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무아 그리고 고(苦)
– 우리는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
김호성
Ⅰ. 서론
Ⅱ. 고통의 세계
Ⅲ. 고통의 원인 1. 오온설 2. 12연기설
Ⅳ. 원불교 수행법
Ⅴ. 결론 |
Ⅰ. 서론
불교적 관점으로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연결되어 의지하고 있는 존재들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붓다는 수많은 고행 끝에 두 속성을 통찰하였고, 전자를 연기와 제법무아로, 후자를 제행무상으로 개념화하였다. 이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으며, 실체가 없음에도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다. 붓다가 설한 연기와 오온설은 이러한 존재의 실상에 대한 통찰이며, 붓다는 이러한 통찰을 통해 ‘나’에 대한 집착을 놓음으로써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다른 한편, 삶의 환경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흘러간다. 이러한 삶의 환경이 개인 각자에게 우호적인 경우도 있고, 비우호적인 경우도 있다. 이것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상황은 좋아하고 계속 유지되기를 원하는 반면, 비우호적인 상황은 싫어하고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바람과 달리, 우주의 원리에 따라 우호적인 상황과 비우호적인 상황이 번갈아 오다보니 사람들은 늘 불만스럽고 고통 속에 살아간다. 그런데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면, 우호적인 상황과 비우호적인 상황이 언제든 올 수 있음을 알기에 걱정하며 괴로워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붓다의 깨달음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통찰과 삶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존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윤회는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죽어 땅에 묻히면 그것이 거름이 되고, 그 거름을 식물이 흡수하여 양분을 삼아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동물이 이를 먹고 각자의 개체를 보존하며 산다. 이러한 순환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삶 속에서 행위의 상호작용이 업으로 형성되어 개인은 이와 같은 실존적 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존재론적 변화를 실존의 본질적 측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존재론적으로 반드시 일어나는 과정이기에, 어느 한 상태에 집착하지 않고 변화하는 것에 있어 걸림이 없기 때문에 자유를 얻고(해탈), 열반적정의 낙도를 누리게 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고통의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고통의 현상과 그 원인에 대해 알아보고, 깨달음을 통해 존재론적 실상을 통찰함으로써 해탈과 열반을 얻을 수 있는 인식론적 전환을 오온설과 12연기설에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업을 청정히 하기 위한 통찰적 지혜를 얻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실생활의 활용을 통해 윤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참다운 낙원세계를 살아가는 방법으로 원불교 삼학 수행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Ⅱ. 고통의 세계
붓다는 사람들이 태어나서 상주성이 없는 것에 상주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며 괴로워하는 삶을 윤회의 세계로 봤다. 윤회의 세계는 인식의 전환이 되기 전의 세계이다. 붓다는 깨침을 얻고 이 세계에 사는 중생들을 구원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 수십 년간 설법을 했다. 그렇다면 붓다가 괴로움의 세계라고 표현했던, 중생들이 살아가는 윤회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태어나는 것(生)도 고이고, 늙는 것(老)도 고이고, 병드는 것(病)도 고이고, 죽는 것(死)도 고이고,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怨憎會)도 고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愛別離)도 고이다.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도 고이다. 그 고(苦)의 근본은 생존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을 오취온고(五取蘊苦), 오음성고(五陰盛苦)라 한다.
전법륜경에서 붓다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의 종류를 여덟 가지로 봤다. 이것을 8고(八苦)라고 하며, 8고는 생을 받는 괴로움(生苦), 늙는 괴로움(老苦), 병드는 괴로움(病苦), 죽는 괴로움(死苦), 미운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인간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오온이 성하여 일어나는 괴로움(五陰盛苦)를 말한다. 이 중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은 앞의 여섯 가지 고통을 낳는 표면적 원인이 되며, 오온이 성하여 일어나는 고통은 모든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붓다가 바라본 세상은 이 여덟 가지 고통(八苦)의 세계이며, 현재의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고통 속에 고민하는 내용들이 전부 다 이 8고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왜 고통인가. 팔고 중 첫 번째인 생을 받는 괴로움을 보면, 사람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모태에 수개월 동안 갇혀 있는 것이 괴로움이며, 또한 모태에서 나올 때 좁을 길을 뚫으며 느끼는 압박감 역시 괴로움이며, 태어남으로써 생고 이후의 고통을 받게 되기에 태어나는 것을 괴로움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늙는 괴로움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가는 과정을 겪으며 젊었을 때 있던 몸의 유연함과 기능이 퇴화된다. 이에 젊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화장으로 겉모습을 꾸미거나, 마사지를 받거나, 주름제거 수술을 하는 등의 공력을 기울이는데 이것이 늙어가는 것을 싫어하는 반증이 되므로, 늙는 것이 괴로움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병드는 괴로움이다. 병이 들면 일반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하지 못하고, 설사 한다 하더라도 최상의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한 병들게 되면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네 번째는 죽는 괴로움이다. 죽음으로써 나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사라지게 되고, 좋아했던 이들과 헤어지게 되기에 괴로움이다. 또한 죽는 순간의 고통을 단말마라고 얘기하듯 죽는 것 자체도 괴로움이다.
다섯 번째는 미운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이다. 미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싫고, 언행 하나하나가 전부 짜증의 원인이 된다.
여섯 번째는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이다. 사람의 욕망 중 특히 강한 것이 애욕과 애착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의 괴로움은 말로 다 이룰 수 없다. 사람 뿐만이 아니라 좋아하는 동물이나 물건과도 이별을 할 때 이러한 괴로움을 느낀다.
일곱 번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사람에게는 욕구가 있고, 어떤 것이든 자기 마음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을 자기 마음과 같이 되게 하고자 인력을 들이기에 괴로움을 느낀다.
여덟 번째는 오온이 성하여 일어나는 괴로움이다. 오온이 본래 공한 것인데 그것이 상주한다고 생각하여 괴로움을 받는다. 이것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오온설을 통해 다시 한번 알아보겠다.
앞서 언급했듯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괴로움도 이 팔고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사람들이 느끼는 괴로움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이 팔고 중 어디에 속하는지 살펴보자. 아이를 둔 주부의 괴로움을 살펴보면, ‘주말에 TV만 보는 남편 때문에 괴롭다.’가 있다. 이는 주말이 되면 아이와 함께 산책도 가고 놀러도 가고 싶은데, 남편은 그렇지 않고 TV만 보고 있기에 괴롭다는 것이다. 이 괴로움은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놀러가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자신의 마음처럼 되게 하고자 남편에게 요구를 하지만 들어주지 않음에 괴로움은 증폭된다. 이것은 앞서 말한 구부득고에 해당한다. 또 다른 괴로움을 살펴보면, ‘아이가 공부는 하지 않고 만화책만 본다.’는 것도 있다. 이는 엄마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공부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게 되지만, 아이가 그러지 않기에 발생하는 괴로움으로 이것 역시 구부득고에 해당한다.
괴롭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의 원인을 정확히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왜 괴로운지 모르며 괴로움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붓다는 윤회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현신이 현세에서 끝이 날 때 육신은 소멸되어 없어진다 할지라도 실유적인 자아는 그 현신을 이탈하여 다른 몸을 빌어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 윤회설의 본 뜻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인간을 구성하던 오온이 그 일시적인 만남을 끝낸다고 본다. 육체적 요소인 색(色)은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흩어지고, 정신적 요소인 수(受)·상(想)·행(行)·식(識)은 육체를 떠나 존재할 수 없기에 사라진다. 남는 것은 오로지 그가 생전에 지은 업뿐이다. 중생들은 무명으로 인하여 업을 짓고 그들의 업이 다할 때까지 생과 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데 그 장소는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이다.
불교의 윤회설에서 윤회하는 각 장소 자체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지옥처럼 그에 대한 묘사가 아무리 자세하고 세밀하더라도 그 취지는 인간의 행위를 경계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육도 윤회란 어디까지나 선악의 업이 어떻게 천계의 즐거움으로부터 지옥의 고통까지 초래하는 것인지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 인과를 확신해서 행동의 변화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즉 육도라는 윤회처의 설정은 세속적인 삶에 집착하지 않고 12인연이라는 인과의 바른 이치를 깨닫게 하는데 근본 취지가 있다.
윤회의 가장 큰 특징은 업이다. 업은 ‘하다’, ‘행하다’, ‘만들다’ 등의 뜻으로, 넓게는 모든 심신 활동을 의미한다. 업에는 작용(作用), 법식(法式) 유지, 결과의 분별이라는 세가지 의미가 있으며,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이를 통해 업이 생명의 본질로서 의지력임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무명·행·식 등으로 넘어가는 12연기에서의 식은 아뢰야식이며, 이 아뢰야식은 업종자를 저장하고 훈습하여 인연을 만나면 업이 현행하게 하는 윤회의 주체적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또한 태어나고 죽는 생사의 고리를 인연의 논리로 설명함으로써 윤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업은 윤회의 원인인 동시에 윤회의 주체이다. 윤회가 가능한 것은 업이 있기 때문이며, 업이 있는 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오온의 연속성에 의해 윤회는 계속된다. 따라서 윤회는 고정 불변하는 어느 한 주체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변화하면서 계속되는 것이다. 이를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業의 果報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
물질에는 한 물체가 만들어지고 일정시간 머물다가 파괴되며 결국 공(空)으로 돌아가는 성(成)·주(住)·괴(壞)·공(空)의 네 가지 모습이 있고, 육체에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生)·로(老)·병(病)·사(死)의 네 가지 모습이 있으며, 정신적으로는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 등 생각이 나타나고 그 생각이 지속하다가 그 생각이 변하고 없어지는 등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네 가지 모습이 있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처럼 변화하는 무상 속에서 영원한 진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가상인 무상에 속고 산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몸도 업력에 얽매여 윤회하는 도중임을 망각하여 신체상에 나타난 생로병사의 무상성을 달관하지 못한 채 윤회의 바퀴에 얽매여 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윤회의 세계는 실상을 모르는, 무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로, 번뇌망상에 따른 업으로 삼계와 육도를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반복하는 삶의 연속이다. 붓다는 이처럼 중생들이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고, 저기서 죽어 여기서 나는 괴로움의 모습을 마치 바퀴가 끊임없이 계속해서 도는 것과 같다하여 윤회라 표현했다. 초기경전에서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衆生들은 참 불상하다. 항상 어둠속에 있으면서 몸은 언제나 위험하고 약하다. 生이 있고 老가 있고 病이 있고 死가 있다. 그래서 몸은 모든 고통이 모여 있는 곳으로서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고 저기서 나서 여기서 죽는다. 이 괴로움 덩어리로 인하여 바퀴처럼 돌아 끝이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마땅히 이 괴로움의 원인을 밝게 알아 生과 老와 死를 없앨 수 있을까.
붓다는 죽음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죽음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그 길은 우리가 윤회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지혜와 그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이다. 요컨대 윤회설은 무아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중생들이 무지와 애욕으로 짓는 업을 통해 괴로움의 삶을 계속하는 것이다. 붓다는 중생들이 고통을 받는 원인을 오온설과 12연기설을 통해 규명하고자 했고, 우리는 이를 통해 무아의 실상을 알아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다.
Ⅲ. 고통의 원인
붓다는 윤회하는 사람들이 괴로움과 고통 속에 산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오온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오온과 자아를 착각하며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오온과 자아를 동일시하여 내(我)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욕망이 생기고 갈애와 집착이 생기며 그로부터 고통을 받게 된다. 따라서 붓다는 오온설을 통해 오온의 무상함을 알리고 오온에 대한 취착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음을 뜻한다.
- 오온설
오온은 개인 존재를 구성하는 5개의 집합인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하는데, 오온의 본성이 무상한 것임을 설한 것이 오온설이다. 오온을 선행연구에 바탕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색(色)은 모양 또는 색깔을 뜻한다. 색은 눈에 보이는 것을 포함하여 눈에 의해 지각되는지의 여부를 떠나 모든 물리적, 물리적 현상을 가리킨다. 색에는 사대(四大)와 사대조색(四大造色)이 있다. 사대조색은 사대로 만들어진 물질을 의미하며, 사람의 육체적인 몸은 사대, 즉 색으로 형성된다.
② 수(受)는 감각적 접촉에 의한 감성 또는 감수성이다. 수에는 일반적으로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 있다.
③ 상(想)은 어떠한 대상에 대한 개별적인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수가 신체적 감각이라면, 상은 마음의 작용이다. 상은 기본적으로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색상(色想)의 경우 색계에 대한 집착을 뜻하기 때문에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며, 무상에 대한 인식(無常想), 무아에 대한 인식(無我想), 부정함에 대한 인식(不淨想), 무욕에 대한 인식(無欲想), 멸에 대한 인식(滅想)의 경우 해탈에 도움이 되는 생각이기 때문에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④ 행(行)은 목적 지향적인 의지 또는 의도로, 몸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고(身行), 입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口行), 마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意行) 정신적 작용이다. 또한 행은 의도이므로 업과 관련되는데, 몸과 입과 마음의 배후에서 작용하여 업을 짓는 의지라고도 한다.
⑤ 식(識)은 대상을 구별하고 인식·판단하는 작용, 혹은 마음의 작용 전반을 총괄하는 주체적인 마음의 활동이다. 색온이 물리적인 현상인 반면, 수상행식은 모두 정신적 현상이다. 수상행이 각자에게 주어진 부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반하여, 식은 수상행의 기능을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하는데 있어 수상행과 식의 다름이 나타기에 식을 주체적인 마음의 활동이라고 한다.
무명에 가려진 중생들에 있어서 오온은 취착의 대상이다. 중생들은 무엇인가를 느끼면 그 무엇인가를 느끼는 존재는 ‘나일 것’이라고 미세하게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이 계속 반복됨에 따라 ‘나’라는 존재는 강력해지고 오온을 나로 동일시하며 ‘내가 있다’라는 관념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관념을 일러 ‘오취온(五取蘊)’ 혹은 ‘유신견(有身見)’이라 한다. 오온에 대한 취착에 의해서 오온과 자아를 동일시하여 유신견이 생기는 과정을 『Samyutta Nikay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범부는 색(rupa)을 자아(attan)로 보거나, 자아를 색을 지닌 자로 보거나, 자아 속에서 색을 보거나 또는 색 속에서 자아를 본다. ··· 이와 같이 그에게 유신견이 발생한다.”
여기에서 색은 오온의 예시이고, 사람들은 색에 대해서만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의 다른 구성 요소인 수·상·행·식에 대해서도 각각 자아와 동일시하며, 오온 전체에 대해서도 동일시한다. 오온 중에 내가 있다고 믿으면 그 나는 집착의 대상이 되고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Samyutta Nikaya』에서는 집착의 대상이 있음으로써 괴로움이 발생된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 늙음과 죽음을 일으키는 많은 종류의 괴로움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하냐’고 물었을 때 석존은 이러한 괴로움이야말로 ‘집착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고 집착의 대상을 원인으로 하고 집착의 대상을 발생으로 하고 집착의 대상을 바탕으로 한다. 집착의 대상이 있다면 늙음과 죽음이 있고 집착의 대상이 없다면 늙음과 죽음이 없다.’고 한다.
많은 중생들이 이처럼 오온에 취착하고 오온과 나를 동일시하여 내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집착하여 괴로움을 받으며 산다. 그렇다면 붓다는 중생들의 ‘내가 있다’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어떤 말을 했는지 살펴보자.
왜 너는 衆生(satta)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여 말하는가. 악마(mara)여! 너는 잘못된 見解를 가지고 있다. 있는 것은 단지 행(行)의 덩어리일 뿐이다. 여기에서 어떤 衆生도 발견되지 않는다. 마치 모든 부품들의 결합이 있을 때 수레라는 이름이 있듯이 여러 蘊들이 있을 때 衆生이 있다고 말한다.
수레라고 말할 수 없는 부품을 모아서 만든 것을 수레라고 부르듯 ‘나’라고 할 수 없는 오온이 모여 만들어진 것을 ‘나’라고 인식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수레를 해체하면 수레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는 것처럼, ‘나’라고 불리는 존재에서도 색·수·상·행·식이 해체되면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붓다는 이를 통해서 오온의 무상함을 드러내고 오온에 대한 취착을 놓음으로써 중생들의 오취온을 소멸하고자 했다.
또한 붓다는 다음과 같은 문답을 통해 오온의 무상·고·무아임을 자각하게 하였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色은 항상 하는가, 항상 하지 않는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항상 하지 않는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존자시여, 그러면 無常(anicca)하고, 괴로움이고, 변하는 법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것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 맞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受···, 想···, 行···, 識···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는 법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것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 맞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붓다가 오온의 무상함을 지적한 것은, 사람들이 오온이 상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온을 상주적인 자아와 동일시하여 취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착으로 인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던 오온이 변하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고통이 발생한다. 그렇기에 ‘나(我)’라고 하는 자아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상-고-무아’라는 오온의 실상을 알게 되면 오온에 대한 취착을 버리고 오온에 대한 욕망을 버림으로써 해탈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있다’는 관념을 놓고 오온의 실상을 바르게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앞서 살펴본 오온설을 통해 중생들이 오온에 취착하여 고통을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생들이 오온에 취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붓다는 12연기를 설함으로써 중생들이 오온에 취착하는 이유가 무명에 있다고 말한다. 무명에 가려있기에 바르게 보지 못하고 그로 인해 업을 짓는다. 궁극적으로 12연기는 무명을 멸하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오온의 실상을 바르게 볼 수 있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12연기설
연기는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란 뜻으로, 다른 것과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 것, 즉 ‘~에 연해서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는 갖가지 조건에 의해서 현상이 일어나는 원리이다. 모든 존재는 직접적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 원인인 ‘연(緣)’이 화합해서 생성된다. 그러므로 ‘연에 의해 생겨난다’는 의미에서 연기라고 하는 것이다.
연기법은 존재들의 관계성, 의존성, 인과성을 말하고 있다. 어떤 개체에 대해 살펴보면 그 사물이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인 인(因)과 조건인 연(緣)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스스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모든 조건과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따라서 만물이 무상(無常)할 수밖에 없음을 연기를 통해 알 수 있고, 우리의 존재가 상주하는 아(我)가 아니라 무아(無我)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기법은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자연을 막론하고 모든 존재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이다.
연기법을 인간의 실존에 비추어 설명한 것이 12연기이다. 12연기는 지혜가 가려진 무명으로 인해 인생이 윤회함을 가르친다. 생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중생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과 기억을 모아 오온을 형성하고 ‘나’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12연기는 오온의 성립 과정과 오온이 끊임없이 상속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오온이 증장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붓다는 12연기를 통해서 고(苦)의 발생과 소멸에 대해 통찰하고자 했다.
無明으로 말미암아 行이 있고, 行으로 말미암아 識이, 識으로 말미암아 名色이, 名色으로 말미암아 六入이, 六入으로 말미암아 觸이, 觸으로 말미암아 受가, 受로 말미암아 愛가, 愛로 말미암아 取가, 取로 말미암아 有가, 有로 말미암아 生이, 生을 말미암아 老·死·憂·悲·惱·苦가 생기며 모든 苦蘊이 생긴다.
이렇듯 12연기는 인간의 존재 발생 과정을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의 12단계로 설명함으로써 무명으로 인한 생사의 유전연기, 즉 고(苦)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다. 이 12연기의 각 내용을 선행연구에 기초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명(無明) –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 즉 연기(緣起)의 제반 원리에 대한 무지이다. 이는 실재 아닌 것 또는 실재성이 없는 것을 자기의 실체로 착각한 망상이다. 주어진 실재의 일시적 형체를 나(我)로 집착하여 생기거나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생긴다.
② 행(行) – 행은 행위를 뜻하며, 몸의 행(身行), 입의 행(口行), 뜻의 행(意行) 세 가지가 있다. 무지·무명을 연(緣)으로 해서 그릇된 신(身)·어(語)·의(意)의 삼업(三業)을 생기게 한다. 행은 그릇된 행위뿐만 아니라 그 행위의 여력으로서의 습관력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행은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작용이다.
③ 식(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식(意識) 이렇게 여섯 가지가 있다. 여기에서 식이란 감각적 지각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식작용(認識作用)을 의미한다.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판단의 주체’를 식이라 한다.
④ 명색(名色) – 명이란 느낌·상상·기억·닿임·생각이며, 색이란 사대(四大:地·水·火·風)와 그것으로 형성되는 것(四大所造色)이다. 즉, 명은 수(受)·상(想)·행(行)·식(識)의 정신적 요소이고, 색은 물질적 육체적 요소로, 명색은 존재를 의미한다.
⑤ 육입처(六入處) – 이른바 눈·귀·코·혀·몸·뜻의 감관이다. 즉 여섯 가지 인식 주관을 말한다. 색 내지 법의 육경이 들어오는 곳이다. 육처(六處)는 육근(六根)이라고도 말하는데, 근(根)은 능력의 의미로서 감각 및 지각의 능력을 말한다.
⑥ 촉(觸) – 촉이란 여섯 닿임의 몸이니, 눈·귀·코·혀·몸·뜻의 닿임이다. 즉 위의 여섯 가지 인식 주관이 각각의 인식 객관과 접촉하는 것이다. 경전의 설명에 의하면 육근과 육식이 조합하는 것이다. 단순히 육처가 육경(六境)에 접촉하는 현상은 아닌 것이다.
⑦ 수(受) – 느낌이란 이른바 세 가지 느낌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즉 위의 촉에 대한 감수작용(感受作用)을 말한다.
⑧ 애(愛) – 흔히 갈애(渴愛)로 표현되며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는 것과 같은 강렬한 욕구를 가리킨다. 기본적으로 눈·귀·코·혀·몸·뜻을 소연(所緣)으로 형상에 대한 갈애(眼愛), 소리에 대한 갈애(耳愛), 향기에 대한 갈애(鼻愛), 맛에 대한 갈애(舌愛), 감촉에 대한 갈애(身愛), 사물에 대한 갈애(意愛)가 있다. 또한 갈애(渴愛)는 욕심세계의 욕망의 몸(欲愛), 형상세계의 욕망의 몸(色愛), 무형세계의 욕망의 몸(無色愛)으로 셜명된다. 이는 유정(有情)들이 윤회하며 거주하는 세계인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와 대응관계를 이룬다.
⑨ 취(取) – 취는 욕취(欲取)·견취(見取)·계금취(戒禁取)·아어취(我語取)의 사취(四取)가 있고 실제 행동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욕취는 탐욕에 의한 취착의 행위, 견취는 인과 부정 등의 사견에 의한 취착의 행위, 계금취는 미신적 행위, 아어취는 실아 실법의 실체적 견해에 대한 취착의 행위를 가리킨다.
⑩ 유(有) – 이른바 세 가지 존재이다. 욕심 세계의 존재, 형상 세계의 존재, 무형세계의 존재이다. 유란 존재하는 것이고,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현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⑪ 생(生) – 생이란 어느 집에 태어나 갖가지 존재를 받아 오온을 얻고 여섯 감관을 받는 것이다. 즉 오온으로 형성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⑫ 노사(老死) – 늙음이란 중생들의 몸에서 이가 빠지고, 머리털이 새며, 기력이 쇠하고, 감관이 무르녹으며, 수명이 날로 줄어들어 본래의 정신이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중생들이 받은 몸의 온기가 없어지면서 다섯 친척(五親)이 오온의 몸을 버리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다.
붓다는 12연기를 통해서 존재를 상주하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상속되는 것, 다시 말해 존재를 계속해서 변화하는 무상(無常)으로 봤고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로 봤다. 하지만 무명에 가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我)’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노사(老死)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되고, 생사를 고통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무상과 무아를 모르는 무명과 그로 인한 갈애가 고의 원천이라는 것이고, 무명과 갈애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고는 계속해서 발생한다는 뜻이다.
붓다는 노사에 대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무엇부터 멸해야 하는지를 차례로 사유하였고, 무명에서부터 멸해야함을 통찰하였다. 이러한 통찰은 무명을 멸하여 차례로 12지가 멸하는 사유의 과정으로 이를 환멸연기라고 한다. 환멸연기는 오온이 상속되고 증장되는 연기의 과정을 단절하여 괴로움의 발생을 끊는데 큰 의미가 있으며, 그 사유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무명이 滅하면 행이 滅하고, 행이 滅하면 식이 滅하며, 식이 滅하면 명색이 滅하고, 명색이 滅하면 6입이 滅하며, 6입이 滅하면 촉이 滅하고, 촉이 滅하면 수가 滅하며, 수가 滅하면 애가 滅하고, 애가 滅하면 취가 滅하며, 취가 滅하면 유가 滅하고, 유가 滅하면 생이 滅하고, 생이 滅하면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함이 滅한다. 이와 같이 하나의 큰 괴로움은 스스로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2연기는 각 요소들간의 조건에 의해 존재가 발생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2연기가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인간의 죽음이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되며, 모든 존재는 무명에서 비롯된 망념이라는 것이다. 붓다는 12연기를 설함으로써 중생들에게 생사윤회의 괴로움은 무명으로 인하여 비롯되었고, 생과 사가 없는 무한한 생명 즉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팔정도에 따른 수행에 의하여 무명을 멸하는 데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12연기는 괴로움 속에 살고 있는 중생들이 고통의 원인이 사실에 대한 무명과 무지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갈애임을, 그리고 갈애마저도 무상·고·무아임을 알아차리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Ⅳ. 원불교 수행법
붓다는 12연기의 역관을 통해서 무명을 멸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이라는 팔정도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통찰적 지혜를 얻어 고통과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붓다의 팔정도가 아닌 통찰적 지혜를 얻고 실생활에서 그 지혜를 나툼으로써 현실에서 불국토를 이루고 낙원세계를 건설하고자하는 원불교에서는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번 장에서는 원불교에서 주장하는 수행법인 삼학이 무아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본 후 그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박중빈, 1891-1943) 역시 붓다처럼 모든 중생의 고통은 무명과 무지로 인한 집착과 갈애로부터 시작된다고 봤고, 고통을 치유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 팔조를 밝혔으며, 이를 통해 사람들 모두가 불보살이 될 수 있고 다시 없는 이상의 천국에서 낙원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소태산 대종사의 법을 이어 받은 정산종사(송규, 1900-1962)는 사람의 일 가운데 각자의 허물을 찾아 고치는 일이 제일 급선무가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허물은 부지중 습관상 외부에 나타나는 것으로 간단한 것도 있지만 내심을 속이는 일과 같이 깊숙이 자리 잡은 것도 있다. 이 허물을 발견하고 고치는 방법이 앞서 언급한 삼학이다.
그렇다면 삼학이 무엇이기에 고정된 관념과 틀을 발견하고 고치는 방법이라고 하는가. 삼학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이며 각 과목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신수양은 일원의 체성을 지키는 공부이다. 정신은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이며, 수양은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는 것이다. 즉, 정신은 우리 마음에 분별성과 주착심이 생기기 전의 상태이다. 따라서 정신수양은 우리 마음에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 하는 것으로써 망념을 닦고 진성을 기르는 공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나 물건, 사람을 대했을 때 그에 따른 감정이 일어나고, 그 감정이 일어나는지도 모른채 그 감정에 휩쓸려 언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감정이 사그라들면 ‘내가 화가 났구나’, ‘내가 짜증을 냈구나’ 등 과거의 일을 후회한다. 다음에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감정이 올라오고 그 감정에 휩쓸려 언행을 하게되며 또 다시 괴로워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경험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들이 굳어져서 인식의 정보와 대상을 일체화시킴으로써 고정된 관념을 갖게 되는데, 이것으로 인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괴로움을 생산한다.
이 괴로움의 악순환을 끊는데 필요한 것이 정신수양이다. 정신수양은 온전함을 챙기는 공부다. 이것은 어떠한 분별성과 주착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했다.’라는 생각도 놓은 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분별하고 그 분별에 집착된 것들을 하나씩 놓게 되면, 온전함을 찾게 되고 더불어 오온과 자신을 하나로 착각하는 무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리연구는 일원의 원리를 깨닫는 공부이다. 사리연구의 사(事)는 인간의 시·비·이·해(是非利害)를 말하고, 이(理)는 천조(天造)의 대소유무(大小有無)를 말하며, 연구는 사리를 연마하고 궁구하는 것을 뜻한다. 대소유무에서 대(大)는 우주 만유의 본체이며, 소(小)는 만상이 형형 색색으로 구별되어 있음을 말하며, 유무(有無)는 천지의 춘·하·추·동 사시 순환과, 풍·운·우·로·상·설(風雲雨露霜雪)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의 변태를 뜻한다. 즉, 사리 연구는 지혜를 연마하여 본원을 궁구하는 공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하거나 걱정할 뿐 타인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이는 드물다. 한 예로, 장례식장에서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하는 말이 “당신이 가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이다. 죽은 남편 걱정, 남은 자식 걱정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자신을 걱정한다. 이들에겐 몸을 이루고 있는 나와 나가 아닌 것이 확실히 다르게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편하고자 하고 내가 이익을 보고자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자신을 괴로움의 길로 안내한다.
나와 타인을 분별하고 구분하는데서 나오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리연구다. 사리연구는 바르게 생각하고 빠르게 판단하는 공부다. 온전함을 바탕으로 대소유무를 바르게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소유무를 바르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게 되면, 나와 타인은 크게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성품을 갖고 있는 둘이 아닌 존재이며, 작게는 개인의 성질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며, 이 세상에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생·로·병·사와 춘·하·추·동과 같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영원히 소유하고 싶은 욕심과 멀리하고 싶은 욕심에서부터 벗어나게 된다.
작업취사는 일원과 같이 원만한 실행을 하는 공부이다. 작업은 무슨 일에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을 작용하는 것이며, 취사는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것이다. 즉, 작업취사 공부는 중정을 취하고 사곡을 버리는 공부로서 정신수양과 사리연구 공부의 실효과를 얻는 공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심인줄 알면서도 그 욕심에 끌려 행동을 절제하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가 도박이다. 한번 승리하면 본전 이상의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도박을 한다. 또한 지금까지 잃은 것은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또 도박을 한다. 도박 말고도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언행의 취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잘못된 행동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불러오고 많은 사람들이 이로인해 괴로움에 빠진다.
언행을 잘못 실행함으로써 받는 괴로움에서부터 벗어나는데 필요한 것이 작업취사이다. 온전함과 바른 분석과 빠른 판단을 바탕으로 정의라고 판단되면 그 누가 만류해도 취하는 것이며, 불의라고 판단되면 옆에서 권장해도 죽어도 하지 않는 것이 버리는 공부이다. 이처럼 취사공부를 통해서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었던 죄업을 짓지 않게 되고, 그와 동시에 선업을 짓게 되어 괴로움에서 벗어나 복을 장만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삼학의 특징 중 하나는 병진(竝進)하는 것이다. 삼학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로 구분하여 볼 수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서로 떠날 수 없는 연관이 있어 동시에 작용한다. 따라서 소태산 대종사는 삼학을 고르게 닦아나가는 삼학병진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전으로 배울 때에는 삼학이 비록 과목은 각각 다르나, 실지로 공부를 해나가는 데에는 서로 떠날 수 없는 연관이 있어서 마치 쇠스랑의 세 발과도 같나니, 수양을 하는 데에도 연구·취사의 합력이 있어야 할 것이요, 연구를 하는 데에도 수양·취사의 합력이 있어야 할 것이요, 취사를 하는 데에도 수양·연구의 합력이 있어야 하나니라. 그러므로, 삼학을 병진하는 것은 서로 그 힘을 어울려 공부를 지체 없이 전진하게 하자는 것이며,…
또한 삼학 수행은 동·정간 수행으로 동할 때나 정할 때나 끊임없이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정전 표어 중 하나인 동정일여(動靜一如)에 드러나 있으며, 교리도에 동정간불리선(動靜間不離禪)이라 하여 언제 어디서든 온전한 정신을 사용하는 공부를 뜻한다. 소태산은 동과 정 사이에 계속하는 공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 도가(道家)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정할 때 공부에만 편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 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 한다 하여, 혹은 부모 처자를 이별하고 산중에 가서 일생을 지내며 혹은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떠내려가도 모르고 독서만 하였나니 이 어찌 원만한 공부법이라 하리요. 그러므로, 우리는 공부와 일을 둘로 보지 아니하고 공부를 잘하면 일이 잘되고 일을 잘하면 공부가 잘되어 동과 정 두 사이에 계속적으로 삼대력 얻는 법을 말하였나니 그대들은 이 동과 정에 간단이 없는 큰 공부에 힘쓸지어다.
즉, 원불교에서 말하는 삼학 수행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공부이며, 동할 때 공부와 정할 때 공부가 서로 도움이 되고 바탕이 되는 공부법이다. 정산종사는 이러한 특징을 저축 삼대력과 활용 삼대력이라 말했고, 원불교에서는 동정간불리선이 가능하도록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을 제정하여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원불교 수행법은 삼학을 병진하는 특성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수행법을 따라 끊임없이 계속 수행을 하게 되면 오온과 자아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며, 그와 동시에 일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이것을 바탕으로 영생의 복을 짓게 되어 괴로움에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 효과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드러날 것이며, 이생뿐 아니라 영생을 가져갈 수 있는 복과 혜를 장만할 수 있다. 또한 마음의 자유를 얻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업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Ⅴ. 결론
사람들은 누구나 즐거워하길 원하고 행복하길 바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하며 실체가 없는 것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는 것인데, 자신이 즐겁거나 좋아하는 상황이 계속 유지되기를 원하고, 지나가지 않기를 바라고, 자신이 괴롭거나 싫어하는 상황이 오면 그것을 피하고 싶고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은 자신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어김없이 다가오기에 늘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괴로워한다. 붓다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을 탐구했고 존재에 대한 통찰과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 즉 인식론적 전환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오온설과 12연기설을 통해 밝혔다. 또한 통찰의 지혜를 얻는 길과 악업을 놓고 선업을 지음으로써 상극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상생으로 가는 길로 팔정도를 밝힘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고자 했다.
고통의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붓다의 탐구는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가 오온에 대한 취착이며, 무명을 멸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삶을 불안과 걱정 초조 속에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존재에 대한 통찰과 인식론적 전환의 중요성을 일러주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황과 즐거워하는 상황이 오기를 바라고 그 상황이 유지되기를 바라며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존재가 본질적으로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각하여 즐거운 상황일 때는 그것에 너무 넘치지 말고 미래를 준비하며, 괴로운 상황일 때는 곧 지나가리라는 확신으로 좌절과 괴로움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인식의 전환이 되면 그에 바탕한 수행을 실천해야한다. 인식의 전환과 수행이 완전한 개별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어 서로 보완하고 진작시키는 관계에 있기 때이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통찰과 무상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수행은 반드시 해야한다. 깨달음과 수행이 서로를 진작시켜갈수록 신구의 삼업도 점점 짓지 않게 되고 무명과 집착, 갈애가 멸해지게 되어 마음의 자유, 해탈을 이루게 된다.
요컨대 붓다의 깨달음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현대인이 존재에 대한 통찰과 무상에 대한 깨침을 통해 인식론적 전환의 필요성을 일러주고 있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존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깨침과 더불어 그 깨침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수행법인 삼학수행을 통해 현실에서 낙원을 수용하고자 하였다. 삼학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맞물려 있어 동·정간에 끊임없이 수행하면, 참다운 낙을 수용할 수 있으며, 영원히 가져갈 복과 혜를 장만할 수 있으며, 마음의 자유를 얻어 괴로움의 세계인 윤회를 초월하여 거래에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붓다의 가르침을 한낱 지식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정으로 깨쳐 알아 자신의 삶에서 수행을 해 나갈 때에 가능한 것이며, 이렇게 했을 때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진정한 마음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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