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마음공부의 체계적 이해를 위한 소고
-유불선 삼교의 관점에서 본 마음구조와 수행방법 비교를 중심으로.
이혜완
Ⅰ. 머리말
Ⅱ. 유불선 삼교의 마음과 마음공부방법 1. 유교의 마음과 마음공부 2. 불교의 마음과 마음공부 3. 도교의 마음과 마음공부
Ⅲ. 마음의 구조 이해
Ⅳ. 원불교의 마음과 마음공부 1.『정전』일원상장에서 살펴본 마음 2. 원불교의 마음공부방법 3. 유불선 삼교와 원불교의 마음공부 비교
Ⅴ. 맺음말 |
Ⅰ. 머리말
원불교 전산 김주원 종법사는 원기104년(서기2019년)도 신년 법문으로 ‘마음을 잘 씁시다’라는 표어를 발표했다. 이어 ‘대종사님께서는 마음 잘 쓰는 길을 밝혀주셨다.’면서 마음 사용의 중요성 또한 이야기했다. 그가 인용한 것처럼 원불교의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는 ‘원불교에 와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하는 물음에 자답하기를 ‘모든 법의 주인이 되는 용심법을 부지런히 배워서’라고 할 만큼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공부’라는 표현은 1979년 원불교 사상 3집에 『원불교의 종교적 기능 고찰』에서 원불교의 종교적 기능은 「마음공부」라고 주장이 나오고, 이어서 10여 편의 관련 논문들이 거듭 발표되면서 ‘마음공부는 원불교 교화 정신의 표상’이며 ‘교화의 본질’로 원불교의 정신적 가르침을 가장 핵심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라고 강조되었다. 그 후부터 ‘마음공부’라는 단어가 ‘용심법’을 대신해서 일반화되어 가는 경향이 생겨났다.
마음공부의 정의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내창은 “‘마음공부’는 ⑴ 경계에 접하여, ⑵ 이 경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마음(객체적 자아)을 ⑶ 또 다른 마음(주체적 자아)이 지켜보면서, ⑷ 즉각적인 반응을 일단 멈추고(경계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성품(자성)에 비추어 ⑸ 경계에 반응하는 마음이 적절한지 대조해, ⑹ 경계를 원불교적 가르침에 맞게 활용하는 노력을 말한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객체적 자아를 지켜보는 ‘주체적 자아’나, 객체적 자아를 비추어 보는 ‘성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성품은 본연의 체’인데, 이것은 ‘모든 상대가 끊어져서 말로써 가히 이르지 못하며 사량으로써 가히 계교하지 못하며 명상으로써 가히 형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명상으로 이르지 못하는 그 성품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도 큰 과제를 받은 것만 같은데, 그런 성품에 비추어 마음을 잘 사용하기까지 하는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종종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허탈함에 빠지게 한다. 즉, 이 성품을 알지 못하면 마음에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생겼을 때에 정과 혜와 계를 세워야 하는 자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고, 진여의 본성을 드러내는 나를 모르는 채 좌선을 해야 하며, 기도를 올리는 주체나 그에 감응하는 대상을 깨닫지 못하고, 내 마음에 천의를 감동시킬 요소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기도를 해야 한다. 이러한 신앙과 수행은 일상성이나 무기에 빠지기 쉽다.
과거에 모든 교주(敎主)가 때를 따라 나오시어 인생의 행할 바를 가르쳐 왔으나 그 교화의 주체는 시대와 지역을 따라 서로 달랐나니, 비유하여 말하자면 같은 의학 가운데도 각기 전문 분야가 있는 것과 같나니라. 그러므로 불가(佛家)에서는 우주 만유의 형상 없는 것을 주체삼아서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 보응의 이치를 가르쳐 전미 개오(轉迷開悟)의 길을 주로 밝히셨고, 유가(儒家)에서는 우주 만유의 형상 있는 것을 주체삼아서 삼강·오륜과 인·의·예·지를 가르쳐 수·제·치·평(修齊治平)의 길을 주로 밝히셨으며, 선가(仙家)에서는 우주 자연의 도를 주체삼아서 양성(養性)하는 방법을 가르쳐 청정 무위(淸靜無爲)의 길을 주로 밝히셨나니, 이 세 가지 길이 그 주체는 비록 다를지라도 세상을 바르게 하고 생령을 이롭게 하는 것은 다 같은 것이니라. 그러나 과거에는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가 각각 그 분야만의 교화를 주로 하여 왔지마는, 앞으로는 그 일부만 가지고는 널리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는 이 모든 교리를 통합하여 수양·연구·취사의 일원화(一圓化)와 또는 영육 쌍전(靈肉雙全)·이사 병행(理事竝行) 등 방법으로 모든 과정을 정하였나니, 누구든지 이대로 잘 공부한다면 다만 삼교의 종지를 일관할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의 교리며 천하의 모든 법이 다 한 마음에 돌아와서 능히 사통오달의 큰 도를 얻게 되리라.
그러므로 필자는 우선 동양 사상의 큰 축인 유교․불교․도교에서 어떻게 마음을 바라보는지, 그 마음은 어떤 방법으로 닦아 가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원불교『정전』에서 드러나는 마음의 구조를 발견하고 유불선 삼교에서 바라보는 마음과 비교함으로써 마음공부의 기본인 마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꾀함과 동시에 원융회통한 종교로서의 원불교 교리의 진리성을 밝히고자 한다.
Ⅱ. 유불선 삼교의 마음과 마음공부
- 유교의 마음과 마음공부
대개 천지의 조화는 생생 무궁한 것이니, 가버린 자는 쉬고 다시 오는 자가 잇는다. 사람과 짐승과 풀과 나무, 천만가지 형상이 각기 성명으로 태어나는 것이 모두 하나의 태극(太極)에서 유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각기 하나의 리(理)를 구비해 있으며, 만물의 리는 다 같이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나왔으니,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나무라도 다 각기 하나의 태극을 가지고 있다. 천하의 성(性)밖에 다른 물건이 있을 수 없다.
동양의 존재론은 태극에서 음과 양이라는 상대적인 두 기가 생성된 것을 단일성이 다양성으로 진행되기 위한 근본 분열이라고 본다. 유교에서의 태극은 다양한 우주 만물을 생성시키는 단일한 근원을 지칭한다. 태극은 상대로 규정지을 수 없는 절대이며, 그것을 그것 아닌 것과 구분하는 경계가 없다는 점에서 무극이라고도 말한다. 태극으로부터의 근본 분열을 통해서 다양한 차이들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온갖 사물이 만들어지며 인간도 이에 따라서 특별한 기질과 형태가 갖추어진다. 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개체의 차별적 성질이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다. 이어 기의 산물인 개체 각자에 천으로부터 통일한 하나의 리가 부여된다. 천이 명으로서 부여한 리가 곧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성이며, 이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부른다.
개체를 형성하는 기(氣)는 태극으로부터 생한 우주의 전체 기중의 일부분의 취합이며, 따라서 그 부분의 기가 가지고 있는 차이에 따라 각 개체의 차이성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만물은 형이상의 리와 형이하의 기로 이루어져 있다. 기의 차이에 따라 개별화 된 리는 ‘분수지리(分殊之理)’로, 하나의 보편적 근원으로서 내재해 있는 리는 ‘리일지리(理一之理)’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처럼 만물이 모두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으므로 동일한 리를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존재하는 현실적 차이는 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한자경은 “맹자가 개체적 차이를 넘어서는 인간의 보편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 논하였으며, 송대 성리학에서 이 정신이 더욱 심화되어 인간을 넘어서는 일체 존재의 보편성을 하나의 태극 내지 하나의 천리의 내재로서 설명하였다”고 말한다. 이어 “유교가 우주 만물의 본체 내지 핵심을 천차만별의 차별상이 아니라 그 차별상 너머의 보편적인 성으로 보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개체의 성품에 보편적 근원으로서의 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해서 모든 개체가 그 리를 바로 자기 자신의 본성으로 자각하여 아는 것은 아니다. 본성이 있다는 것과 본성을 안다는 것은 분명 다르다. 본성을 본성이라고 자각하고 깨닫는 능력이 곧 허령불매한 마음이다. 그 마음 가운데에 리가 구족한 것이 곧 본성이다. 본성을 알 수 있는 것은 본성이 바로 그 마음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며, 그 본성이 사물에 감하여 움직이면 어떠한 감정으로 발현된다. 즉, 성(性)이 발하여 정(情)이 된다. 본연지성이 발하여 감정이 되면 측은지심, 수오지심, 겸양지심, 시비지심의 사단이라고 하며, 기질지성이 발하여 감정이 되면 희로애구애오욕의 칠정이 된다. 사단은 보편적 선한 본성이 발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감정을 따르는 것이 언제나 선한 것이지만, 칠정은 사적 감정이기 때문에 주변 상황에 따라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있게 된다. 이에 대해서 이황은 ‘사단의 발은 순수한 리이므로 불선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므로 선악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유교의 마음공부는 천리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두기 때문에 분수지리와 리일지리의 두 관점에서 시작된다. 먼저 각 개체의 차별적 특수성 안에서 각각의 분수지리를 분별하여 인식하며 관찰하는 외향적 공부는 격물치지의 도문학이다. 각각의 사물을 그 자체의 모습과 이치에 따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별하는 것으로써 세계 전체의 이치를 총괄적으로 이해하는 활연관통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격물치지는 세밀한 앎에 국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미진중함시방’이라는 말처럼 각 개체 안에 담겨 있는 천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공부이다.
다음은 기의 특수성이 아닌 마음 안에 통째로 주어진 보편적 리를 깨닫기 위해 하는 내향적 마음공부, 존덕성이 있다. 모든 개체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의 태극을 자각하는 공부이다. 존덕성의 마음공부는 마음 안에 감정들이 일어난 전후 공부에 따라서 방식이 두 가지로 나뉘는데 감정이 일어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상태에서 마음공부를 이발(已發) 시 공부라고 하고, 마음 안에 어떠한 분별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공부를 미발(未發) 시 공부라고 한다.
이발 시 공부의 근거는 인간에게 선택과 결정능력인 자율성으로써 의(意)가 있다는 것이다. 사물과의 접촉하는 순간 발한 감정은 도덕적으로 판단하기에 너무나 미미하다. 그 후에 의가 발하게 되는데, 이때야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내적으로 감지하면서 천리를 따를 것인지, 사적 욕망을 따를 것인지 선택할 기로에 서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의지의 결단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도덕적 의미의 선악이 성립하게 된다. 유교는 감정이나 의지의 작용 안에 이미 선과 악의 미세한 차이가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의 작은 움직임에 집중한다.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내적으로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기미(幾微)’라고 한다. 마음이 이미 발하였을 때 그러한 작은 움직임에 주목하고 기미를 관찰하는 공부가 이발 시의 ‘성찰’하는 마음공부이다. 기미에서의 작은 차이가 드러나 언어나 행동으로 전개되었을 때 큰 차이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미의 관찰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미발 시 공부는 적연부동의 마음 상태에서 절대와 무한의 태극을 내면에서 자각하여 그 탈개체적 보편성을 깨달음으로써 이 세상 모든 것이 나 아닌 것이 없다는 인(仁)을 체득하는 과정이다. 미발 공부는 마음이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는 등 의식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해야 하는 공부이다. 이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하는, 삼가고 두려운 마음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미발 공부를 ‘계신(戒愼)’, ‘공구(恐懼)’라고 한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미발 공부는 마음의 생성원리에 근거한다. 마음은 하나에 머물러 있지도 않고 한 생각이 쭉 이어지지도 않는다. 다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대상을 향한 마음은 시시각각 변화하므로 대상을 따라서 흩어진 마음, 산란한 마음, 대상에게 자신을 빼앗긴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방심(放心)이라고 한다. 이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구방심(求放心)이 필요해진다. 마음을 구한다는 것은 마음이 더 이상 대상을 좇아 산란하게 흩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곧 마음 안에 마음을 흩어지게 하는 분별적 대상들을 남겨놓지 않고 텅 비우는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 일상의 마음은 분별할 대상이 사라지면 동시에 의식도 사라짐으로써 잠들어버리고 만다. 마음 안에 떠오르는 ‘마음 대상’을 떠나 ‘마음 자체’를 구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 문제제기가 바로 미발 공부가 수행적 공부로서 성립하게 되는 지점이다. 분별적 의식 대상이 사라질 때 의식도 덩달아 꺼져 의식 불명으로 잠들지 말고 성성하게 깨어있어 불매를 유지하는 것이다. 퇴계는 미발 공부의 핵심을 마음을 오로지하여 자취를 없애는 ‘주일무적(主一無適)’과 마음을 수렴하여 하나의 물건도 용납하지 않는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 항상 성성하다는 ‘상성성(常惺惺)’으로 말한다.
미발 공부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분별차원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마음 심층이다. 이 마음 심층을 유교에서는 도(道)라고 부른다. 세계 속에서 살면서 그 안의 모든 상대적 사물들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세계에 편재된 도를 알고 있어야 한다. 분별 있는 자리 이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분별 없는 마음의 작용을 자각하기 위해 표층적인 의식 대상을 마음으로부터 덜어내 마음을 비우면서도 마음이 깨어 있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마음은 그 자체가 허령하여 어둡지 않다(虛靈不昧). 마음이 마음에 주어지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마음 자체의 허령함 때문이다. 이발 시에 보고 들어서 지각하는 것을 ‘견문지각’이라고 하고, 허령불매의 마음이 마음으로서 활동하는 그 작용을 ‘미발지각’ 또는 ‘허령지각’이라고 부른다. 허령지각은 성품이 감정으로 발하기 전인 미발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활동성이다. 따라서 이미 대상과 접촉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이발에서의 마음 활동과는 구분된다.
이처럼 미발공부는 분별 없는 마음에서 성성함을 유지함으로써 마음 심체의 활동을 미발지각으로 자각하고자 하는 공부이다. 바꾸어 말하면 미발지각은 공부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각하여 알아지는 것이다. 이미 세계에 편재되어 있는 도, 잃어버린 자신의 심층 마음, 마음 자체의 활동성, 허령불매의 본체를 확인하기 위한 공부가 바로 미발공부이다.
- 불교의 마음과 마음공부
불교는 마음(心)을 떠난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현상세계와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를 마음이 그린 가상으로 간주한다. 모든 현상 세계가 각자의 마음이 그린 것이라면, 그 마음은 각자의 마음이면서 동시에 모두 하나의 마음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각자의 마음 심층은 개체의 개별성과 차이성을 넘어서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마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마음을 원효는 ‘일심’이라고 부른다. 불생불멸하며 상대가 끊어지고 분별이 없는 하나의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참된 존재라는 의미에서 ‘진여’라고도 한다. 일심은 세계를 그려내고 세계는 그 일심에 의지해 존재한다. 일체유심조는 이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불생불멸의 진여는 망념에 의해서 자신의 본성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생(生)하기도 하고 멸(滅)하기도 하는 경계상을 만들어낸다. 생멸상을 그려내게 되는 기본 망념은 바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불각(不覺)이다. 불각은 곧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무명이다. 본래 모든 차별상을 떠난 불생불멸의 마음이 이 무명으로 인해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려낸 상이 무명업상이다. 불생불멸의 진여가 무명으로 인해 움직이면서 생멸상을 그려내게 된다는 것은 능견상과 경계상으로 이원화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상이 그려지면 자아와 세계로 실체화되고 집착하는 식의 활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에 따라 전개되는 마음과 생멸상에 따라 전개되는 마음이 둘이 아닌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진여심과 생멸심 혹은 중생심은 서로를 여의지 않는 하나이다. 이 논리의 근거는 중생 누구나 이미 일심으로 존재하며, 누구나 일심의 자각을 갖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일심법에 의하면 두 문이 있는데, 무엇이 그 둘인가? 첫째는 심진여문이고, 둘째는 심생멸문이니, 이 두 문이 모두 각각 일체의 법을 총괄하고 있다. 무슨 의미인가? 이 두 문이 서로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일심의 자각을 이미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본래적 각성이라는 의미에서 ‘본각(本覺)’이라고 한다. 본각은 곧 마음이 신령스럽게 자기 본성을 자각하여 아는 ‘성자신해(性自神解)’다. 진여심과 생멸심을 포괄하는 일심에 대하여 원효가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일심의 자각성이다. 우리 일상의 마음에서 생멸상이 모두 사라지면 남겨지는 것은 텅 빈 허공뿐이다. 그런데 진여라 불리는 이 허공은 추상적인 빈 공간, 무정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둘이 없는 하나, 일체 제법의 실상인 하나, 모든 차이를 포괄하는 무차별자, 모든 유한한 경계를 넘어선 무경계의 무한자를 뜻한다.
원효가 일심으로써 일체 존재의 근원을 초월적 하나로 밝힌다면, 지눌은 본성의 자각과 함께 실현하는 실천수행론을 이야기한다. 불교는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청정한 본성의 마음을 청정심이라고 하며, 마음의 체(體)라고도 이른다. 본체로서의 청정한 마음의 활동성은 마음의 용(用)이다. 마음의 작용은 주어진 인연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인연에서 탐심이 생기고, 싫어하는 경계에서 진심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런 마음의 활동은 인연에 따라 대상에 응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라는 의미에서 ‘수연응용(隨緣應用)’이라고 한다. 또한 마음이 본래 청정한 것이라면 그 청정한 ‘체’뿐만 아니라 마음의 모든 작용까지도 청정한 본성의 실현으로 볼 수 있다. 본성은 행위와 작용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므로 작용 자체가 곧 본성이라는 ‘작용시성(作用是性)’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전제에서 일상적인 모든 활동은 불성이 실현된 작용이기 때문에, 모든 순간 모든 행동이 다 수행이며 선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혜능의 제자인 신회는 마음의 작용 중에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는 수연응용 이외에 다른 작용에 주목한다. 인연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마음의 근저에서 마음의 본성 자체로부터 발하는 마음의 본래적인 활용을 발견하여 ‘자성본용(自性本用)’이라고 이름 붙인다. 마음의 자성본용에 입각해야 비로소 수연응용도 가능해진다. 이러한 마음의 본래적인 깨어 있음을 마음의 본래적 각성으로 파악하여 ‘지(知)’, 다시 이를 신령한 지라는 의미로 ‘영지(靈知)’라고 부르게 된다. 마음작용으로부터 마음의 본성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곧 마음의 수연응용에서부터 마음의 자성본용으로 주의를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 이때의 마음은 분별이 없고 경계가 없어서 마음 자체의 밝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밝음은 ‘공적영지’라고 칭해지며, 그것은 곧 원효가 주장한 일심의 ‘성자신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불교에서 마음공부는 12지로 이어지는 연기의 순환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생에 지은 업(無明, 行)의 결과로 그 업보를 담은 식(識)을 가지고 현생에 몸을 받는다. 명색(名色)이 육입처(六入)로 받아들여져 식과 촉(觸)하게 되면 어떠한 느낌(受)이 생긴다. 이 느낌은 좋은 느낌(樂受), 괴로운 느낌(苦受), 좋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로 나뉘는데, 이런 느낌을 가지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 갈애(愛)와 집착(取)을 일으킨다. 이 집착으로 인해 현생에 또 다른 업이 생성되고, 이 업의 과보로써 유(有)를 형성하여 내생의 생(生)과 노사(老死)가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연기의 순환고리에서 해탈로 나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현재의 생에서 지난 업의 결과인 업보로서 존재하되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업력을 약화시켜나가는 것이다.
<그림 1>
새로운 조업은 12지 연기 중 수에서 애로 넘어가는 그 자리에서 발생한다. 수까지는 지난 업의 수동적인 보인 데 반해, 그에 이어지는 애와 취는 새로운 업을 짓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오온의 집합으로 존재하게 된 우리는 이미 지난 업의 과보로서 즐겁고 괴로운 느낌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인과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자율성’이다. 어떠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과 그 느낌에 이어서 갈애에 끌려 집착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게 다르다. 범부와 수행자의 차이는 ‘촉-수-애-취’를 끊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의 자율성을 알아차리고, 그 자율성으로 인과의 순환 고리를 약화시켜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심해탈의 공부법이다.
그 방법으로는 사념처 수행이 있는데, 몸의 느낌과 마음 등을 관찰하여(거리두기) 번뇌 망상의 고리를 벗어나고자 한 수행법이다.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을 구분하기 위해 느낌을 중심으로 몸과 마음을 주시하는 것이 각각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이며, 마지막 법념처는 그렇게 탐진 번뇌가 멎은 상태에서 비로소 참된 지혜인 불법을 얻는 단계이다. 사념처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구분 | 관찰 대상 | 관찰 과정 |
신념처 | 몸의 느낌 | |
수념처 | 느낌 | 신수(고락)과 심수(탐진)의 구분 |
심념처 | 마음 | 탐진 번뇌의 관찰 |
법념처 | 법 | 불법의 관찰 |
<표 1>
연기의 순환고리에서 해탈로 나아가는 두 가지 방법 중 두 번째는 무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12지 연기에서 보면 모든 업의 근본원인은 무명이다. 무명을 밝히기 위해서는 인식의 체계와 마음 심층의 활동성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를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맛을 보면서 깨어 있다. 색이나 형태, 맛이나 향기 등 다양한 성질을 느끼는 마음의 활동을 우리는 ‘감각’이라고 한다. 이는 안, 이, 비, 설, 신의 다섯 감각 기관인 5근에서 색, 성, 향, 미, 촉의 다섯 감각 대상인 5경과 접하면서 발생하며 ‘전5식(前五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마음의 활동은 감각작용만으로 그치지 않고, 느껴진 각각의 감각내용들을 정리하고 종합하여 한 사물의 다양한 속성으로 인지하는 지각활동과 대상들을 비교하여 판단하는 사유활동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지각과 판단의 사유기관은 제6근인 의근이며, 의근의 사유대상은 제6경인 법경이다. 의근과 법경이 접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활동을 ‘제6의식’이라고 부른다. 의근은 구체적인 개별적 감각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하여 인식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제6의식을 우리의 마음 활동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는 마음의 활동을 제6의식과 동일시하지 않으며, 전5식이나 제6의식보다 더 심층적인 마음 활동을 논한다. 제6의식은 의근이 법경을 인식하는 대상의식인데, 우리는 의식의 대상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대상을 의식하는 자신에 대해서도 안다. 이처럼 의(意) 자신을 아는 식을 제6의식 다음의 식이라는 의미에서 ‘제7말나식’이라고 부른다. 제7말나식은 나를 세계 속 일부분으로서의 나, 경계 지어진 나로 자각하는 자아식이며 여기에 아상, 아애, 아만 등 일체 아집이 자리 잡고 있다.
나아가 불교에서는 제7말나식보다 더 심층의 마음 작용을 발견하여 ‘제8아뢰야식’이라고 이름 붙인다. 아뢰야식 내에 함장되어 있던 잠재적 종자들은 인연이 닿으면 구체화되고 현실화된다. 이러한 종자의 현실화를 ‘아뢰야식의 전변’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불교는 마음 바깥의 객관적 실재로 간주되던 자아나 세계를 그보다 더 심층의 마음 작용인 제8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로 간주한다. 표층 의식 활동의 전제로 설정하는 ‘존재 자체’를 그보다 더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마음의 변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 심층(아뢰야식)의 활동은 무경계의 것이기 때문에 경계를 통하여 유무를 확인하는 과정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마음 심층의 활동이 표층 의식에서 그대로 포착되지 못하고 가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에 가리게 되는 까닭이다. 무명으로 인해 마음은 자신을 세계를 형성하는 아뢰야식으로 자각하지 못한다.
불교적 시각으로 보면 유근신과 기세간은 다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이다. 아뢰야식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마음의 심층이기에 보편적 심, 하나의 존재, 하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 불교에서는 이것을 바탕으로 마음 심층의 활동성이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불성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표층 의식은 자기 신체를 중심으로 ‘나(我)’라고 하는 경계에 매여 있으므로 자타, 주객의 이분법적 분별을 일으킨다. 불교가 본 수행의 목적은 표층 의식에 머물지 않고 마음 심층의 활동을 자각하려는 것이다. 이분법적인 표층 의식의 활동을 멈추고 심층의 마음 활동을 스스로 자각함으로써 아집과 법집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집착했던 ‘나’와 ‘법’이 아뢰야식의 변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통하여 12지 연기의 첫 항인 무명을 벗어나고자 하는 공부가 혜해탈의 공부법이다.
그 방법으로는 적성등지법이 있는데, 지눌은 “바깥 경계를 취하지 않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비추어 보”는 공부라고 정의하고 있다. 적적한 가운데 성성하게 깨어있고,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을 여의지 않되 “취하고 버린다는 생각도 없게” 유지한다. 이러는 가운데 마음을 발견하고 마음의 활동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 도교의 마음과 마음공부
노장의 인간관은 주역과 맥을 같이한다. 천지가 분화하기 전 형이상학적 실체가 도, 태극이며 그로부터 형이하의 천지와 개별 사물들이 형성된다. 이와 같이 도가는 만물을 기의 산물로 이해한다. 무형의 기가 음양으로 나뉘고 오행으로 분화되면서 서로 구분되는 성질들로 질화(質化)되고, 그런 기들이 취합하여 구체적 형태로 형화(形化)되면서 개체가 형성된다. 그런데 개체를 형성하는 기는 고정되고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한다.
저것은 이것에서 비롯되고 이것은 또한 저것으로 인한 것이다. 저것과 이것이 상대적 생성의 관계에 있다. 생이 있으면 사가 있고 사가 있으면 생이 있다. 가(可)가 있으면 불가(不可)가 있고 불가가 있으면 가가 있다. 시(是)로 인해 비(非)가 있고 비로 인해 시가 있다.
저것으로부터 이것이 있게 되고 이것으로부터 저것이 있게 된다는 말은 존재론적 상생의 근거가 된다. 경계의 유동으로 인해 일체 사물이 서로 상대적인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을 장자는 ‘방생지설(方生之說)’이라고 한다. 일체 사물은 서로 상호 의존적 관계가 된다. 일체의 순환은 원을 그리게 되고, 장자는 이 과정을 ‘환(環)’이라고 칭한다.
상대적인 관계에서는 외적 차이를 기준으로 각 개체를 나눈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는 관계라고 가정해 보면 개체 안에 개체 아닌 것을 포함하고 있어야 이런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완전히 차이가 있는 상태에서는 존재의 바탕이 되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존재론적 대대(待對)를 성립시키는 ‘외적 차이’가 각 개체의 ‘내적 차이’로 간주되면, 각 개체가 가지는 시비나 미추의 분별적 경계는 단지 표층에서 유동하는 임시적 경계로 남는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심층은 개체 안에 시비와 미추 등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내포하는 경계 너머의 존재이다. 그것은 무한한 변화와 생성을 발생시키지만, 그 자체는 일체의 변화를 넘어서고 일체의 규정을 넘어선 존재이다. 개체와 개체 아닌 것을 모두 포함하는 경계 너머의 존재이지만, 변화하는 ‘환’을 순환시키는 힘이 바로 ‘환중(環中)’이다. 정리하면 도교의 관점에서 현상 세계 만물은 기의 이동과 취합에 따라 개체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데, 유한한 개체적 몸인 ‘성형(成形)’이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 그 형에 국한된 개체적인 사적 마음인 ‘성심(成心)’이 작동하게 된다. 성형과 성심은 다 유동하는 기의 산물이므로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환중을 얻는 자는 성형과 성심의 상대성을 벗어나 무형 무심인 절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처럼 상대적인 현상 세계인 ‘환’으로부터 ‘환중’을 얻게 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환중은 마음 표층의 시비분별을 무화시키는 분별 없는 하나이다. 마음 심층의 하나는 음양 오행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기, 개체적 형태로 질화되고 형화되기 이전의 순수한 무형의 원기라고 할 수 있다. 환중을 지향하는 수행의 의식은 심층의 하나에 주목하는 무분별적이며 근원적인 사고로 나아간다. 사적인 몸과 마음의 경계를 벗어나 절대의 환중을 얻는 방법은 심층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현상적이고 감각적인 차별성에만 주목하는 분별지는 소지(小知), 차별성을 넘어 근원으로 복귀한 사유는 대지(大知)라고 불린다. 표층의 차이에 주목하는 소지는 심층 무분별에서 발하는 밝음을 가리고, 분별적 언어는 큰 지혜의 도(道)를 가로막는다.
도는 무엇에 가려져 진위가 있고, 말은 무엇에 가려져 시비가 있는가?
도는 어디로 갔기에 있지 않고, 말은 어디에 있기에 그럴 수 없는가?
도는 작은 분별에 가려지고, 말은 허황된 말에 가려진다.
무분별의 근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표층적인 분별을 덜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노자는 무분별의 경지를 무엇인가를 얻고 더해서 이르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고 비움으로써 이르는 것임을 강조한다. 분별을 덜어낼수록 근원에 다가가 도를 얻게 되므로 오히려 그 자체에서 발하는 밝음이 더해진다. 분별적 지식이나 욕망을 덜어내어 하나의 근원으로 복귀하는 것을 ‘허기심(虛其心)’이라고 하였으며, 장자는 분별적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망아(忘我)’, ‘상아(喪我)’라고도 칭하였다. 허기심으로서 환중이 바로 일체의 상대적 환을 그려내는 주체이다. 현상적인 차별성에 주목하는 신체적 감각이나 의식적 사려 분별의 판단 작용을 정지하고, 마음을 비워 마음 본래의 허령함만을 남기는 것이 마음의 재계이며 도교의 마음 공부법이다.
Ⅲ. 마음의 구조 이해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유교, 불교, 도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의식 표층으로 한정시킨 것이 아니라 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마음 심층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에서 맹자는 개체적 차이를 넘어서는 인간의 보편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 논하였다. 송대 성리학에서는 이 정신을 더욱 심화시켜 일체 존재의 보편성을 하나의 태극, 하나의 천리의 내재로서 설명하였다. 이는 유교가 우주 만물의 본체를 천차만별의 차별상이 아니라 그 차별상 너머의 보편적 성(본연지성)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기를 따라서 형성되는 개체를 넘어 보편적 근원으로 내재되어 있는 리일지리의 리를 강조한다.
불교에서는 표층 의식을 구체적 감각 내용인 자상(自相)과 제6의식이 형성하는 공상(共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제8아뢰야식은 제6의식이나 제7말나식의 분별과 집착의 업이 남긴 업력을 종자의 형태로 함장하고 있다. 그 중 보편적인 공종자가 변화하면 하나의 공통적인 기세간이 현현하고, 개별적인 불공종자가 변화하면 각 개체의 유근신으로 현현하게 된다. 즉 공상의 관념 세계뿐 아니라, 자상의 물질 세계까지도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제6의식의 차원에서 마음 바깥의 객관적 실재로 간주되던 자아나 세계를 그보다 더 심층의 마음 작용인 제8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로 본다. 의식 활동의 전제로 설정하던 자상까지도 마음의 변현으로 보는 관점은 불교가 마음을 더욱 더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도교에서 또한 마음 심층을 환중, 무분별지, 대지(大知) 등으로 설명한다. 하나의 심층으로부터 서로 다른 a, b, c로의 분화가 일어나면 일상적인 사유로는 외적 차이에만 주목하여 각각이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a, b, c로 분화되기 이전의 근거인 마음 심층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개체 각각을 분별하는 순간 각 개체의 근거인 심층으로부터 분리를 시켜 표층적 현상으로만 각 개체를 간주하게 된다. 결국 참된 진리의 인식을 방해하고 일체의 현상적 시비 분별을 넘어선 밝음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그림 2>
의식 표층에서 보면 일체 만물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각각의 존재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우주 만물과 구분되고 타인과 대립해 있으며, 만물 중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한다. 각각의 부분은 서로 시공간적으로 구분되는 위치에서 개별자로 존재한다. 유교는 기의 산물로서 천차만별의 차별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하며, 불교에서는 표층 분별을 따라 유근신인 자아에 집착하고, 기세간의 세계에 집착하여 아집과 법집을 일으킨다고 본다. 또한 도교에서는 존재론적 대대를 성립시키는 외적차이라고 인지한다. 그런데 이것은 개체를 의식 표층에서 본 것일 뿐이다. 이것을 마음 심층으로 내려가면서 그 깊이를 따라 측면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림 3>
심층을 망각하고 세상을 보면 일체 만물은 표층에서 차별적으로 존재한다. 공통의 기반은 모두 사라지고 개별자들은 허공에 부유하며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삶을 도모한다. 개별자로서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나 이외의 타인은 오로지 나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며, 비교와 경쟁의 대상으로의 의미만 남게 된다. 그러나 <그림 3>와 같이 a와 b와 c는 표층으로 드러난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마음 심층에서 보면 서로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차별적이고 상대적인 개체를 다르지 않게 설정하는 그 빈자리가 불이(不二)의 심층이다.
심층은 표층의 현상에 의해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표층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에너지 장이고 정보의 장이다. 심층의 하나는 표층적 이원화 내지 다양화가 일어나기 이전, 음과 양, 밝음과 어둠, 기쁨과 슬픔이 나뉘기 이전,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존재로 분별되기 이전, 에너지가 여럿으로 나뉘기 이전, 우주의 빅뱅이 일어나기 이전, 그 모든 분별 이전의 절대의 하나,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유교의 태극이나 리, 불교의 제8아뢰야식, 도교의 환중과 도가 곧 분별 있는 표층 의식을 넘어선 마음 심층의 자리이다. 유불선 삼교에서는 이 마음 심층의 자리를 밝힘으로써 모든 개체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너와 나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성을 자각했을 때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바라보게 되며, 전쟁과 반목을 넘어서 진정한 평화공존의 세상, 대동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Ⅳ. 원불교의 마음과 마음공부
진리적 종교를 표방하는 원불교는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을 법신불 일원상으로 설정했다. 법신불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心體)를 나타낸 것’으로 ‘광대 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한다는 표현으로 보아 앞서 살펴본 마음 심층의 자리와 그 작용을 상징으로 드러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로써 우리의 현실 생활과 연락시키는 표준을 삼았으며, 또는 신앙과 수행의 두 문을 밝히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서 원불교의 경전인『정전』에서 부처님의 심체인 일원상의 진리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신앙과 수행의 방법은 어떻게 연관지어질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정전』일원상장에서 살펴본 마음
『정전』교의편 「일원상의 진리」에는 일원의 다양한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먼저 살펴볼 속성은 ‘진공의 체’이다.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
‘진공’이라는 것은 진리의 텅 비어있는 모습을 말하며 ‘본래 자리’, ‘바탕 자리’라고도 불린다. 우리는 A라는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분별을 사용한다. 아주 비슷하게 생긴 두 물건을 보았을 때 ‘똑같이 생겨서 구분을 못하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A와 A 아닌 것의 분별이 있은 후에야 각자 다른 것으로 인식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진공의 자리는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는 자리이며, 크고 작고, 있고 없고의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자리이다.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자리이므로 오고 가는 것도 없고 선과 악의 구분도 없다. 이러한 절대의 자리는 ‘상대적 언어로 개념화되거나 표현될 수 없으며’, 보통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자리라는 의미에서 “언어도단의 입정처”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렇듯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던 공간에서 신령스러운 빛이 나타나 다시 모든 분별을 비춘다. 티끌하나 없이 맑은 물에 흔들림 마저 없이 고요하면 그 물 아래에 있는 것이 환하게 보이는 것과 같다. 이때 나타나는 일원의 속성이 ‘묘유’이다.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일원의 체는 일체의 상대적 차별을 넘어선 무상의 진공체이나, 그렇다고 하여 물리적 진공이나 무기의 공 같은 것이 아니라, 공적영지의 광명을 포함한 신묘한 공이다. 다시 말하면 공적한 가운데 영지가 내재해 있어 묘유의 조화작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현상의 세계는 진리의 묘하게 있는 작용에 불과하다. 공적영지의 광명은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분별한다. 선과 악에 차별을 두고, 언어와 형상이 두렷하고 분명하게 드러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풀어보면 문득 ‘진공’과 ‘묘유’가 서로 다른 각각의 두 상태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게 된다. 노권용은 논문에서 “「①일체의 차별이 끊어진 진공의 체성에서 → ②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 ③일체의 차별현상이라는 묘유의 조화가 나타나고 … (중략) … 이를 자칫 생성론적 의미로 이해하여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는 표현도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다만 진리의 모습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진공’과 ‘묘유’라는 언어로 나누었을 뿐 그 두 모습은 둘이 아니다(不二). 즉, 텅 비어있는 모습만 이야기하는 것은 진리를 바르게 보았다고 말할 수 없고, 묘하게 있는 모습만 이야기하는 것도 바른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공과 묘유가 끝없이 넓은 공간, 시작도 알 수 없이 긴 시간 속에 운행하면서 원인을 만들고 그 원인으로 인해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 일원상의 진리이다.
그런데 이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다. 일원이 우주 만유의 본원이라는 것은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 현상, 이치의 근원이라는 의미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일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밤하늘에 뜬 달이 강이나 호수에 비추면 물 위에는 달과 같은 모양의 상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물 위에 있는 달은 달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참 달은 아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 또한 그렇다. 일원을 본원으로 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맺힌 상, 이것을 현상이라고 부른다.
일원상의 진리에 따르면 만유의 본성인 일원은 모든 중생들의 본성이다. 이것은 진리가 모든 개체에 내재되었음을 의미한다. 부처와 중생은 진리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 본래 성품을 회복했는지 아닌지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부터 다른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정산 종사는 “일원상을 신앙하자는 것은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이며, 자기의 성품이 곧 법인 것을 확인하자는 것이요”라는 표현으로 일체 중생의 성품이 일원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일원상의 대의를 “생멸이 없고 거래가 없고 분별 주착이 없는 우리의 본래 마음을 형용한 것”이라고 밝히며 일원상과 우리 마음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 수고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일원상의 진리는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진공에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차별상이 드러나 현상세계를 만들었으며, 우리의 마음에서도 이 진리의 조화가 운용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 원불교의 마음공부방법
『정전』「일원상 진리」에서는 인간의 심층마음을 의미하는 “제불제성의 심인”, “일체 중생의 본성”은 없는 자리의 특성을 갖는 동시에 있는 자리의 특성 또한 갖는다. 원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분별없는 차원과 분별 있는 두 가지 차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한 마음공부가 제시된다. 이 두 가지 마음의 한 가지 차원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혹은 다른 한 가지 측면을 간과할 때, 마음공부와 원불교 수행에 있어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불교에서 정기 훈련 과목으로 제시하고 있는 “염불·좌선·경전·강연·회화·의두·성리·정기 일기·상시일기·주의·조행”의 11과목 가운데 주의, 조행의 실천 그리고 상시 일기를 통해 “당일의 유무념 처리와 학습 상황과 계문에 범과 유무를 기재 시킴”의 마음공부는 반드시 “원적 무별(圓寂無別)한 진경”과 “순일한 근본 정신을 양성하는” 좌선과 “자심(自心) 미타를 발견하여 자성 극락에 돌아가기를 목적”하고 “우리의 자성은 원래 청정하여 죄복이 돈공하고 고뇌가 영멸”하여 “변함이 없는 자성 극락”을 회복하는 염불과 같은 마음공부와 반드시 병행이 되어야 한다.
참회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참(事懺)이요 하나는 이참(理懺)이라, 사참이라 함은 성심으로 삼보(三寶)전에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을 이름이요, 이참이라 함은 원래에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감을 이름이니 사람이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를 쌍수하여 밖으로 모든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자신의 탐·진·치를 제거할지니라.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한 수행은 「참회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참회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각각 ‘사참’과 ‘이참’이다. 분별 있는 현실 세계에서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하는 마음공부는 반드시 “죄성이 공한 자리” 즉,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하기 위하여 분별없는 자리를 깨우치는 마음공부가 바탕되어 있어야 한다.
분별 없는 경지만을 강조하고 분별 있는 자리를 간과할 때의 문제점은「무시선법」과「참회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무시선법」에서는 성품을 ‘진공’과 ‘묘유’의 두 측면으로 설명하면서, “성품이 한갓 공적에만 그친 것이 아니니, 만일 무정물과 같은 선을 닦을진대 이것은 성품을 단련하는 선공부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참회문」에서는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도 “자행자지”와 “무애행(無碍行)”을 경고하고 있다.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왕왕이 출현하여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하고 날로 자행 자지를 행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무애행(無碍行)이라 하여 불문(佛門)을 더럽히는 일이 없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성의 분별 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은 모르는 연고라, 어찌 유무 초월의 참 도를 알았다 하리요.
- 유불선 삼교와 원불교의 마음공부 비교
유불선 삼교에서는 마음의 구조를 완전히 다르지도 않으면서 하나도 아닌 두 가지 마음(不一不異)으로 보고 있다. 유교의 ‘미발지심’의 마음의 허령한 측면과 마음이 이미 발한 상태인 ‘이발지심’, 불교의『대승기신론』의 ‘일심’의 두 가지 양상인 ‘진여심’과 ‘생멸심’ 그리고 도교의 일체의 상대를 넘어선 절대와 초월을 의미하는 ‘환중(環中)’과 ‘환’은 서로 일대일로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에서도 또한 마음의 구조를 유무초월의 생사문으로서 ‘분별없는 자리’와 공적영지를 따라 나타는 ‘분별있는 자리’로 설명할 수 있다.
마음공부도 이 마음의 구조를 기반으로 한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유교는 삼가고 두려운 마음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계신(戒愼)’, ‘공구(恐懼)’의 미발공부와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천리를 관찰하는 ‘격물치지’, 보편적인 리를 깨닫기 위한 ‘존덕성’의 이발공부가 있다. 불교는 윤회를 벗어나기 위한 두 방법으로써 마음의 자율성을 알아차려서 ‘촉-수-애-취’로 넘어가는 인과의 고리를 약화시키고자 하는 ‘심해탈’ 공부와 불성을 자각하여 무명을 걷어내고자 하는 ‘혜해탈’ 공부가 있다. 도교는 분별과 욕망을 덜어내어 하나의 근원으로 복귀하는 ‘허기심’ 공부를 바탕으로 선천의 상태를 회복하고자 한다.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좌선, 염불 등을 통하여 분별이 끊어진 본래 ‘성품자리’를 깨닫는 공부와 상시일기, 주의, 조행 등을 통하여 분별 있는 자리에서 ‘주의심을 놓지 않고 챙기고 또 챙기는’ 공부가 강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Ⅴ. 맺음말
마음공부는 원불교의 정신적 가르침을 가장 핵심적으로 드러낸 표현으로 강조되고 있다.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경계에 따라 반응하는 마음인 ‘객체적 자아’와 그 마음을 지켜보는 마음인 ‘주체적 자아’, 경계에 따라 반응하는 마음을 비추어 볼 ‘성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주체적 자아나 성품의 자리는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자리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유의 방식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기에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즉, 마음공부에 앞서 마음의 구조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으며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동양 사상의 큰 축인 유교, 불교, 도교를 살펴보았다.
유교에서는 일체 존재의 보편성을 하나의 태극, 하나의 천리의 내재로서 설명하였다. 우주 만물의 본체를 천차만별의 차별상이 아니라 그 차별상 너머의 보편적 성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기를 따라서 형성되는 개체를 넘어 보편적 근원으로 내재되어 있는 리를 강조한다. 불교는 제6의식의 차원에서 마음 바깥의 객관적 실재로 간주되던 자아나 세계를 그보다 더 심층의 마음 작용인 제8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로 본다. 의식 활동의 전제로 설정하던 자상까지도 마음의 변현으로 보는 관점은 불교가 마음을 더욱 더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도교에서 또한 하나의 심층인 환중으로부터 개체가 분화된다고 말하며, 각 개체를 분별하는 것은 참된 진리의 인식을 방해하고 일체의 현상적 시비 분별을 넘어선 밝음을 가리게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원불교에서는 인간의 심층마음을 의미하는 일원의 자리가 “제불제성의 심인”, “일체 중생의 본성”은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 등 “없는 자리”의 특성을 갖는 동시에 “있는 자리”, 즉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한” 특성도 갖는다. 이는 유불선 삼교에서의 마음의 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불교의『대승기신론』의 ‘일심’의 두 가지 양상인 ‘진여심’과 ‘생멸심’, 유교의 ‘미발지심’의 마음의 허령한 측면과 마음이 이미 발한 상태인 ‘이발지심’ 그리고 도교의 일체의 상대를 넘어선 절대와 초월을 의미하는 ‘환중(環中)’과 ‘환’에 일대일로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혹자의 비판처럼 원불교의 교리가 당시 유행하던 수행법들을 짜맞추었다고 보는 관점에는 오류가 있다.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이자 수행의 표본인 법신불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를 나타낸 것이다. 천지 만물의 본원인 법신불 일원상은 유교에서는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 도교에서는 환중, 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라는 다른 개념과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모든 종교도 그 근본되는 원리는 본래 하나”이기에 일원상을 비롯한 삼교의 교리도 최후 구경에는 다 이 일원의 진리에 돌아간다. 다만 진리적 맥락에서 마음의 구조는 동일하게 밝히었으나, 교화의 방편으로 각각의 분야를 선택해서 발전시켜왔다고 본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의 관점에서는 이제 “앞으로의 세상에는 그 일부만 가지고는 널리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므로 모든 교리를 통합하여 수양·연구·취사의 일원화(一圓化)와 또는 영육 쌍전·이사 병행 등 방법으로 모든 과정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비판은 “삼교의 종지를 일관할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의 교리며 천하의 모든 법이 다” 돌아올 수 있는 “한 마음”을 알지 못하는 데에서 온 오류라고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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