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면서
문화란 인간의 힘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 상태를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는 오랜 시간 전부터 인간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왔고, 현대의 삶에서는 중요한 행위로 여겨지고 있다. 인간은 삶 속에서 다양성과 창조성을 추구해 왔으며 그로인해 문화의 질 또한 진화되었다. 그 속에서 경제, 법과 제도, 도덕, 문학과 예술, 종교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성화 되어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그 가운데 일반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분야의 문화는 많이 형성되었지만 종교나 정치, 경제와 같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에서는 발전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근래에 사회의 각양각색의 계층과 다양한 종교의 성직자들이 자신들만의 문화를 펼쳐 낼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현대 시대는 전자통신이 발달되어 남녀노소가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에세이 서적이 나오게 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불교에서는 혜민스님이 서술한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이나 기독교에서는 이해인 수녀님이 서술한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을 포함한 다양한 종교에세이 서적들이 판매되고 있다. 원불교에서는 어떠할까? 원불교 출판사 홈페이지에 ‘에세이’를 검색하면 박종락 저자의『내 마음의 풍경』과 백종훈 저자의 『시우: 때맞춰 내리는 단비』의 책들이 나오고, 최근에는 박경전 저자『돌이 듣는다』가 발간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밝힌 대로 다른 종교에서는 다양한 에세이가 발간되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그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시대적 상황을 보아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小太山 朴重彬 大宗師, 1891.5.5.~ 1943.6.1. 이하 소태산)님이 펼쳐주신 일원대도의 정법을 원불교 교도뿐만 아니라 비교도인들에게 까지도 전달하기 위한 교화의 차원에서 원불교 문화콘텐츠 ‘포토에세이’작품의 기틀을 잡고 미래에는 실제 책을 출판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교화방법은 다양하겠지만 포토에세이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현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이라고 사료된다. 또한, 원불교 예비전무출신이 제작한 작품인 만큼 원불교적 교법과 교리가 담겨 있어 일반 대중들에게는 원불교만의 시선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출·재가 교도들에게도 각자의 알음알이가 얻어 질 수 있다.
포토에세이의 제목은 『이 심월(心月)을 구경하소』라고 지었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마치 달이 차고지는 것처럼 유동적임을 표현하며 마음과 달이 둘이 아님을 나타낸다. 책속에는 표지사진과 목차, 작가의 말 그리고 작품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품 속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상 사진을 첨부하였다. 이는 법신불일원상의 내역이 사은이며 사은은 곧 우주만유라는 법문을 생각하여 볼 때 우주만상으로 펼쳐진 ‘보신불’과 ‘화신불’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색다른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마지막에는 다양한 법문을 첨하여 독자들에게 소태산이 밝힌 원만한 정법이 전달되어 교화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진다.
Ⅱ. 이론적 접근
- 문화콘텐츠에 대하여
이 포토에세이는 원불교적 종교문화콘텐츠로 분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문화콘텐츠란 무엇인가. 먼저 종교문화콘텐츠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문화콘텐츠에 대한 정의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문화콘텐츠에 대한 정의는 문화콘텐츠가 주목되기 시작한 이후 현재에도 계속되는 물음이다. 문화콘텐츠란 일정한 문화텍스트가 매체에 담긴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종교문화콘텐츠는 글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문화를 표현해 낼 수 있는 문화적인 요소가 텍스트에 담긴 상태이다.
다음으로는 원불교 문화에 대한 정의이다. 원불교 문화는‘일원문화’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곧 “일원의 진리에 바탕 한 문화가 된다.” 일원의 진리란, 곧 소태산이 밝혀준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를 뜻하며 이를 통해 원불교 교법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를 목적하자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자면 원불교 문화콘텐츠란 ‘일원의 진리에 바탕 한 문화’로써, 소태산이 밝힌 원불교 교법을 시대화·대중화·생활화 하기 위해 글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여 원불교만의 문화를 표현해 낼 수 있는 문화적인 요소가 텍스트에 담긴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원불교정체성인 종교적 개성, 사상과 실천으로 유무형의 문화적 형식을 통해 구현된 것 다시 말해, 원불교적인 정서, 원불교적인 신앙으로 살아가면서 다양한 형식과 방식으로 창출되는 문화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문화콘텐츠는 원불교 내에서는 소태산의 생애를 그린 뮤지컬 ‘이일을 어찌할꼬’나 목판화가 이철수 화백이 원불교 대종경을 판화 속에 ‘물질을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개교표어를 충분히 담아냈던 것과 같은 시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20년을 기준으로 원불교에서는 제5회 원불교 콘텐츠 공모전을 진행하였고 문화상품과 캐릭터, 창작성가(작곡&편곡), 문학작품(운문, 산문, 소설, 희곡 등)의 부문을 통해 원불교 문화 예술의 콘텐츠 개발에 힘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불교 문화콘텐츠의 종류 | 예시 |
원불교 홈페이지 | 일러스트, 캘리그라피, 카툰 등 |
어플리케이션(APP) | 원불교 신문, 성가 노래방, 원음방송 등 |
영상 및 공연 | 유투브채널, 원음방송, 일원화100년의 향기 등 |
문화상품 | 개벽삼총사 피규어, 기념품, 문구, 완구 등 |
이와 같이 원불교 내에서는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포토에세이인가? 에세이는 2018년 베스트도서 10위안에는 6권이 포함될 정도로 일반 대중들의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세이의 가장 큰 장점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으며 그 속에는 다양한 계층의 시선과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어 여러 관점에서의 삶의 이야기가 내포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글을 접하는 독자들이 사진을 함께 접하게 되면 그 사이에는 무궁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경험, 문화적 다양성, 의식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자의적 해석, 즉 내포된 의미(Connotation)를 한껏 열어주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사진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한 순간을 사진을 보는 이에게 재현시킴으로써 현재와 과거 고정된 시간이 공존하는 곳, 즉 ‘스투디움(Studium)’ 과 푼쿠툼(Puncutum)’이 공존하는 것이다. 하나의 글과 사진들이 저자가 전달하고 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음과 동시에 각자가 가진 경험과 성향에 따라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맞이함으로써 성장과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가능한 것이다. 그 속에 원불교적 교리를 포함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원불교 교리에 대한 관심과 교리적인 이해에 대한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더불어 일기를 통해 일상과 교법이 둘이 아님을 간접적이나마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 원불교 일기법에 대하여
본 논문은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감상일기와 심신작용 처리건이 문화콘텐츠로써의 발전이 될 수 있으며 더불어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전달하여 원불교 교법을 전달해 주고자 하였다. 두 가지의 일기법은 원불교의 정기훈련법 11과목에 속한다. 일기법은 원기 11년 『불법연구회규약』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① 오전 2시간은 좌선하고, 또 2시간은 취지규약경전을 연습하고, 오후 2시간은 일기를 하되 시간을 대조하여 기재하며 응용하는데 각항 처리건을 기재하며, 어떠한 감각이 있고보면 감각된 사유를 기재하며, 또 2시간은 문목의두를 강연하기로 홈.
이런 일기법을 보완·발전을 거듭하여 현재 원불교 정전에서는 심신작용 처리건은 당일의 시비를 감정하여 죄복의 결산을 알게 하며 시비 이해를 밝혀 모든 일을 작용할 때 취사의 능력을 얻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생활 속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이로운 일과 해로운 일(시비이해)을 판단하여 정의를 양성하고 불의는 제거하는 취사를 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감각이나 감상을 기재시키는 뜻은 그 대소유무의 이치가 밝아지는 정도를 대조하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주의 대소유무를 분석하고 연구하여 실생활에 다달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여 알자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원불교 대사전에서는 일기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교리를 훈련받으면서 그 교리를 일상생활에서 익히고 실천하며 경계를 대할 때마다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한 후 심신작용의 처리를 반성하고 대조하며, 보고 듣고 생각하는 가운데 느낀 감각이나 감상이나 심신작용의 처리 건을 기재하여 그 실행여부를 점검하고 지행을 대조하여 일분일각도 허송하는 일이 없이 끊임없는 노력으로 공부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또한, 소태산은 일기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미묘하여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진다 하였나니, 챙기지 아니하고 어찌 그 마음을 닦을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나는 또한 이 챙기는 마음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상시 응용 주의 사항과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을 정하였고 그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일기법을 두어 물 샐 틈 없이 그 수행방법을 지도하였나니 그대들은 이 법대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하루 속히 초범(超凡) 입성(入聖)의 큰 일을 성취할지어다.
원불교 정기훈련법인 일기법은 교단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일기를 통해 마음을 챙기고 그 챙긴 마음을 조사하기 위한 공부법을 이 포토에세이 속에 녹여내어 심신작용 처리건과 감각·감상이 문화콘텐츠로 발전되어 원불교 교법이 시대화·대중화·생활화가 가능함을 본 논문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Ⅲ. 포토에세이 작품집 『이 심월(心月)을 구경하소』의
체계와 구성
- 포토에세이 작품집의 체계와 구성
고요한 밤 홀로 앉아 이 마음을 관하올제
분별주착 딸치않고 무심적적 들어가니
적적요요 본연한데 일각심월 원명하다
여-보소 벗님네야 이 심월을 구경하소
-『원불교 성가』 107장 저 허공에 밝은 달은 –
책소개
페이지수 : 45쪽, 사진 : 7장, 약 1.1만자, 약 2700단어
저자가 원불교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난 후 경계 속에서 살아가며 겪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원불교 수행 가운데 정기일기를 통해 일상에서 얻은 몸과 마음의 작용들과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취미로 시작한 사진생활을 통해 일상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다양한 사진들을 통해 그 속에서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해내고 있다. 사진과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이야기들을 통해 진리적 깨달음을 전달해주고자 한다.
- 작품집의 목차
작가의 말
1) 온전한 나를 찾아가는 길
2) 마음은 모든 것을 지어낸다
3) 호수보다 바다처럼
4)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
5) 방황속의 따뜻함
6) 어쩌면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소개하는 작가의 말로 시작하여 6개의 사진과 내용이 연결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원불교적 용어를 사용하려 했으나 책의 독자들이 원불교 교도뿐만 아니라 비교도들이 보아도 이해할 수 있고 흥미가 생길만한 제목들로 정하였다. 온전함, 마음, 인연관계, 은혜, 경계등을 겪으며 나타난 마음작용에 대해 서술해보았다.
- 작가의 말
23살 9월, 처음으로 카메라를 잡은 느낌을 잊지 못합니다. 그렇게 사진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학교를 휴학하고 사회복무기간 중에 처음으로 용돈을 모아 중고카메라를 구입을 한 뒤 거리로 나가 셔터를 눌러대며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기쁨과 보람을 만끽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일상을 기록한 사진에 글을 함께 쓰기 시작했습니다. 혼자보기 아까운 좋은 시와 글을 보면 다른 사람들과 공유를 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날의 감상들을 적어 SNS에 올리기도 했는데 그것을 본 한 친구가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너의 글과 사진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 같아
글 쓰는 거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그 말을 듣고선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기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까지 쓴 글들을 모아 하나의 책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차곡차곡 모아보았습니다.
어느 날 밤 산책을 하는 도중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달이 차오르고 지는 과정을 반복하듯 우리의 인생도 때로는 가라앉기도 하고 솟아오르기도 하며 그 가운데 수많은 마음의 작용을 겪어가며 살아갑니다. 그런 일상이 무뎌질 때쯤 어떠한 가치를 놓치고 사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성직자의 삶은 다를 줄 알았지만 쉽지 않은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일상 속에서 발견하지 못한 사소하지 않은 사소함을 발견해보고 싶었고, 생활 속에서 불법을 실천할 수 있는 공부하는 전무출신이 되고 싶었습니다. 글쟁이가 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일상 속에서 발견한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를 저만의 언어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또한, 그간의 공부를 통해 조금이나마 성장 아닌 성장은 할 수 있었습니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더 바라보고 싶었고,
너무나 일상적이라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기록하고 싶었으며,
달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이 심월을 구경해보지 않으시려나요?
어느 봄날 익산 신용동
행복한서원공동체 서원관에서
다음으로는 작가의 말이다.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된 계기에 대해 나와 있다. 작가의 말은 책의 도입부로써 독자들에게 작가가 어떤 의도로 책을 내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Ⅳ. 작품집 『이 심월(心月)을 구경하소』
1) 온전한 나를 찾아가는 길
차가운 입김을 불어가면서까지 조그마한 온기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세상은 너무나도 가혹한 형벌만을 내렸다.
무심하게도 휙 돌아버린 넓적한 등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끝내 두 눈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물방울만이
지친마음을 달래주듯 반짝거렸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자 했던 마음을
그렇게라도 억지로 붙잡고 싶은 욕심을 부린 까닭일까
아니면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참되게 바라보라는 뜻 깊은 훈육의 행위였을까.
조금은 안으로, 깊숙이 바라보고 살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충분히 아름다운 당신이기에.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각의 특성과 기질을 가지고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 또한 그렇다. 지금까지 다양한 사람과 만나며 살아왔고, 그 속에서 성장해왔고 자라왔다. 짧은 인생이지만 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의 특징을 가지며 살았다. 그것은 바로 누구에게나 맞춰주는 사람으로 자라왔다는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이 사람만의 방식으로, 저 사람에게는 저 사람만의 방식으로 대하다 보니 자주 부딪히는 일과 의견차이 없이 조금만 양보하는 마음을 가지면 원활하게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길어질수록 점점 지치기 시작했고,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는 일도 생겼다.
지금까지의 마음의 모양은 틀이 없는 고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의 틀에 맞춰 모습을 뭉개가면서까지 변화시켰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 틀도 없는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변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이전과는 다르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상처받아 그 비난의 눈빛을 온전히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선 깊은 암흑 속으로 가둬놓기도 했으며 정체성을 찾지 못해 서글픈 눈물을 흘리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본연 청정한 한 마음은 무엇일까. 하지만 이미 굳어버린 습관으로 인해 모양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져 있어서 그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문득 길가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보았다. 그 나뭇잎은 자신의 색깔과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나 또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색깔과 모습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의견을 표현하는 연습, 좋거나 싫다고 용기 있게 말하는 연습 그리고 내면의 마음작용을 깊숙이 바라는 연습. 마음의 모양을 다시 갖출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다시 마음을 살펴보고 챙기기에 전념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했던 어리석음은 결국은 스스로를 피폐하고 무너지게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 마음을 내려놓고 나니 마음을 살펴볼 수 있었고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 한 인격체임을 알 수 있었다. 결국은 욕심이다. 인정받고 싶고, 미움을 받기 싫어하는 마음, 온전히 내려놓을 수 없는 이기심. 그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진정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최령한 사람은 보고 듣고 배우고 하여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동물의 몇 배 이상이 되므로 …….
천지 만엽으로 벌여가는 이 욕심을 제거하고 온전한 정신을 얻어
자주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수양을 하자는 것이니라.
– 『원불교 정전』 제2 교의편 제4장 삼학 제1절 정신수양 2.정신 수양의 목적 中 –
2) 마음은 모든 것을 지어낸다
가을은 쓸쓸한 계절. 시간은 돌고 돌아
다시 그 상황을 마주하게 하며 끊임없이 괴롭힌다.
무엇을 하여도,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찍어도
쓸쓸해 보이는 까닭은 그것이 외로워서가 아니라
마음이 외로운 까닭인가 보다.
가을을 탓하며 쓸쓸함을 달래려 했음을 용서하시오.
그대는 가을, 모든 것을 놓아 내 마음도 놓고 훨훨 떠나가시길.
비와 낙엽이 좋다.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며 커피나 차를 마시면 우울하면서도 감성적인 기분이 주변을 둘러싼다. 또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다. 쌀쌀한 날씨 속에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길을 걷다보면 발끝에 치이는 많은 낙엽은 충분한 사색에 빠지게 만든다.
비가 오는 날과 낙엽. 어떠한 감정을 가지게 하는 두 가지 조건.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볼 때면 모든 것이 슬퍼 보이고, 발끝에 치이는 낙엽을 보면 모든 것들이 외로워 보인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비와 낙엽들이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빗방울들은 마치 하늘의 눈물처럼 느껴지고, 낙엽들은 허무한 인생처럼 느껴진다. 빗방울은 슬픔을, 낙엽은 외로움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슬프거나 외로움을 대신해 준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하늘이 맑은 날에도 여지없이 슬픔을 느끼기도 했고, 무더운 햇빛을 피해 나무의 밑에 들어가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낼 때도 외로움을 느끼고는 했다. 지금까지 슬픔과 외로움을 피해버리거나 외면하면서 솔직한 감정들을 회피하고만 싶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감정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언제나 강해보여야 했고 행복해야 했으며 외롭지 않아야 하는 환경에서 그래야만 했던 아이로 자라왔다. 아이는 살면서 좋다는 의견과 거절의 표시를 구분하지 못했고 그렇게 그래야만 하는 어른이 되었다.
빗방울과 낙엽도 그리고 이렇게 슬픈 감정과 외로움에 솔직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업이며, 내가 지은 마음이었다.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고 미워할 수 없었던 마음을 표출해내지 못했기에 외부의 무언인가에 기대어 살아왔던 그 마음을 이제는 놓아보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빗방울과 낙엽에 있지 않고 바로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천지는 비를 내리고 낙엽을 쓸어내리며 여여하게 작용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한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대상은 무한한 의미를 지닌 채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일도 그렇다. 결국은 대상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수용하는가에 따라 모든 일은 달라진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한 마음이 선하면 모든 선이 이에 따라 일어나고, 한 마음이 악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선악의 근본이 되나니라.”
– 『원불교 대종경』 제11 요훈품 3장 –
3) 호수보다 바다처럼
문득,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지금은 연락이 끊겨버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인연들도 있고 오래되지 않은 인연이지만 소중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면 ‘인연에 묶여 산다는 것이 이런 건가’ 하고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운다. 인연이란 그 ‘기간’도 중요한 법이지만, 더 중요한 건 ‘깊이’ 인 것 같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함께 추억을 쌓고 서로 존중해주며 감정의 소모를 덜어주는 그런 존재. 스스로에게도 그런 인연이 있는 걸까 하며 돌이켜보는 동시에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인연, 호수보다는 바다처럼
가끔 옛날 사진을 볼 때면 ‘아 이땐 이랬었지, 그땐 그랬었지’ 하며 추억에 빠지곤 한다. 내게는 사람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간에 그 과정에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많은 만남을 반복하는 사이에 많은 인연들이 생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인연이 많은 만큼 모두를 품어 안을 수 없었고 인연이 된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같이 하지 못한 인연도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인연들을 마주하면 함께 시간은 오래 되었지만 서로를 잘 모르기에 어색할 때가 종종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를 알게 된지 오래되어 잘 알고 있잖아?” 하지만 솔직하게 친구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면 인연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 있었던 시간’이 아니라 그 가운데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인연은 서로를 잘 모르고, 얼마 되지 않은 인연은 서로를 더 아끼고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몸은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연해지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깊어 보이지만 흐르지 않는 호수와 같다. 하지만 몸이 멀리 있어도 마음이 연해진다면 그 관계는 넓은 바다처럼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몸은 국한이 있지만, 마음은 국한이 없다. 이렇게나 마음은 언제나 신비롭고 새롭다. 어떠한 관계이든 마음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허공에 심어지는 것은 마음을 연하는 상대방이 잘 알아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옅은 인연은 풀어지기 쉬우나 깊은 인연은 그렇지 않다. 가족, 연인, 스승과 제자.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만나고 있는가?
한 사람이 와서 제자되기를 원하는지라,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다음 날 한 두 번 다시 와 보고 함이 어떠하냐.” 하시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제 뜻이 이미 견고하오니 곧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거늘 대종사 한참 동안 생각하시다가 그 법명을 일지(日之)라고 내리시더니
그 사람이 물러나와 대중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동문 제자가 되었느냐.”
고 하며, 자기에게 좋은 환약이 있으니 의심하지 말고 사서 쓰라 하였으나 대중이 사지 아니하매,
일지 노기를 띠며 “동지의 정의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하고 해가 지기 전에 가 버리니라.
– 『원불교 대종경』 제12 실시품 29장 –
4)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
나뭇잎의 생은 얼마나 짧고 부질없는가.
새싹으로 시작하여 연둣빛을 뽐내다 삶이 다하여
붉은빛으로 지상에 발을 내딛었을 때 그 허탈감은 어찌할까.
꺼져가는 생명들이 하나씩 땅을 붉게 물들일 때
아름다운 죽음이라도 포장하며 허탈한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것은
각자의 붉은 마음이 아니라 모두의 뜨거웠던 열정 이었다.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얽혀 살아간다.
어느 가을.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선선한 날에 집 앞 공원에 산책을 나왔다. 길을 걷던 중에 시선에 들어오는 땅위에 떨어진 많은 붉은 낙엽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세상에 나와 모두에게 따뜻한 미소를 건네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졌다. 그 운명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기에 이리 서둘러 가야했을까. 그런 생각이 나면 100여년의 인생도 길 위에 떨어진 낙엽처럼 보잘 것 없고 허무해 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수명은 점점 닳아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세상에 첫 울음을 터트리며 첫 발을 내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할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그렇게 굴러가는 삶을 살다가 시간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하나의 여정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은 삶의 허탈함과 무기력을 불러왔고 괜스레 낙엽을 발로 차며 기분을 표출했다.
하지만 어떤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시선의 끝에는 하늘이 있었고 사계절 내내 푸른빛을 내는 소나무가 있었으며 길가에는 많은 낙엽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다양한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삶 속에서 무한한 은혜를 발견하게 되면 그 순간이 감사로 느껴지게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복잡하고 난해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상황의 본질가치는 누가 정할 수 있는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주체는 바로 자신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낙엽을 보고 삶에 비추어 허무하다는 마음을 내어 모든 일이 공허할 수도 있겠지만 그 외의 다른 것에게서 오는 마음작용들은 왜 살피지 아니하는가. 경계를 당해서 휘둘리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 경계만을 보며 스스로를 비난하며 자존감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일상에서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무심코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사소하지 않은 것들을 더 살폈으면 좋겠다. 낙엽이 공허함으로 가득할 수도 있겠지만 그 속에는 그들이 한 여름을 보내며 더없이 뿜어내었던 그들의 열정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우리가 천지에서 입은 은혜를 가장 쉽게 알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천지가 없어도
이 존재를 보전하여 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볼 것이니 …….
없어서는 살지 못할 관계가 있다면 그 같이 큰 은혜가 또 어디 있으리요.
– 『원불교 정전』 제2 교의편 제2장 사은 제1절 천지은 1.천지 피은의 강령 中 –
5) 방황속의 따뜻함
어느 추운 겨울날, 노인은 간이역에 앉아
오지도 않는 기차를 눈보라 속에서 하염없이 마주하고 있다.
한때는 젊음의 방황 속에, 한때는 늙음의 방황 속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야 이곳에 왔다.
난로도, 두터운 외투도 필요 없이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이
그에게 있어서 모든 따뜻함이었을까.
우리는 어떤 방황 속에 또 하나의 따뜻함을 만들어 낼까.
사춘기는 중·고등학생 때 겪은 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슬럼프도 겪은 적 없이 살아와서 그 단어자체의 느낌만 가늠할 뿐이었다. 22살, 학기가 시작되고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학교를 다니며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적당히 운동도 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일상에 무뎌질 때쯤 내게도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시기가 찾아왔다.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었고 입맛도 없었으며 사람들과의 만남은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생의 회의감이 들었다. 반복적인 일상,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현상들, 때가되면 수업을 듣고 밥을 먹는 행위들. 그렇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학교를 가지 않았다. 기숙사 방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천장만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고, 식사도 제때 하지 않아 몸의 기운은 점점 가라앉았다. 도반들이 많이 찾아왔다. 많이 힘드냐, 밥은 잘 먹고 있냐 같은 안부들은 그 순간의 안부의 토닥거림 일뿐 본질적인 허무함과 일상은 그대로였으니 그들에게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고민과 혼란은 지속이 될 뿐 몸과 마음은 전혀 안심을 얻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만두기 전에 여행을 가기로 하였다. 홀로 군산 앞 바다를 찾았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슬리퍼와 수건 한 장을 챙겨왔고, 비를 흠뻑 맞기로 결심하였다. 모래사장에 발을 딛는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제까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기에 한탄과 비련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본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 할 정도로 한참동안 바닷가에 비를 맞으며 기도를 했다. ‘사은님,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발 저를 한번만 도와주세요. 제발 제가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지만 영화처럼 하늘에서 빛이 내려온다던지 갑자기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떠오르는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구도의 길은 끊어지는 듯 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꺼놓았던 휴대폰을 키자 2개의 문자가 와있었다.
‘오늘 날씨가 추운데 옷은 잘 챙겼어?’
‘오늘 하루 종일 안보이던데 밥은 챙겨먹었어?’
두 문자를 맞이하는 순간 핸들을 잡고 차안에서 오열을 했다. 나는 왜 이리도 못났을까.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다. 나에게는 지루했을 일상들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것 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 일상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로 했고, 그때부터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졌고 조금씩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일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감각은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으며 지금까지의 내 자신을 사랑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춘기, 슬럼프 등과 같은 단어들로 치부하며 살아가며 방황의 시절을 겪었던 만큼 성장을 했다. 경계가 없었더라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방황 속에서 일상의 따뜻함과 자신의 온기를 바라보고 치유할 수 있었다. 훗날, 옷 한 자락이 없는 날이 있을 수도 있고 추위를 이겨낼 온기가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담컨대 나는 방황을 이겨낸 따뜻함이 있을 것이고 그 힘이 있음을 알 것이다. 그렇게 이 생을 마감하는 날에도 말이다.
말씀하시기를 “공부는 경계를 지내고 나야 자신의 실력을 알 수 있으며,
없던 힘이 생겨 나기도 하고 있던 힘이 더욱 강해 지기도 하나니라.”
–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 제8 응기편 25장 –
6) 어쩌면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꽉 차면 지고
지게 되면 다시 꽉 차는
그 과정의 연속이다.
지고 있으면 곧 다시 차오를 것을 알고
차오르면 다시 질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훤히 보이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조금 덜 아팠을까
하지만 과거가 지금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더 성장할 지금을 잃어버렸을까.
만화, 드라마, 영화들을 접하다보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견하여 그 일을 방지하거나 피해버리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사람들을 어려움에서 구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현실세계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다. 너무 힘든 일이 생기면 미리 그 일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들로 가득한 하루를 보낸 뒤 잠자리에 누우면 하루가 비참하고 허탈해지기 마련이다. 내일도 알차고 의미 있게 살아야지 하고 다짐의 심고가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하루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사는 만큼 다양하고 예측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흘러가는 대로 산다. 그렇게 살다보면 몇 번씩 가장 힘든 시기가 찾아올 때가 있다. 그것이 슬럼프든, 사춘기든, 가출이든 상관없이 당사자의 몸과 마음이 가장 힘든 순간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일에 치여서, 인간관계에 지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거나 과거로 돌아가 그 일들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귀에 이어폰을 꼽고 산책을 하면 귓가에 들리는 노래 소리와 눈앞에 펼쳐진 자연환경과 함께 살포시 볼에 가라앉는 바람이 느껴진다. 그러면 세상이 그렇게나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다. 날이 저물고 나면 보이지 않았던 달이 선명히 드러난다. 달은 한 달 동안 때로는 손톱모양처럼 가늘게, 때로는 모난 곳 없는 둥근 모습으로 내비친다. 우리는 달이 명확하게 뜨고 지는 것도 알고 모습이 변화되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은 한치 앞도 모르지 않는가. 달이 변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훤히 알 수 있다면 힘들어 할 날도 없을 것이고, 인간관계에 지치는 일도, 과거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날도 없을 수도 있다. 이 세상 모든 과정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면 세상을 정말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고 우리는 그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는 많은 힘든 일을 겪었고, 그중에는 서러움이 폭발했던 날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날도 있었을 것이다. 무조건 견디며 이겨내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들은 우리는 성장시켰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우리가 지금을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더 크게 성장할 우리를 잃어버렸을까.
우리의 성장의 결과물이다.
결과만을 쫓아간다면 과정이 없을 것이고, 과정이 없다면 결과 또한 없다.
우리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성장을 통해 또 다른 과정을 밟는다.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말씀하시기를 “불보살에게는 누구나 다 성공시킬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소나무를 키워 정자(亭子)를 보듯이
인재를 키우는 것은 더딘 것 같으나 잘 키워 놓으면
결국 십년 이십년 뒤에는 그 인재들이 성장하여
좋은 교단, 좋은 사회, 좋은 국가를 만들어 놓는다.
이것이 조용한 혁명이다”
–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7편 227. 소나무키워 정자보라 –
Ⅴ. 나가면서
본 논문은 포토에세이를 통해 원불교 교도뿐만 아니라 비교도 에게도 간이하게 원불교 교리를 전달할 수 있는 경로를 시도해 보고자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어떠한 사물을 보거나 현상을 마주할 때 끊임없이 작용하고, 그러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기재하는 것이 바로 심신작용처리건과 감각·감상 일기이다.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의 마음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세밀하게 살펴봄으로써 실생활에서 시비이해를 구분하여 고와 낙을 구분할 수 있으며 대소유무의 이치를 연구하여 천만사리를 판단하고 연구력을 얻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원불교 예비 전무출신의 심신작용 처리건과 감각·감상을 통해 사물과 현상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문학적으로 정리하여 원불교 문화콘텐츠인 ‘포토에세이’를 제작하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임을 밝힌다.
최근 2019년도의 베스트셀러에서는 현실에 적용 가능한 실용적인 지식을 전하는 인문서들이 대거 자리 잡았으며, 혜민스님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처럼 삶에 대한 성찰과 진지한 물음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원불교 포토에세이는 사진과 일기라는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시각적·문학적으로 대중성과 친근감을 형성함으로써 자칫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원불교의 교법을 어렵게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충분한 교리적인 지혜를 줄 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포토에세이라는 하나의 콘텐츠가 제작됨으로써 하나의 문화콘텐츠로 자리를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원불교의 3대 종법사였던 대산(大山) 김대거 종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물을 마시고 숨을 쉬듯이 활용하는 법이라야
만대를 이어갈 살아 있는 법이라
원불교의 교법은 일상생활과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가 둘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그 진가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놓칠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과 환경, 인간관계와 내면의 마음작용에서 끊임없는 공부거리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 수양이 없다면 이러한 외부적인 매체는 단지 글자에 불과하게 될 수도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이 논문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실제 책으로 발간이 되지 못함을 아쉬움으로 남긴다. 이는 추후 대학원과정에서 석사논문의 초석으로 활용하여 볼 예정이다.
■ 참 고 문 헌 ■
『원불교 정전』
『원불교 대종경』
『정산종사 법어』
『대산종사 법어』
불법연구회,『불법연구회규약』
한자경,『나를 찾아가는 21子의 여정』, 서광서, 2006.
한상우,『도처에 사랑이』, 부크크, 2016.
김진형,「종교문화콘텐츠의 진단과 대중화 전략」, 종교문화비평, 2018
김진형,「문화콘텐츠의 인식범위 확장과 생산·소비 메커니즘 진단」, 2016.
허남진,「원불교 문화콘텐츠 현황과 문화인프라 구축 방향」, 2018
이용석,「원불교 일기법중 심신작용 처리건 · 감각감상의 기재 방법 연구」, 2015
김민화,「포토에세이 창작을 통한 대학생들의 자기 인식 변화」, 『문화예술교육연구』, 10-6, 한국문화교육학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