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불의 구분을 위한 원불교 판단 기준에 대한 고찰
– 일원상의 진리를 중심으로 –
명동진(도훈)
Ⅰ. 서론
Ⅱ. 정의와 불의의 외재주의적 판단기준과 한계 1. 외재주의와 내재주의의 의미 2. 고대, 중세 서양철학에서 정의와 불의의 판단기준 3. 외재주의적 판단기준이 가지는 한계점
Ⅲ. 정의와 불의 구분의 원불교 판단근거와 일원상의 신앙과 수행 1. 정의와 불의의 판단근거로서 일원상의 진리 2. 정의와 불의의 판단기준과 일원상 신앙과의 내적 연관성 3. 정의와 불의의 판단기준과 일원상 수행과의 내적 연관성
Ⅳ. 맺음말 |
Ⅰ. 서론
원불교(圓佛敎)의 모든 교리와 법문, 경전들은 일원상(一圓相)의 진리(眞理)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수행과 신앙의 목적은 모두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그러므로,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을 통해 완성되는 인격은 모든 육근동작(六根動作)이 사은(四恩)에 보은이 되고 또한 세상에 은혜로 나투어져야 한다. 또한, 그러한 경지에 오른 수행자의 분별(分別)은 정의롭고 정당한 일이 되며, 인도 정의(人道 正義)에 공정한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불교 수행자들의 정의와 불의, 정당한 일과 부정당한 일을 나누는 판단 기준은 바로 일원상의 진리가 되며, 혹은 성현(聖賢)들의 깨달음과 방편이 담긴 경전(經典), 계문(戒文), 혹은 ?원불교 전서? 역시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원불교 수행자들은 모두 일원상의 진리나 경전을 바탕으로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는데, 어찌해서 진리, 혹은 경전에 기반 된 정의가 항상 보편적인 정의가 되는 것이 아닌 그 기준을 분별(分別)한 당사자에게만 정의가 되기도 하는지 말이다. 또한, 당사자에게만 적용되는 주관적인 경향성을 가진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이 과연 교법(敎法)과 일원상의 진리와 맞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아는 만큼 보인다.’, ‘부처님의 방편은 쉬이 알지 못한다.’ 혹은 ‘일원상은 모두가 알 수 없기에 아는 만큼 실천해야 한다.’ 라는 일련의 대답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중대한 상황에서 내 판단과 행동의 근거가 ‘내가 아는 만큼’이 되어버린다면 그 기준이 갖는 주관성이 문제가 되고 그러한 주관성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기에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너무나 빈약하다. 또한, 이러한 대답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원상의 진리나 성현들이 진리를 바탕으로 만든 경전 등을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원상의 진리와 경전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적법성(適法性)만 보거나, 혹은 일원상의 진리를 깨닫기 위한 노력 없이, 사량계교(思量計較)를 통해 해석한 주관적인 지식을 절대적인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일원상의 진리와 성현들의 깨달음을 담은 경전이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으며, 무아(無我)로부터 비롯된 공심(空心)이 다수의 행복을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이렇듯, 정의와 불의의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은 일원상의 진리라는 공통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이 생기는 이유는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이 되는 일원상의 진리를 명확하게 깨닫거나, 앎의 차원을 넘어 일원의 체성(體性)에 합하는 실행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달아 실생활에 활용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부 수행자들은 성현들이 진리를 바탕으로 만든 성문화(成文化)된 법(法), 계문(戒文), 계율(戒律), 십계명(十誡命)과 같은 기준을 통해 정의와 불의의 문제를 적법성(適法性)만 보며, 단순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판단 기준과 일원상의 진리와의 내적 연관성을 배제한 채, 오직 타율성에 기반하여 적법성(適法性)만을 따지게 된다면, 이 때의 판단 기준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판단 기준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원불교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며,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해당하는 문제다. 인간은 국가나 종교와 같은 모든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는데 구성원 사이에 갈등을 중재하고 공동체를 더 나은 길로 발전하기 위해 오랜 기간 정당한 판단 근거와 기준을 찾아왔다. 때로는 신에게 그 근거를 두기도 하고 때로는 구성원의 합의를 통해 그 기준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도출된 정의와 불의의 보편적인 판단 기준은 근대 국가 이후로 법(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법은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인류 전체가 진급하는지 혹은 강급하는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원불교에서는 종교는 근본을 다스리고 정치는 현실을 다스리나 그 목적은 하나라는 측면에서 정교동심(政敎同心)의 가르침을 펴고 있기에, 원불교의 판단 기준이 사회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 포용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져야 하며, 또한 전체의 공동선을 향한 목표는 개인선과도 부합해야 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외적인 권위에 기댄 판단 기준이 아닌, 원불교의 판단 기준은 과연 인류의 보편적인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시비 이해를 나누는 기준, 현상을 분별하는 기준을 명확하게 정립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견에 취해 도리어 죄를 짓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진리를 바라보는 2가지 관점인 내재주의적 관점과 외재주의적 관점에서 도출되는 판단 기준과 진리관을 비교 분석해보려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원불교의 수행과 신앙이 진정 목적하는 바를 도출하여 원불교에서 말하는 유무식(有無識), 남녀노소(男女老少), 소수(少數)와 다수(多數)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은혜로 나투어지며, 또한 보편적이며 대중적인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에 이해를 돕고자 하는 바이다.
Ⅱ. 정의와 불의의 외재주의적 판단기준과 한계
인간은 모든 행동을 할 때 행동 동기가 되는 근거를 가지고 행한다. 그 근거는 일반적으로는 인간이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며, 이 때의 원하는 마음은 개개인의 욕구로 결정되므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도출되는 행동 동기는 굉장히 주관적이며 자기 본위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기 때문에 이러한 주관적인 동기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주관적인 동기와 갈등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구성원들은 갈등과 갈등의 중재를 하고 전체의 행복을 위해 법(法) 혹은 도덕(道德)과 같은 판단 기준을 만들며 그 판단 기준을 바탕으로 갈등을 중재하고 전체의 행복 증진을 추구한다.
정의(正義)는 사람이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행동, 사회 질서, 제도 등의 판단 판단 기준이 되며, 그 판단 기준을 통해 구성원들은 각자의 이익이 되는 최소한의 판단 기준을 선정한다. 인류의 의식이 성장하고, 국가가 등장함에 따라 국가의 통치조직과 통치작용의 기본원리 및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인 헌법(憲法)이 등장하게 된다. 법의 등장으로 사회 정의의 판단 기준은 좀 더 알기 명확해졌으며 또한 국가권력의 힘과 권위를 빌려 만들어졌기 때문에 타율적이며 물리적 강제력을 가진다. 하지만 법 역시 한계점을 지니는데, 이는 법이 권력층과 지식인들에 의해 제정되므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로써 활용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며, 또한 문서로 만들어진 법을 주관적인 사람이 판단하여 그것을 적용하기 때문에 권력, 지식인층 등의 상류층과 일반 국민에 대한 법 적용이 평등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법은 우선적으로 내면적 자유나 자율성과는 상관없는 외적 강제의 의미를 지닌다. 즉, 내가 가진 주관적 기준과는 상관없이 이미 법은 객관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법을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으로 삼을 때 도덕성, 내면의 자유나 자율성과 같은 의미를 간과하고, 그저 법의 권위와 적법성(適法性)만 강조하게 된다면, 사회는 개인의 내적 양심이나 자율성 대신 외적 권위와 타율성이 지배하는 권위주의적 전체주의로 빠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내적 요소, 양심과 자율성 등이 배제된 상태의 법은 구성원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정의와 불의가 될 수 없으며,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아닌 적용 하고 판단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상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법의 측면은 외부의 절대적인 존재에서 찾는 서양의 외재주의적 관점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외재주의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서양철학과 종교에서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을 알아보면 그들은 신이나 선의 이데아와 같은 완전무결한 절대자에게 있다고 설정하며, 정의로운 행동이란 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으로 말한다.
원죄(原罪)를 가진 인간이 내세우는 선악의 판단 기준은 불완전하기에 그러한 인간이 만든 판단 기준은 정의가 될 수 없으며, 신과 같은 절대자는 그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에 신 앞에 모든 존재는 다 평등하며, 그러한 존재로부터 비롯된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은 보편성과 절대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신을 믿고 그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신의 뜻을 담은 경전을 만들었다. 이는 종교적 가르침과 결부되어 신성(神性)을 가지게 되었고, 곧 그 집단의 규율(規律)이 되어 각자의 생명보다도 엄격히 적용되었다. 만약 구성원이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해당 집단에서 그 대상을 출교(黜敎)시키거나, 정치 권력에 편승하여 국가적인 강제력을 통해 사형(死刑)을 집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판단 기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사유한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먼저 외재주의와 내재주의의 개념을 간단히 정리하고, 외재주의적 관점으로 이데아를 통해 세상을 규명하려고 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가 플라톤(Platon, BC 427-347)과 신과 인간을 엄격히 분리해서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던 중세 교부철학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를 통해 그들의 진리관과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을 정리해보며, 외재주의적 판단 기준이 가지는 한계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 외재주의와 내재주의의 의미
고대와 중세의 서양철학과 종교 전체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은 바로 우주의 근원을 외부에 설정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神)이 현상세계(現像世界) 바깥에 존재하며, 인간과 우주를 비롯한 모든 현상(現像)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정의, 선, 불의, 악과 같은 모든 이분법적인 분별의 판단 기준 역시 피조물이자 불완전한 인간이 아닌 완전무결한 존재인 신에게 달렸다고 설정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이 외재주의적 관점이다. 이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의 주장에서 뒷받침 할 수 있는데, 그는 신이 현상세계 바깥에 존재하며, 천주에 의해 창조된 현상세계는 무기물, 식물, 동물, 인간이 계층적 질서를 갖는 차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또한, 신을 인간과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외적 존재로 규정하며 철저히 분리되어 있으므로 인간은 결코 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사람과 사물의 모든 이치(理)는 천주의 흔적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신의 뜻을 담은 경전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적법성(適法性)의 판단밖에 없다.
반면 내재주의는 세상의 근원이 되는 진리가 각자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다고 사유한다. 내재주의 철학과 종교 역시 진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계문, 경전등이 존재하며, 이를 바탕으로 수행자들을 지도하지만, 진리와 인간을 철저히 단절시킨 외재주의와는 달리 경전의 바탕이 되는 진리가 각자에게 내재 되어 있다고 사유하고 있다.
이러한 내재주의의 대표적인 예로 원불교를 들 수 있는데, 원불교 역시 일원상의 진리를 바탕으로 만든 계문, 경전 등이 존재하며, 진리를 두고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원인 법신불(法身佛) 일원상(一圓相)이 각자의 근본성품(根本性品)과 같다고 사유한다. 원불교에서는 진리의 위력을 얻고 그 체성에 합하기 위한 수행법으로 내면화된 일원상의 진리이자 근본 성품을 자각(自覺)하는 사리연구(事理硏究), 근본 성품인 진리가 잘 발현할 수 있도록 기르는 정신수양(精神修養), 본래 갖추어진 일원상의 진리, 본성을 회복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활용해나가는 작업취사(作業取捨)의 3가지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으며, 이러한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은 자칫 경전, 계율 등을 바탕으로 수행할 때 적법성(適法性)의 판단으로만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을 극복하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개인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진리와 인간의 관계는 불일불이(不一不二)로 말할 수 있다.
- 고대, 중세 서양철학에서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
고대와 중세 서양철학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외재주의적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그들은 외부의 절대적인 존재를 통해 정의와 불의를 나누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명인 플라톤에게서도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은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을 ‘선(善, Agathon)의 이데아’에 있다고 설정하며,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선의 이데아를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정의에 대한 그의 사유는 그의 저서인『국가론』에서 더욱 구체화 된다. 그는 올바름(正義, 올바른 상태)은 인간적 훌륭한 (덕 :anthropeia arete)이 되며, 이것이 지속되는 것이 바로 올바름이 실행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롭고 이상적인 국가는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의 계급으로 나누어지며 각각의 계급들은 지혜, 용기, 절제의 3가지 덕을 실현하기를 요구받는데, 이 3가지 덕이 실현되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그 국가는 정의롭고 조화로운 국가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수호자와 생산자를 통제하는 통치자는 국가를 운용하며, 지혜의 덕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렇다면 선의 이데아라는 가치는 어떻게 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궁극적 존재를 현생계 너머의 이데아계에서 찾게 되는데, 그에 의하면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 순수 형상인 이데아와 순수 질료인 물질이 존재했다. 그리고 데미우르구스(Δημιουργός)라 불리는 신은 항구적 질서의 이데아(idea)에 따라 물질을 재료로 삼아 가시적이며, 생멸하는 현상세계를 만들었다. 이데아는 이성적 사유의 대상이 되며, 감각의 대상이 되는 물리적 현상계의 원형이 되며 현상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데 그는 이를 통해 세상을 현상과 이데아, 두 가지로 해석하는 이원론을 확립한다. 여기서, 그는 태양의 비유를 들며 ‘선(善, Agathon)의 이데아’의 개념을 요청한다. 가시적 세계에서 색, 모양 등을 볼 수 있게 주관과 객관을 매개하는 것은 빛이며 그 빛의 근원은 바로 태양이 된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가지적 세계에서 그런 태양의 역할을 하는 대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그 대상이 바로 선의 이데아가 된다.
선의 이데아는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진리관에서 가장 높은 가치이자, 모든 것의 근원이 되며, 세상을 제작한 신을 포함한 세상의 근원이 된다. 또한, 사고하는 주관에 인식의 능력을 부여하며 사고의 대상에게 주관에 의해 인식할 수 있는 진리를 부여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유들을 통해 플라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진리, 혹은 인간과 세상의 근원이 인간 내면이 아닌 외부의 ‘선의 이데아’에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정의란 선의 이데아의 실현을 통해 가능하며, 정의와 불의의 판단을 내리는 근거 역시 인간이 아닌 오직 선의 이데아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플라톤의 외재주의적 관점은 중세에 와서 그리스도교를 만나게 되며 피조물과 창조물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데, 인간은 감성적 경향성과 자연적 욕구로 가득 들어차 있는 원죄(原罪)를 가진 존재이므로,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기준을 불완전한 인간이 아닌 완벽한 절대자인 신(神)에게 찾아야 한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교부철학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는 신에 의한 창조설(創造論)을 주장하는데, 이 세상은 무(無)로부터의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강조하며, 하나님과의 결속이 없이는 평화란 존재할 수 없으며, 평화는 하나님에게 종속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신은 현상세계의 재료가 되는 순수 질료와 순수 형상의 그 이전부터 존재했고 세계의 재료들을 무(無)에서부터 창조했다.
따라서 인간은 신과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신과 마주할 수는 있지만, 신과 하나가 되거나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은 무한한 절대자로서 유한하고 상대적인 피조물들 저편의 외적 초월자로 간주되며, 모든 이분법적인 판단 기준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되며 정의가 된다. 이러한 그들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굉장히 엄격히 구분되는데, 인간의 개체적 자연성과 욕구는 불의와 같은 악으로 구분되고, 신의 말씀을 전하는 경전, 십계명은 정의로 구분되며, 불완전한 인간은 신의 율법과 같은 신의 뜻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이 신의 뜻 앞에 할 수 있는 것은 적법성(適法性)의 판단만 남는다.
- 외재주의적 근원과 판단 기준이 가지는 한계점
그들은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인간 외부의 근원, 그 진리에 있으며,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란 그러한 진리, 혹은 절대자에 한없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사유는 인간과 신을 완전히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인간과 신은 같은 근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며, 따라서 인간과 신은 서로가 가지는 생각과 인식,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그들의 사유는 해결하지 못한 한가지 모순점을 낳게 된다. 그들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으며, 또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은 인간의 사고로서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정의와 그 뜻을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모순이 남는다. 이와 비슷한 질문을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이 서학에 대해 펼친 반문에서 찾을 수 있다.
“본심(本心)의 신령스러움으로 되돌아가 그 알 수 있는 도(道)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도는 단지 귀나 눈으로 듣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믿고 바라고 보존한다고 말한다면, 마음으로도 알지 못하는 것을 물을 때 그 믿을 수 있음은 어찌 알 수 있어 믿으며, 또 무엇을 지향하여 바라고 생각하는 것이겠는가”
그는 인간이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도 믿음을 바치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비판한다. 또한, 그는 천주교가 주장하는 사후 심판이나 천당 지옥 설을 두고 자기 본성과 도심의 실현이 아닌 일신의 안락함, 자기 이익 추구에 입각한 것으로 비판한다. 즉 현생에서의 하나님을 신앙하고, 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에 대해 인간 사후(死後)에 얻을 이익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이기심의 발로라 보는 것이다. 이 내용은 그의 저서『서학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오로지 천상의 복일 뿐이다. 이것은 윤리를 경멸하고 도리를 어기며 사사로운 이익을 찾는데 머무르는 것이니 배운다는 사람이 지성(至誠)을 근본으로 삼지 않고 먼저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군자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이러한 의견으로 비판을 하는 이유는 그들과 서학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을 근원을 외부에 있는 초월적인 절대자를 설정함으로써 세상을 설명하는 외재주의적 관점과는 달리 유교는 본래 마음이 도심(道心)이며, 태극(太極)이 각자의 내면에 보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내재주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이는 동학(東學)의 ‘시천주(侍天主) 개념’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우리 모두의 마음이 신령(神靈)을 간직하고 있기에 인간은 본래 누구나 신(神)이며, 인간 몸에 본래 신이 모셔져 있어서 인간 밖에 있는 어떤 초월적 절대자를 설정하거나 대상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신령은 본래 인간의 마음이며 인간은 이 신비한 영을 각각 깨달으면 마음에 간직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서학은 인간을 개별적 실체로 세상과 분리하며 신은 인간과 우주를 비롯한 세상을 무에서부터 창조하였으므로, 불완전한 인간 대신에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을 신에게 정하고, 신의 뜻이 절대적인 정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의란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에 완전히 종속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
하지만 절대적인 정의의 판단 기준이 되는 절대자는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며, 인간의 정신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대상이므로, 인간은 신의 뜻을 행하면서도 신의 본의(本意), 그러한 행동의 동기(動機)를 이해하지 못한다.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신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며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될지는 몰라도, 그의 뜻을 해석하고 이해하며 실현하는 인간은 그와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다. 따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신의 뜻을 인간이 실행할 때 신의 뜻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구분된 정의와 불의는 그 뜻을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적 가치에 의해 신의 뜻을 곡해(曲解)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을 통해 실현되는 신의 뜻은 그것이 과연 진정한 신의 뜻이며 정의가 되는지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남기게 된다.
Ⅲ. 정의와 불의 구분의 원불교적 판단근거와 일원상의 신앙과 수행
선의 이데아와 신을 통해 나누어진 모든 정의와 신의 뜻은 결국 인간의 행동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에, 정의로운 선택과 이상적인 사회는 유토피아와 같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의와 불의의 판단기준이 인지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야 하며, 자신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한계점에 대한 대안은 원불교『정전?, 일원상의 진리에서 찾을 수 있다. 상대적인 개체의 내면에서 초월적 하나, 초월적 보편을 발견하는 그들의 이러한 진리에 대한 해석은 불교의 ‘일심(一心)’, 유교의 ‘심위태극(心爲太極)’의 ‘심(心)’, 동학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심(心)’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동양의 내재주의적 초월주의의 전통은 일원상의 진리를 통해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원불교에서는 진리를 내재화시킨 성품(性品) 자체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의 성품이 발하는 과정에서 소소 영령한 영지에 의해 순하게 발하면 선(善)이 되며 거슬러 발하면 악(惡)이 되는 능선능악(能善能惡)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원불교의 정의(正義)란 바로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여, 탐·진·치(貪瞋癡)가 없는 근본 성품이 온전히 발현되는 것을 말하며, 궁극적으로는 부처의 인격을 이루어 그로부터 나투어지는 모든 행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의 방향은 우주만유의 본원이자 일체중생의 본성인 일원상의 진리이자 근본성품이 온전히 발현되는 것, 또는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하며, 이러한 신앙과 수행을 통해 원불교에서는 외재주의 종교에서 말하는 신, 즉 각자가 자신의 조물주(造物主)가 되기를 요청한다.
이러한 진리를 통해 구분되는 정의, 선, 정당한 일과 같은 가치를 원불교에서는 공부인에게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찰나의 망설임 없이 정의를 실천하라고 요청한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小太山 朴重彬 大宗師, 1891~1916)(이하 소태산 대종사) 정의를 행할 때「정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할 것이며 부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죽기로서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마음의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 육근(六根)이 무사(無事)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一心)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有事)하면 불의(不義)를 제거하고 정의(正義)를 양성하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이를 실행하는 사람이 판단 기준이 되는 일원상의 진리가 내재화된 근본 성품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거나, 진리와 경전, 계문과의 내적 연관성을 간과한 채 그저 적법성(適法性)만 판단하는 것에 그친다면, 이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진리를 왜곡(歪曲)하고 곡해(曲解)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정당한 일과 부정당한 일을 나누는 판단 근거가 되는 근본 성품인 일원상의 진리는 무엇인지 살펴보며, 진리가 바탕 되지 않는 작업취사의 수행법은 어떤 문제점을 가지게 되는지 정리해보려 한다. 또한, 이를 통해 원불교에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 즉 일원의 체성에 합하며 일원의 위력을 얻는 신앙과 수행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살펴보려 한다.
- 정의와 불의의 판단근거로서 일원상의 진리
원불교에서 요청하는 작업취사를 비롯한 모든 수행, 그리고 신앙은 일원상의 진리를 깨닫고 활용하기를 요구한다. 원불교는 서양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을 진리에서 구하고 있는 것 자체는 같지만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세상의 근원이 되는 진리는 바로 각자의 성품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주만유의 본원이 되는 일원은 인간의 본성이 되므로. 진리는 본래부터 각자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는 세상의 형성 원리, 정의와 불의의 기준 등을 외부의 절대적인 신을 통해 설명한 서양과는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각자의 성품에 내재되어 있는 일원상의 진리에 대한 무지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없이, 경전을 절대적인 정의로 삼아 적법성의 판단만 하면, 신과 인간을 단절한 외재주의 종교와 철학에서 생긴 문제점이 동일하게 발생한다. 따라서 경전과 진리와의 내적 연관성을 항상 고려하여, 자칫, 정의와 불의의 문제를 경전에 대한 적법성의 판단으로 흐를 위험성을 경계해야 하며, 더 나아가 경전에 대한 근거가 되며, 모든 분별의 판단 기준이 되는 일원상의 진리를 이해하고 깨달아서 모든 수행과 신앙, 취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원불교에서 시비이해(是非利害), 정의와 불의, 옳은 일과 그른 일, 정당한 일과 부정당한 일, 선과 악으로 분별하는 여러 가지 표현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鼎山 宋奎 宗師, 1900~1962)(이하 정산 종사)은 선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각자의 성품이 발하는 과정에서 소소 영령 한 영지에 의해 순하게 발하면 선(善)이 되며, 거슬러 발하면 악(惡)이 되며, 바르게 발하면 정(正)이 되고 굽게 발하면 사(邪)가 된다고 말한다. 즉 모든 죄의 근본은 마음에 있으며, 마음은 성품에서 분별이 나타날 때가 마음이므로, 성품(性品) 그 자체에는 선악, 이데올로기 등의 주관적인 기준, 혹은 탐·진·치, 사상(四相)이 존재하지 않는 청정한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경계를 두고 죄업의 근본이 되는 탐·진·치에 의해 분별심을 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불의가 되며, 그 분별이 바르기 위해서는 선악미추(善惡美醜)와 자타미오(自他迷悟)의 상(相)이 없는 자리에서 나툰 분별이여야 한다.
그렇다면, 육근을 정의롭게 작용하는 것을 뜻하는 작업취사를 하기 위해서는 정의와 불의의 근본이 되는 근본 성품, 탐·진·치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하며 온전한 마음’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요구한다. 탐·진·치가 없는 온전한 마음이 바로 정의가 된다고 가정할 때, 마치 검은색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와 반대되는 흰색이 존재해야 하듯, 탐·진·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탐·진·치에 오염되지 않는 마음 바탕인 일원상의 진리를 자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불교에서는 이러한 진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진리의 본질적 속성을 드러낸 진공묘유(眞空妙有)와 진리의 인간 심성의 인식론의 관점으로 표현한 공적영지(空寂靈知)다. 이에 진공묘유와 공적영지를 연관 지어 생각해본다면, 인간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정의와 불의를 비롯한 어떠한 이분법적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자리가 모든 분별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이유와 현상세계의 묘유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데, 이에 본 논문은『정전』일원상의 진리를 바탕으로 첫 번째로 진리(眞理)와 개체(個體)의 관계(關係)를 통해 원불교의 내재주의적 진리관을 정리하고 두 번째로 진리의 본질적 속성을 표현한 진공(眞功)과 묘유(妙有)와 인간 심성의 인식론, 인성론적 관점으로 진리의 속성을 밝힌 공적 영지(空寂靈知)를 연관을 지어 분석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내재화된 진리가 인간 내면에서 어떤 원리로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이 되며, 또한 어떻게 한 가지의 일이 정당한 일과 부정당한 일로 나누어지는지를 밝혀보려고 한다. 먼저 일원상의 진리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 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첫 번째로는 진리와 개체와의 관계다. 이는 일원상의 진리 첫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며’라고 말한 부분이다. 이는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일원은 부처와 성인이 깨달은 마음자리이자, 모든 중생의 본성이 된다는 뜻이다. 일원이라는 진리는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 되며 또한 현상의 모든 존재의 근거를 제시한다. 또한, ‘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세상의 모든 근원이 되는 일원이 각자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말한다. 앞서 말한 외재주의적 관점과의 차이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며, 진리를 내면화시킴으로써 진리는 인간과 근본적으로 달라서 근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외재주의적 관점과는 달리 서양에서 절대자로 설정한 신(神)이란 존재가 본질은 인간과 다르지 않으며 개인의 수행,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진리를 알며 그에 도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 번째는 진리의 본질적 속성을 표현한 진공묘유(眞功妙有)와 공적영지(空寂靈知)다. 먼저 진공은 원문에서 ’대소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진리 그 자체에는 선악, 정의와 불의, 선악과 같은 이분법적 가치가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앞서 정산 종사가 말한「성품은 원래 청정하다.」에 대한 근거가 된다. 진리의 본질적 속성인 진공은 그 자체로 어떠한 분별이 존재하지 않으며, 생멸 거래, 선악 업보가 모두 끊어져 있으므로, 생멸로는 불생불멸의 의미와도 같고 시간의 흐름으로는 무시무종(無始無終), 본원적으로는 일념미생처(一念未生處),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의미와 같으며 또한, 이 자리는 텅 비어서 말과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져 시대에 따른 이데올로기, 인간의 생각, 관념, 상상 등의 인간이 만들고 규정지은 것 어떤 것으로도 도달할 수 없기에, 소태산 대종사는 이를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로 표현하였으며 정산 종사는 일원의 진공체라고 표현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자리를 어떠한 언어와 생각으로도 가히 짐작하지 못하기에, 사량으로써 이 자리를 계교하여 알려고 하지 말며, 오직 관조를 통해 깨쳐 얻어야만 이 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현상론적 측면에서의 묘유의 작용을 일원상의 진리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난다.’ 이를 두고 정산 종사는 “진공 중에 또한 영지 불매하여 광명이 시방을 포함하고 조화가 만상을 통하여 자재하나니 이는 곧 일원의 묘유”라고 설명한다. 묘유는 현상으로서 화현을 의미하는데, 어떠한 분별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체성을 바탕으로 현상의 모든 차별이 묘유의 작용을 통해 전개되고 있다. 진공과 묘유의 관계를 본체와 현상으로서 대비시켜 본다면 이 관계는 불일불이(不一不二)로 말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서양에서 말하는 유토피아(Utopia)와는 달리 광대 무량한 낙원건설은 실현 가능할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적 영지는 진공과 묘유와 함께 일원상의 진리를 인간 심성의 인식론의 관점으로 표현한 말이다. 공적 영지와 진공 묘유는 서로 같은 말이며, 공적 진리의 본체가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는 가운데 신묘 불측하고 소소 영령 한 지혜 광명이 무궁무진하게 비추고 있음을 뜻한다. 이에 정산 종사는 공적(空寂)이란 정(靜)한 성품에 마음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요 영지(靈知)란 동(動)한 마음에 성품이 그 가운데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를 종합해서 정리해보면, 일체 생령과 모든 이치의 근원은 바로 일원상이 되며, 일원상은 진공의 측면을 가지므로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 분별로서 설명할 수 없다. 진리의 본체로부터 전개되는 현상세계의 모든 변화가 바로 묘유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며, 모든 분별과 생멸 거래가 완전히 끊어진 진공을 바탕으로 거기에서 발하는 공적 영지의 빛을 따라 대소유무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진공묘유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사람의 마음작용,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나누는 분별에서도 적용해 해석할 수 있는데, 사람의 마음작용, 육근동작 역시, 진공묘유의 진리가 항상 작용하고 있으며, 우주의 근원이자, 각자의 근본 성품은 그 자체만으로 선악, 이데올로기 등의 주관적인 기준, 혹은 탐·진·치, 사상 등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상태이기에 어떠한 분별도 존재하지 않으나, 소소 영령한 영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성품이 있는 그대로 발현되는 것이 정의가 되며, 성품이 탐·진·치에 의해 그르게 발현되면 그것이 불의가 된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를 정의와 불의의 모든 분별의 기준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주만유의 본체인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 되는 일원상, 혹은 일심(一心), 온전한 마음, 자성 청정심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진리를 각자의 내면에서 관조로서 깨쳐서 발견해야 한다. 텅 비어서 공한 마음이 스스로를 공으로 아는 마음을 자각하게 되면, 그 상태에서의 앎은 ‘공적의 신령한 앎’이기에 공적 영지이며, 이를 깨닫는 순간 그 마음은 대상이 없어도 항상 깨어있게 된다. 이를 통해 있는 그대로 발현된 진리는 항상 은혜가 되며 정의가 된다. 그러므로 원불교 수행자는 반드시 그 진리를 깨달아서 합하는 수행을 병행하여야 하며, 만일 정의와 불의의 판단기준이 되는 일원상의 진리를 깨닫지 못해 경전을 판단기준으로 삼을 경우에는 경전과 진리와의 내적 연관성을 고려하며, 자칫 절대적인 적법성의 판단으로 흐를수 있는 위험성을 항상 경계하며, 진리를 깨닫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 정의와 불의의 판단기준과 일원상 신앙과의 내적연관성
원불교에서는 각자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일원상의 진리를 바탕으로 모든 교리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진리로부터 비롯된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 역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먼저 신앙의 대상이 되는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두고 소태산 대종사는「일원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 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부처 아님이 없다.」라고 밝히며 일원상의 진리와 개별적 인간, 사물과의 관계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 사은과 일원상의 진리는 서로를 떠나지 않으며, 사은은 일원상 그 자체이므로 우주만유의 내역으로 본체와 대비되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일원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사은을 신앙한다는 것은 신앙의 주체와 신앙의 대상을 분리하지 않고, 우주만유의 본원이자, 각자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나의 본성, 일원상을 신앙한다는 뜻이 된다.
또한, 원불교의 신앙은 그 방법에 있어 진리를 믿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정전』사은의 각 보은(報恩)의 조목을 보게 되면, 천지(天地) 보은의 조목으로 ‘천지의 8가지 도(道)를 체받아 실행하며’, 부모 보은의 조목으로 ‘공부의 요도 삼학 팔조와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를 빠짐없이 밟을 것이며’, 동포 보은의 조목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도를 체 받아 항상 자리이타로써 할 것이며’, 법률 보은의 조목으로 ’개인·가정·사회·국가·세계를 다스리는 법률을 배워 행할 것‘을 말한다. 즉 이를 통해 그저 진리를 신앙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도를 체 받아 실행함으로써 스스로가 조물주가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목적임을 유추할 수 있다.
원불교 신앙의 목적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교리도에서 신앙문(信仰門)에 속하며, 원불교 개교표어 중 하나인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다. 곳곳이 부처님, 일마다 불공이란 뜻의 이 문구를 두고 원불교 3대 종법사인 대산 김대거(金榮灝, 1962-1994)(이하 대산 종사)는 처처불상은 견성(見性)이며, 사사불공을 원만행(圓滿行)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처처불상의 신앙을 하기 위해서는 신앙하는 사람 스스로가 인과보응의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신앙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신앙의 주체는 신앙의 대상과 동등한 위치에서 신앙이 이루어져야 한다.
원만행의 사전적 의미는 원근 친소와 희로애락에 끌리지 아니하고 법도 있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신앙문에 속하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삼학 수행을 바탕으로 신앙의 대상인 각자에게 내재된 근본성품 일원상의 진리를 명확히 깨달아야 하며, 또한 그 진리가 나만의 성품이 아닌 일체의 모든 생령이 가진 보편적인 진리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부처임을 알고 또한 내 육근을 주는 모든 대상이 부처임을 알 때 일원상에서 요구하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 가능하며, 수행은 바로 이러한 신앙을 통해 전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앙성은 초월자의 절대적인 힘에 복종이 아닌, 근원의 원리로서 ’법신불 일원상을 체 받아서‘ ’일원의 체성에 합하는‘ 것에서 발현된다.
원불교는 이러한 진리적인 신앙은 과거 우상숭배를 비롯해 알지 못하는 대상을 신앙하는 외재주의 종교의 신앙 등이 가졌던 한계점을 극복하고 있다. 원불교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을 바탕으로 수행을 전개하며, 우상숭배와 같이 자신의 복락과 구원을 그저 절대자에게 의지하여 구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이루어 내는 능동적이며 주체적인 신앙을 통해 진리와 합일(合一) 하도록 요구한다.
-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과 일원상 수행의 내적연관성
원불교의 수행은 크게 삼학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작업취사는 진리를 실생활에서 직접적으로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는 정신수양과 천조의 대소 유무와 인간의 시비 이해를 아는 사리연구의 수행 결과가 작업취사로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명확하게 뒷받침하는 내용을『정전』, 작업취사의 뜻에서 찾을수 있다.「작업이라 함은 무슨 일에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을 작용함을 이름이요, 취사라 함은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림을 이름이니라.」 취사의 뜻에는 이미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을 통해 정의라고 생각하는 행동 동기가 내포되어있다고 볼 수 있으며,『정전』에서 정당한 일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을 모르거나, 설사 안다고 할지라도 욕심과 습관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업취사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일원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 진리를 바탕으로 탐·진·치, 습관과 같이 판단 기준에 영향을 주는 주관적인 가치를 제어할 때 가능하다. 즉『정전』에서 요구하는 작업취사는 일원상의 진리, 근본 성품을 깨달아 아는 차원을 넘어 그 진리를 체 받아 나 자신의 탐·진·치 혹은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인 사상(四相)을 극복해서 근본 성품이 그대로 발현되게 하여야 한다.
작업취사는 원불교 교리도(敎理圖)에서 수행문으로 분류되는 무처선(無時禪) 무시선(無處禪)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먼저 무시선법의 구조를 진리의 측면인 진공묘유와 공적영지를 통해 바라보게 된다면, 진공묘유를 존재론으로, 공적영지는 인식론으로, 그리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은 실천론적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정전』무시선법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선(禪)이라 함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며, 참다운 선을 닦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아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이같이 한즉, 모든 분별이 항상 정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 영지의 자성에 부합이 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대승선(大乘禪)이요 삼학을 병진하는 공부법이니라.」
무시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일심을 통해 정의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무시선은 바로 공적영지에서 비롯된 마음을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그 육근동작이 모두 공적 영지의 자성에 부합이 되며, 깨달음이 현실에 구현된다. 이러한 무시선의 수행은 결국 일원상의 진리에서 출발하며 이를 신앙하여 삼학 수행에 활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삼학 수행은 일원상의 진리를 믿고 신앙할 때 그 추진력과 원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불교의 작업취사가 앞서 지적한, 공리주의나 외재주의의 한계점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을 비롯한 교리 전 체계가 동원되어야 한다. 또한, 각각의 수행법마다 일원상의 진리, 삼학팔조, 사은사요가 모두 담겨 있으므로 비록 각 과목이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구분되어 있지만, 신앙과 수행, 그리고 삼학 수행 간의 내적 연관성 역시 항상 고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업취사 공부법인 상시 일기(常時日記)에 속하는 유념(有念)과 무념(無念), 계문(戒文) 그리고 주의(注意) · 조행(操行)에서 나머지 수행과의 내적 연관성을 정리하여 작업취사의 수행법이 일원상의 진리를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아보려 한다.
1) 상시일기
먼저 상시일기의 뜻을『정전』에서 살펴보면 상시일기는 유무념과 학습상황 그리고 계문으로 구성되며, 판단 기준이 따로 필요하지 않은 학습상황 공부법을 제외한 유무념과 계문을『정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념 · 무념은 모든 일을 당하여 유념으로 처리한 것과 무념으로 처리한 번수를 조사 기재하되,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에 취사하는 주의심을 가지고 한 것은 유념이라 하고, 취사하는 주의심이 없이 한 것은 무념이라 하나니, 처음에는 일이 잘 되었든지 못 되었든지 취사하는 주의심을 놓고 안 놓은 것으로 번수를 계산하나, 공부가 깊어가면 일이 잘되고 못된 것으로 번수를 계산하는 것이요, 계문은 범과 유무를 대조 기재하되 범과가 있을 때에는` 해당 조목에 범한 번수를 기재하는 것이요」
먼저 유념과 무념의 공부에서 판단 기준이 필요한 부분은 처음에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을 정하는 것과 일이 잘되고 못된 것을 나누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유념과 무념의 번수를 계산하기 이전에 이미 취사하는 주의심, 혹은 일이 잘되고 못된 것에 대한 분별은 이미 발생한 상태라는 것이다. 또한, 이때의 유념은 인간이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은 마음, 허령성과 공적성을 기반으로 한 마음작용이어야 한다. 이 마음작용은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아 인간의 시비 이해를 분석하는 사리연구와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않고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는 정신수양이 함께 요구된다. 그래야 철석같이 굳은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며.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이라는 작업취사의 공부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2) 계문(戒文)
계문은 원불교에서는 작업취사의 훈련법 중 하나로 그리스도교의 십계명(十誡命)과 같이 삼십계문(三十戒文)을 통해 공부인들을 지도하고 있다. 하지만, 십계명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십계명은 그 출처가 절대적인 존재, 즉 신이기에 그 기준에 대한 적법성(適法性)을 매우 엄격하게 따지지만, 원불교의 삼십계문은 항만 입성을 하게 하는 초보적이며,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작업취사 수행법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원불교에서 삼십계문의 개요는 악습을 고쳐 항마입성을 하게 하는 초보적 공부로서 일시적 통제를 거쳐 영원한 자유의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며, 인과적으로 세세생생 고를 여의고 낙을 얻게 하는 것이며, 사회에 있어서는 무질서의 근원을 없애 평화의 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보통급 십계문, 특신급 십계문, 법마상전급 십계문의 총 서른 개의 계문을 두고 공부의 수준에 따라 계문을 내려 지키게 하고 있다.」
대산 김대거(大山 金榮灝 宗師, 1914-1998)는 정당한 고락과 부정당한 고락에 대해 문답하는 중, “삼십계문을 범하면 부정당한 고락을 받게 되고 범하지, 아니하면 정당한 고락이 오게 된다.”고 밝히고 있어, 이를 통해 원불교의 계문은 정의와 불의를 나누는 판단 기준으로 가장 편리하고 쉬운 방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계문을 보면 연고(緣故)라는 문구가 있으므로 그 연고를 판단하는 주체자가 주관적인 기준으로 연고를 판단할 가능성이 있으며, 계문이 악습(惡習)을 고치는 항마 입성의 공부로서, 작업취사의 수행으로 결국 온전한 취사가 나오기 위한 수행법인 것을 간과하고 계문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적법성(適法性)과 범과(犯過) 만을 따진다면, 앞서 외재주의의 종교와 철학이 가졌던 문제점이 발생한다.
3) 주의(注意)와 조행(操行)
주의와 조행의 작업 취사 훈련 과목 역시 일원상의 진리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비슷한 문제점이 생기게 된다. 먼저 주의는 사람의 육근을 동작할 때 하기로 한 일과 안 하기로 한 일을 때에 따라 잊어버리지 않는 공부, 즉 때에 따라 잊어버리지 않고 실행하는 마음을 뜻하며, 조행은 실행하는 마음이 구체적인 행실 가짐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태도와 행실을 아울러 말하는 말로서, 원불교『예전』과 함께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원불교에서의 예는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공중도덕,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예의 시의성·상황성·실생활에 대한 적합성·실질성 등을 고려한 중도를 중시한다. 이를 예의 근본을 공경함·겸양함·계교하지 않음과 종합하여 생각하여 본다면 예는 차별이 없는 자리에서 차별법을 쓰는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전을 수행할 반드시 예전과 진리와의 내적연관성과 예전을 내신 성인의 본의를 생각하며 그저 단순히 적법성(適法性)만 따져서는 안 된다. 또한 주의와 조행에 있어서도 하기로 한 일과 안 하기로 한 일, 그리고 사람다운 행실 가짐을 구분하는 것 역시 이분법적인 분별이 들어가게 되는데, 그 분별의 판단 기준이 감각기관이 주는 기만성과 사유 활동에 기인하는 망상과 분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작업취사의 수행이 본래의 목적인 일원의 위력을 얻고 체성에 합하기 위해서는 작업취사를 할 때의 모든 분별이 항상 정을 여의지 않고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 영지의 자성에 부합해야 한다. 또한,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는 마음이 일체의 분별을 여윈 공적의 상태며 그 공적의 상태를 자각한 ‘영지’라면 공적 영지를 통해 나투어지는 분별은 정당한 분별로 묘유의 작용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분별은 그 마음의 상태가 일체의 관습, 선입견, 이해관계, 원근 친소,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게 때문에 그 기준은 외적인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허령한 마음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원불교의 작업취사의 결과는「우리가 작업 취사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모든 일을 응용할 때에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을 얻어 결국 취사력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작업취사는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취사력을 얻는 공부이기 때문에, 시비를 나누는 기준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수행이 사견(私見)에 빠질 수 있고 모든 취사에 탐·진·치가 들어가 불완전해진다. 또한, 삼학 수행의 훈련법들과 일원상의 진리의 내적 연관성과 원불교의 모든 신앙과 수행의 목적, 그리고 정의, 정당한 일이 ‘온전한 마음으로 취사’하는 것에 있음을 간과한 채 그저 계문의 범과 유무와 경전의 적법성만 따지게 된다면, 유념과 무념의 수행법은 그저 주의심만 챙기는 단순한 수행법이 될 것이며, 기초적인 작업취사의 수행법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원불교에서 요구하는 취사가 온전한 취사가 되며 정의가 되며 은혜로 나투어 지기 위해서는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은 반드시 일원상의 진리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원불교 교리의 모든 신앙과 수행을 동원해서 단순히 앎, 깨달음의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일원의 위력을 얻고 그 체성에 합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Ⅳ. 맺음말
정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은 분별하는 주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그 주체가 가지는 판단 기준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이데올로기나 시대적 흐름에 따라 판단 기준이 변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무조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때로는 권력자,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의로 변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회와 구성원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그 판단 기준은 반드시 인도주의의 공정한 법칙이 바탕 되어야 하며, 그 법칙이 적용받는 대상은 인간이라는 범주를 넘어서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 동포(同胞)로 표현 받는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는 곧 진리가 현상으로9 나타난 사은, 그 일원상이 되어야 하므로, 그 법칙은 이데올로기나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해서는 안 되며, 그 이익은 온 세상을 향해야 하며 세상에 은혜로 나투어져야 한다. 이는 개인의 신앙과 수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탐·진·치가 없는 본래 마음 바탕이 근본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공적 영지, 진공묘유 등 여러 방법으로 표현되는 일원상의 진리를 자각하는 것이 수행과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근본되는 진리, 본래의 근본 성품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수행과 진리와의 내적 연관성을 간과한 채 그저 경전과 계문에 적법성만을 따진다면, 신앙과 수행은 주관적인 사유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으며, 이를 두고 진리적이며 사실적인 수행이라고 말할수 없을 것이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교단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공리주의가 일원상의 진리, 무아(無我)에서 나투어지는 공심으로 포장되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취사가 독단에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원불교에서 주문하는 진리적이며 사실적인 공부는 바로 각자의 마음속에 내재화된 일원상의 진리를 관조로써 깨쳐 얻는 것이 그 시작이 된다. 또한, 앎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정신수양과 작업취사로서 깨친 일원상의 진리를 수행과 삶 속에 녹여내야 하며, 일원상과 한없이 닮아가서 끝에는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할 수 있도록 방향성을 잡아야 한다. 또한 신앙과 수행, 견성, 솔성, 양성 등 모든 교리와 경전이 일원상에 바탕이 되듯 이는 서로 바탕이 되고 근본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일원상의 진리가 그 사람의 모든 육근 동작에 순간순간 끊임없이 나투어져 그 행동이 사은에 보은이 되고 온 세상에 은혜로 나투어져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광대 무량한 낙원이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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