 자력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기에 봉공의 가치를 교육하여 개인의 이익보다 공중의 이익을 우선하며 기꺼이 한 몸 바쳐 희생할 수 있는 무아봉공의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하여 봉공회가 이렇듯 지역사회 속에 자리이타로 녹아들어 최종 목표인 무아봉공의 경지에 한 사람 한 사람 이르게 되어 모두가 서로 돕고 돕는 다시 없는 낙원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본 사업의 취지이다.

 

 

. 결론

 

 

현재 도시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우리나라 약 230여개의 시·군·구 중에서 반 이상이 이미 쇠퇴했거나 쇠퇴하고 있고, 나머지 20%도 쇠퇴 징후를 보인다고 한다. 또한 그러한 여러 작은 지역사회들은 경제적 빈곤, 경쟁력 상실 등으로 인구의 감소, 사회적 문제의 집중, 경제적 쇠퇴, 물리적 노후화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지역사회의 문제는 사실 지역사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역사회의 쇠퇴는 곧 국가의 생존문제와 맞물려 있다. 쇠퇴한 지역사회를 이대로 놓아둔다면, 정부차원에서 지원을 한다 한들 쇠퇴한 지역사회에 대한 재정투자의 비효율이 시간이 지날수록 급속도로 높아지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국가와 국민 전체가 그 부담을 안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사회 내부로부터 쇠퇴해가는 지역사회를 다시 살려낸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협동조합 운동의 성공적인 모델인 소태산 대종사의 저축조합 운동, 원주지역의 신협운동, 홍성의 풀무학교에는 크게 약 세가지 정도의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특별한 누군가의 능력을 기반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종교적 가치와 신념을 교육받은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특별한 노력과 특별한 정성으로 성공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둘째, 구성원들에게 공익정신을 함양하도록 하여 자발적인 출자가 진행되었고 그렇게 모인 자금을 투자하여 조합원이 직접 지역사회 경제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업을 시도하고 운영했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의 협동조합을 시작으로 조합의 구성원들이 또 다른 협동조합의 조합장이 되어 지역사회에서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창출하거나 손길이 필요한 다른 지역사회에 진출하여 또 다른 지역사회를 살려내고,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들어내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확장해 나갔다는 점이다.

위 세 가지 공통점은 협동조합의 성공적인 모델인 소태산 대종사의 저축조합 운동, 원주지역의 신협운동, 홍성의 풀무학교 모두 자리이타로서 이타적 대승행을 통한 무아봉공의 정신이 바탕이 되어 진행된 사업이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상이 밝아질수록 특별한 한 명의 힘보다 평범한 여러 사람의 힘이 모여 특별한 하나를 이루어냈을 때 내가 좋고 네가 좋은 자리이타의 이념이 실행되기 수월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 이익을 보았을 때 누군가 손해를 보아야하는 현대 사회의 경쟁적 경제관념을 주요 이념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기에 다소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서로를 위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리이타와 무아봉공의 정신을 바탕으로 구성한 경제 구조가 바로 쇠퇴해가는 지역사회를 다시 활발하게 숨 쉬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며 그 중심에는 저축조합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원불교 봉공회가 함께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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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학과

Wonkwang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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