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학과

Wonkwang University

윤회관과 수행의 목적(양자훈)

교학대학 원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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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관과 수행의 목적(양자훈)

목 차

 

 

Ⅰ. 서론 ——————————– 4

 

Ⅱ. 윤회사상의 이해 ————————– 4

  1. 윤회의 의미
  2. 우파니샤드의 윤회
  3. 불교의 윤회

 

Ⅲ. 원불교의 윤회관 ————————–16

 

Ⅳ. 원불교 수행의 목적 ————————22

 

Ⅴ. 결론 ——————————– 23

 

참고문헌 ——————————–25

 

 

 

 

 

 

 

 

 

 

 

 

. 서론

 

죽음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없는 운명과도 같으며 필멸의 유정물로서 당연한 이치이다. 윤회사상은 그러한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이해하고 극복하고자 한 인류의 철학적 시도이며 죽음을 수용하고 극복할 수 있는 사상의 토대가 된다. 윤회는 업사상과 결합하여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결과들의 윤리적 성격을 부여했으며 운명론을 거부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관통하는 업의 인과 논리를 정착시켰다. 따라서 인간은 윤회를 통하여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당위성을 획득한 것이다. 그 노력의 결과는 ‘윤회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해탈사상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윤회관은 결국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인간의 생사를 벗어나는 해탈을 추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윤회사상은 해탈을 통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탐구인 것이다. 윤회의 개념은 업설과 결합되어 고대인도 우파니샤드시대로부터 전해져왔다. 불교 또한 이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교리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같은 윤회사상의 뿌리를 지닌 우파니샤드와 불교의 윤회관은 윤회의 주체 문제와 해탈의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로 인해 두 사상이 추구하는 방향성이 달라지고 해탈의 개념이 다르게 나타난다. 우파니샤드의 경우 유아윤회를 중심으로 범아일여를 주장하고 불교의 경우 무아윤회를 중심으로 열반을 주장한다. 하나는 천신계인 브라만과의 합일을 목적으로 하고 하나는 모든 업을 소멸하여 윤회를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원불교의 수행의 목적은 어떠한가, 원불교는 교조인 소태산의 천명 아래 불교를 바탕하여 교문을 열었다. 따라서 많은 부분에 있어 불교의 교리를 수용하고 있다. 윤회관에 있어서도 불교의 삼세육도윤회를 바탕으로 한 윤회관을 보인다. 따라서 수행은 불교와 동일하게 업장소멸을 통한 윤회해탈을 전제로 행해진다고 볼 수 있다. 생사해탈을 통해 모든 집착과 업장을 소멸하여 성불제중으로 가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하지만 「천도품」의 ‘소소영영한 영식’과 ‘영혼’ 등의 언급을 근거로 원불교의 윤회관이 우파니샤드의 인도철학과 더 가깝다는 해석의 선행연구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천도품」의 내용과 몇 구절의 해석만으로 원불교를 인도 우파니샤드의 윤회와 같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따라서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해 우파니샤드와 불교의 윤회관에 대해 알아보고 원불교의 윤회관이 어느 사상과 더 맞닿아 있으며, 원불교 수행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

 

. 윤회사상의 이해

 

1. 윤회의 의미

 

윤회라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한 인간이 죽은 후 그가 전생에 행한 행위[業, karman]에 따라 결정된 새로운 모습으로 지상에 다시 오는 것이다. 모든 행위가 반드시 상응하는 결과를 불러오고 그것은 인과 원리의 바탕이 된다. 윤회사상은 일반적으로 인도인들의 독특한 발상에서 시작된 사상적 흐름이다. 輪廻, 어원을 살피면 산스크리트어 ‘saṃsāra’로 ‘saṃ’과 ‘sāra’라는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saṃ’은 ‘함께’라는 의미이고, ‘sāra’는 어원 ‘sr’에서 유래된 것으로 ’달리다, 빨리 움직이다. 흐르다. 건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saṃsāra’는 일반적으로 윤회, 재생, 재화신, 전생 등으로 번역된다. 윤회사상은 재생사상,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karman)사상 그리고 두 요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해탈 사상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윤회의 원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이 생에서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남아 있는 업을 가지고 이 지상이나 다른 곳에 가게 되는데 이 때 남아 있는 업이 다음 생을 결정짓는다.

윤회의 개념은 업설과 결합되어 고대인도 우파니샤드시대로부터 끊임없이 베단타를 통하여 전해졌다. B·C 5C경 인도의 육사외도라고 불리는 여러 자유사상가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이 윤회설을 주장하였으며 불교 또한 이 윤회사상과 업설을 중심으로 교리가 전개되었다. 결국 윤회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필사(必死)의 운명에 대한 삶의 수용 자세이며 윤리적으로 업에 의한 윤리적인 행위를 촉구함으로써 삶을 바르게 인도하며 또한 운명론적 삶에서 인간 스스로의 진취성을 고취시키는 사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학자들은 업과 윤회의 사상이 이론적으로 성립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으로서 첫째 인과설, 둘째 인과를 연결시키는 힘, 셋째 인과 사이의 인격적 동일성, 넷째 자업자득을 제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바로 인과 사이의 인격적 동일성이다. 윤회와 업의 주체는 윤회사상에서 있어서 주요한 요소이며 이것으로 인해 윤회관의 흐름이 달라진다.

그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우파니샤드 철학을 중심으로 한 유아윤회와 불교 철학을 중심으로 한 무아윤회이다. 두 사상은 아뜨만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 부정으로 인해 갈리게 되는데, 인간의 死後에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아 다음 생애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입장은 공통된 모습이다. 다만 그 윤회의 주체에 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윤회사상에서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탈, 열반에 있어서 다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2. 우파니샤드의 윤회

 

인도에서 윤회사상이 실질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가장 오래된『우파니샤드』에서 윤회사상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그것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5화2도설(五火二道設)이라고 말할 수 있다. 5화설은 인간이 사후에 화장되면 연기가 되어 달에 들어가 비가 되고 땅에 내려와서 식물의 뿌리에 흡수되어 음식으로써 인간에게 먹혀져 정자가 되고, 후에 모태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5단계의 생명 변화를 말한다. 이도설은 사람이 죽고 나서 가게 되는 두 가지의 길을 말하는데, 천도와 조도가 그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되고 화장된 시신은 연기가 되어 올라가는데,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알고 브라만에 대하여 신심을 갖으며 고행과 명상을 한 사람들은 천신계로 올라간다. 이것을 천도라고 한다. 그리고 가르침을 모른 채 제사와 공덕, 보시, 선행 등을 쌓은 사람들은 조령계(祖靈界, 조상의 영이 사는 계층)에 올라가는데, 이것을 조도라고 한다. 그들은 공덕이 소진하면 그들은 각자 업에 따라 인간계로 내려오게 된다고 보았다. 이는 세련된 윤회설이 확립되기 직전의 것으로 우파니샤드에서 윤회사상의 가장 근간이 된 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후 업사상과 함께 윤회사상은 더욱 진보를 이룬다.

이러한 윤회사상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은 크게 아뜨만과 카르만 그리고 브라만이다. 아뜨만은 윤회의 주체가 되고 카르만은 윤회를 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마지막으로 브라만은 아뜨만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먼저 아트만이란 생의 호흡, 즉 ‘바람’을 가리킨다. 어근(조사후 기재) an(호흡하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간주한다. 호흡에 어원을 두고 있는 만큼 인체의 생기, 생명, 정수, 활력 등의 의미와 연관된다. 인간의 죽음과 관련하여 인간의 생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호흡이다.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방금 전까지 온전히 활동하던 육체가 갑자기 기능을 정지했을 때 아직도 따듯한 체온을 유지하고 있는 육신의 기능이 정지가 된 이유를 호흡의 유무에서 찾았고 그런 생각들은 숨과 함께 보이지 않는 영혼 같은 것이 인간 사후에 육체를 빠져나가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라 간주했다.

우파니샤드 이전의 베다, 브라만 시대의 아뜨만에 대한 시점은 바람이나 제사 혹은 제사의 결과에서 생긴 존재를 의미했다. 따라서 그것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고 제사의 결과가 다하면 소멸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 오면서 영혼, ‘자아’라는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한다. 아트만은 실체적이고 영속적인 성질을 가진 개체의 영혼이라는 것이다. 또한 아뜨만은 존재들의 내부에 있으면서 그들을 살도록 하는 존재이다. 『찬도가 우파니샤드』에서는 “그것에 의해서 모든 것은 산다. 그것은 유일한 실재(實在).”라 하였고『에이타래야 우파니샤드』에서는 아트만이 최초의 존재이며 만물의 창조자라고 말한다. 우파니샤드에서 아뜨만은 개인의 개별적인 영혼이면서도 만물의 근원 실재이며 창조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러면서 궁극의 실재인 브라만과 연결된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아뜨만은 브라만에서부터 파생되어진 개체의 영혼이며 이것은 불멸하여 파괴되지 않고 끊임없이 윤회하는 윤회의 주체인 것이다.

여기서 윤회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있는데 그것은 카르만(業, karman)이다. 업은 동사 어근 ‘kr'(행하다, 만들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본래의 의미는 ’행위‘인데 베다, 브라흐마 시절에는 제사의 행위로 쓰여 왔다. 그러다가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인과의 토대가 되는 윤리적인 행위의 의미를 가지게 됐다. 제사라는 특수 행위에서 보편적 인간의 모든 행위라는 의미로 뜻이 확장되었고 그러한 의미 속에는 인간의 삶은 제사나 전능한 존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상을 갖도록 하였다. 업사상에서 또 짚어야 할 것은 ‘의도’이다. 다음은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의 인용구이다.

 

“그(죽은 사람의 영혼)는 行한 대로 되고 행동한 대로 된다. 선행자는 복을 받고 惡행자는 화를 당한다. 선업에 의하여 선과를 받고, 악업에 의하여 악과가 생긴다. 또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뜨만은 욕망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욕망에 따라서 의도가 생긴다. 그는 의도한 바의 업을 행한다. 그는 자기가 행한 바의 업을 거두어들인다.”

 

이처럼 우파니샤드의 시대에는 선인선과, 악인악과에 대한 개념을 찾아볼 수 있고 업에서 결정적 요소가 되는 것이 의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의도로 인해 업을 짓고 그 업을 따라 윤회가 계속된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 속에서 아뜨만은 계속해서 새로운 육체와 결합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윤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죽음에 관한 관점은 중요한 부분이다. 베다에서는 해탈이란 ‘일찍 죽지 않는 것’이었고 ‘브라마나’에서는 ‘저승에서 다시 죽지 않는 것’, 달리 표현하면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사를 지냄으로써 얻을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우파니샤드의 출현과 함께 해탈의 의미가 바뀌었다. 해탈이란 ‘윤회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때부터 윤회의 해방은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뜨만-브라만의 실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는 효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아직 이 시대에서 브라마나 시대의 제사의식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탈에 있어서도 두 가지의 해탈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는 제사를 통한 해탈이고 다른 하나는 까르만과 윤회설이 결부된 해탈이다. 이것들은 구원을 위한 새로운 경지로서 개체적인 영혼인 아뜨만과 우주적 영혼인 브라만의 만남 또는 두 실체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이 범아일여이다.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태초에 오직 브라만이 홀로 존재했다. 어느 순간 브라만은 분화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은 브라만에서 나왔다. 따라서 브라만은 우주의 본체이며 아뜨만은 거기서 떨어져 나온 개체이다. 아뜨만은 궁극적으로 브라만으로 돌아간다. 아뜨만은 만물의 본체인 브라만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니 본질적으로 브라만과 동일하다. 처음에 언급한 해탈이 베다 시대의 제사와 관련된 해탈이라면 다른 하나는 오로지 앎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다.

불가지적인 브라만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방법이 아닌 오직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인데 자신의 내부의 아뜨만을 앎으로서 브라만을 알 수 있다. 『찬도가 우파니샤드』에서는 진흙과 구리를 통해서 설명을 하는데 한 덩이의 진흙을 알면 모든 진흙을 아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설명을 한다. 브라만과 아뜨만이 동일한 성질을 지니기에 아뜨만을 앎으로서 브라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적인 존재인 브라만이 아뜨만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순간 아뜨만과 브라만이 혼연일체가 된다. 즉 범아일여가 되는 극적인 정신 상태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트만의 윤리학적 측면인 喜(ānanda)에 관한 것이다. 喜는 아트만과 브라만이 합일할 때 얻는 즐거움이다. 喜의 정점에는 범아일여에서 나오는 喜가 있다. 이것은 단지 해탈의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트만과 브라만의 본성이다. 아트만·브라만과 喜의 동일성을 깨달을 때 우파니샤드의 수행자는 아트만·브라만·喜와 합일하여 喜를 누리고 해탈을 얻게 된다.

그런데 우파니샤드에서 喜와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있다. 그것은 욕망(kāma)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욕망을 금기시지하지 않는다.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아트만-브라만은 욕망으로 만들어진 자이다. 또한 욕망은 욕망의 아뜨만으로서 브라만과 동일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喜와 욕망은 모두 아뜨만과 브라만의 속성이다. 욕망이 창조와 성취를 위한 행위라면, 喜는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서의 상태이다. 『타이트리야 우파니샤드』에서 “(喜로 만들어진) 아트만은 브라만이다. 그가 ‘나는 많은 것을 만들고 싶다’라고 욕망하였을 때, 모든 것은 창조되었다.”라는 구절을 통해 욕망과 喜에 대한 관점을 알 수 있다. 창조자인 브라만과 피조물인 모든 것은 동일하다. 따라서 욕망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것은 곧 喜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것은 범아일여의 경지가 喜 브라만으로서 즐거움을 얻고 해탈하는 것과 같다. 또한 『찬도가 우파니샤드』에서는 “아뜨만과 브라만을 욕망해야 한다. 그를 알기를 욕망해야 한다.”라고 하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우파니샤드의 수행자는 브라만과의 합일을 욕망함으로써 브라만과 합일이 된다.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해탈을 원하는 사람은 범아일여를 추구한다. 범아일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오직 아트만·브라만을 향한 욕망을 간직해야 한다. 다음은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의 구절이다.

 

“욕망을 지닌 사람은(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윤회한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사람은(윤회하지 않는다). 욕망이 없는 사람, 욕망을 끊은 사람, 모든 욕망을 얻은 사람, 오직 아뜨만을 욕망하는 사람은(윤회하지 않는다). 그는 브라만이다. 그는 브라만과 합일한다. 심장에 머무는 모든 욕망에서 벗어날 때 필멸의 인간은 불멸자가 되고, 브라만이 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오직 범아일여를 추구하는 욕망을 지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욕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최종에는 모든 욕망을 얻는 방법이 된다. 처음에는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라 하지만 결국은 세속적 욕망을 포함한 모든 욕망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는 범아일여를 이룬 사람은 ‘모든 욕망을 얻는다.’라 한다. 따라서 喜는 세속적 욕망을 포함한 모든 욕망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상위 단계의 喜는 하위 단계의 喜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파니샤드에서는 욕망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우파니샤드에서도 세속적 욕망의 성취에 대하여 가르친다.

또한『찬도가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브라만을 명상하는 사람은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포함한 모든 욕망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한 욕망 중에는 자손번영과 재물증식과 무병장수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욕망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힌두인들이 가지는 관습과 관련이 있다. 첫째로는 일생을 4단계로 나누는 관습이고 둘째로는 제사의무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사람의 일생을 4단계로 나누는데 그 중 앞선 3단계의 시기에서는 욕망에 대해 자유롭다가 출가수행자 시기가 되어서 비로소 무욕을 행하게 된다. 이때 출가수행자가 무욕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우파니샤드 안에서 오직 출가수행자만이 제사의 의무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재가자와 삼림수행자는 제사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재물이 필요하다. 우파니샤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세속적 욕망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와 브라마나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베다와 브라마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욕망에 있어서 이러한 면모를 보인다. 앞서 해탈의 방법으로 제시된 두 가지 방법 또한 이러한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제사를 통해 인드라를 비롯한 천신들이 사는 세상을 지향하는 것과 브라만을 앎으로써 최고의 천신인 브라만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차이점은 존재하나 해탈에 관하여 불멸에 대한 것과 욕망에 대한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정리하면 우파니샤드의 윤회관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윤회의 주체에 있어서 우파니샤드의 윤회관은 아뜨만이란 개별적 자아를 상정하여 아뜨만이 주체가 되어 윤회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뜨만-브라만으로부터 태어난 지바아트만(命我; 생명을 지닌 아트만)이 개인의 몸속에 머물면서 생명을 유지하다가 죽은 후에 육체를 떠나 새로운 육체를 따라 윤회한다. 이 윤회는 범아일여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며 범아일여를 알지 못하면 분리된 개체 속의 영혼으로 머물고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아뜨만은 유일한 실재이며 불멸이다’라는 것이다. 아뜨만은 카르만에 의해 윤회하지만 카르만은 아뜨만의 성질을 바꿀 수는 없다.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아뜨만은 선행에 의해서 커지지도 않고 악행에 의해서 작아지지도 않는다. …카르만은 아뜨만을 커지게 할 수도 없고 작아지게 할 수도 없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아뜨만은 카르만에 의해 윤회하지만 불멸로서 범아일여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윤회한다.

둘째는 욕망에 대하여 우파니샤드의 윤회관은 절대의 욕망을 상정하여 긍정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에서 욕망은 ‘욕망의 아뜨만’으로서 브라만과 동일시된다. 뿐만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로 간주된다. 우파니샤드의 喜론은 그것들의 바탕이 된다.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는 아트만-브라만이 욕망에 의하여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욕망을 브라만-아트만의 속성으로 보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수행자는 오직 오직 ‘나는 아트만-브라만이다.’라고 명상하고 욕망함으로써 범아일여의 경지에 도달 할 수 있다. 무욕을 추구하지만 최종적으로 범아일여에 대한 욕망은 간직해야 한다. 또한 우파니샤드의 수행자는 앞서 우파니샤드의 윤회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처음에는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지만 결국은 세속적 욕망을 포함한 모든 욕망을 성취한다. 이것은 베다, 브라마나에서 계승된 제사 전통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 브라마나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마지막은 우파니샤드의 해탈은 아뜨만과 브라만의 합일을 통한 범아일여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베다, 브라마나 시대의 전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모순적으로 해탈에 있어서 두 가지의 방법을 제시한다. 그 중 하나는 제사를 통해 천계로 올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브라만과 합일하여 불멸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을 대하는 힌두인들의 방식에 기원하는데 힌두인들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윤회관을 발달시켰기 때문에 윤회를 벗어난다는 것, 즉 해탈이라는 것은 다시 죽지 않는 것이며 영원한 삶을 획득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해탈 모두 윤회에서 벗어나서 불멸의 삶을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베다와 브라마나 전통의 해탈은 인드라를 비롯한 다수의 천신들이 있는 세계를 지향하고 우파니샤드는 유일한 최고의 천신인 브라만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반면 불교의 윤회관은 우파니샤드와는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 불교 자체가 인도에서 시작된 만큼 윤회관에 대한 전반적인 형태는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윤회의 주체에 관한 문제, 윤회를 하게 만드는 업과 욕망의 문제 그리고 윤회를 벗어나 해탈로 접어드는 방식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확연히 다른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같은 윤회사상의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두 윤회관이 많은 유사점을 지닐 것 같으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지금부터 불교의 윤회관에 대해 알아보고 불교와 우파니샤드의 윤회가 어떤 부분에서 다른지 알아보고자 한다.

 

3. 불교의 윤회

불교의 윤회에 대한 관점은 우파니샤드와는 다르나 윤회 자체가 인도 힌두이즘 철학에서 시작된 만큼 윤회사상 전반은 우파니샤드의 윤회관을 수용하였다. 다만 붓다를 통해 새로운 해석과 접근이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윤회관에서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아 혹은 영혼 같은 윤회의 주체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관은 윤회의 주체로서 고정된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잡아함경』(335경)에서는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라고 분명하게 불교윤회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불교의 윤회의 핵심적인 요소는 두 가지이다. 바로 윤회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되는 업과 緣起한 실체인 오온, 무아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인간을 구성하고 있던 오온이 그 일시적인 만남을 청산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五蘊이란 蘊, 즉 skandha이다. ‘모임[集合, 積集]’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리하면 ‘다섯 요소의 모임’이란 의미로 色이라는 육체적인 하나의 요소와 受想行識이라는 네 가지 정신적인 요소의 모임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에서 존재를 표현하는 단어의 지칭이다. 『잡아함경』에서 “존재란 무엇인가. 이른바 五蘊이다. 五蘊이란 무엇인가. 色受想行識이다. 이것을 존재라 한다.”라고 하는 구절을 통해서도 불교에서는 오온을 인간 존재의 실상으로 봤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오온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수레바퀴에 비유한다. “수레바퀴의 여러 재목들이 모인 것을 사람들이 수레라 하는 것처럼 여러가지 요소가 인연으로 모인 것을 임시로 인간 존재라 한다.” 여러 요소들이 모여서 수레를 이룰 때 수레가 존재하는 것이지 이 요소들과 별도로 수레가 존재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다섯 가지의 요소가 모였을 때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루어지지만 그것들이 흩어지면 인간의 존재라고 할 것이 없게 된다. 따라서 육체적인 요소인 色은 地水火風 4대로 흩어지고 정신적인 요소 受想行識은 육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역시 없어진다. 오직 남는 것은 그가 생전에 지은 행위인 업뿐이다. 그리고 그 업을 따라 인간은 삼계와 육도를 통해서 윤회한다. 하지만 이와 같이 되었을 때 윤회의 주체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인간의 실체가 연기한 오온(假我)이라고 한다면 업을 상속받고 윤회를 지속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서 그것을 업이라고 이야기 한다. 『잡아함경』에서는 “업과 과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작자는 주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주체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에서 바라보는 윤회의 원인은 바로 업이다. 업을 짓기 때문에 중생은 윤회한다. 또한 업을 짓는 것은 오온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윳따 니카야』(Saṃyutta Nikāya)에서는 “범부는 色受想行識 때문에 윤회한다.”라고 말했다. 범부는 “오온을 자아로 생각하고, 자아를 오온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고 자아 속에 오온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오온 속에 자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범부는 무아, 무상의 정법을 모르고, 오온을 상주적인 자아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윤회한다. 즉, 윤회의 원인은 바로 假我를 상주적인 자아로 바라보는 무명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업과 과보의 일시적 무상한 주체는 있으나 업의 상주적 절대적 주체는 없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불교에서는 업 자체, 즉 업의 힘을 통해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힘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비유로서 설명된다. 『나비선구경』에서 나가세나는 이러한 설명을 한다. “이 명(名, 정신)과 이 색(色, 육체)을 가지고 현재의 생에서 선과 악을 짓습니다. 그런 다음(그것으로 인해) 다음 생(生)에 태어납니다.” 또한 초기경전에서는 이것을 자주 등잔불에 비유해서 설명하는데 다음과 같다.

 

“등잔불은 기름과 심지를 인연하여 불이 붙는데 거기에 때때로 기름을 더하고 심지를 갈아주면 그 등불은 언제나 밝고 성하게 붙어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기름과 심지는 업에, 그리고 등불은 ‘존재’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업이 남아 있는 한 ‘존재’는 계속된다. 마치 그림자와 심지가 있는 한 등불이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장아함경』에서는 우유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비유하면 우유와 같다. 우유는 변하여 낙(酪, 진한유즙)이 되고, 낙은 생소(生酥, 버터)가 되고, 생소는 숙소(熟酥, 정제된 버터)가 되고, 숙소는 제호(醍醐, 요구르트)가 된다”

 

우유는 우유에서 낙으로, 낙에서 생소로, 생소에서 숙소로, 숙소에서 제호로 변하면서 계속한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한 변화에서 다른 변화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낙은 더 이상 우유가 아니다. 우유는 더 이상 제호가 아니다. 이들 사이에 동일성은 없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존재한다. 서로 상의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동일한 조건을 갖춘다고 해서 다른 것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존재도 마찬가지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주체 같은 것은 없지만 생은 계속되고, 한 생에서 만들어진 업은 다른 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업에 대한 해석이다. 업의 일반적인 의미는 행위이지만, 불교에서는 업의 본질을 思(思, 의도)라고 파악한다. 이 같은 파악은 업의 본질을 思에서 찾은 것이라고 해석되며, 이 점에서 불교의 업론은 일반적으로 결과론으로 보기 보다는 동기론으로 보아야적절하다. 붓다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부러 지은 업이면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받거나 후세에서 받는다고 나는 말한다.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그것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업이란 무엇인가. 업이란 의도라고 나는 단언한다. 왜냐하면 의도[心意]에 의해서 사람들이 몸으로나 언어로나 마음으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업이라는 것은 의도에 의해서 그 업의 성질이 결정되며 그를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이다. 업론은 선인선과와 악인악과라는 윤리적인 법칙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업은 윤회와 전생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행위의 가치를 평가하고 바람직한 행위를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현세의 자신의 삶이 과거세에 지은 업들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현세의 삶에 있어서 수동적이고 낙망적인 태도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업이 이루어진 뒤에 반드시 그 결과가 초래된다고 하여도 이미 결정된 업에 대해서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定業이라 하여도 업을 짓는 사람의 노력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어느 정도 변경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업의 결과를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중아함경』에서는 소금물의 비유로써 설명한다.

 

“소금 한 덩어리를 작은 그릇의 물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같은 양의 소금을 갠지스 강에 던져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 않는다.”

 

이처럼 어떤 업에 다른 업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것은 상쇄작용이 아니라 선업의 세력이 악업보다 크게 되면 외부로 좋은 것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운명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이것은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수행을 통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탈에 대한 당위성을 제공한다.

중생은 貪嗔痴라는 인간의 번뇌에 의해서 끊임없이 업을 짓고 그 업에 의하여 삼계 육도를 계속해서 윤회하는 존재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삶을 苦로 바라봤다. 붓다의 출가 자체가 괴로움의 해결에서 시작됐다는 걸 상기 시킨다면 一切皆苦라는 불교적 관점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고통은 인간 존재에 대한 無明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 무상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이다. 그 苦는 무명에서 나온 집착에 기인한다. 불교의 윤회관은 집착과 무명에서 벗어나 괴로움을 극복하고 해탈을 얻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하와스뚜』에서는 붓다가 “나는 단지 괴로움과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것만을 가르친다.”라고 설하기도 했다. 월폴라 라훌라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이들 5요소의 집합체, 즉 5온은 괴로움 그 자체이다. 이 5온의 배후에 있으면서 괴로움을 느끼는 다른‘존재’또는 ‘자아’는 없다. …생각의 배후에 생각하는 자는 없다. 생각 그 자체가 ‘생각하는 자’이다.”라고 한다. 인간의 존재, 오온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괴로움 자체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수행을 통해 벗어나야 하는 상태로 인식했다. 중생은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해탈이란 표현보다는 열반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불교의 모든 교리는 결국 이 열반으로 초점이 맞춰져있다. 붓다는 이것을 “모든 바닷물은 오직 한 가지 맛, 즉 짠맛이다. 나의 가르침 역시 오직 한 가지 맛, 즉 열반 맛이다.”라고 표현한다. 열반(涅槃)은 ‘nirvāṇa’의 음역이다. ‘바람이 불다’라는 의미를 가진 어근 vā와 부정 접두사 nir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말이다. 열반은 ‘불어서 끄는 것’ 혹은 ‘불어서 꺼진 상태’로서 입멸(入滅), 입적(入寂)이라고 번역됐다. 정리하면 ‘괴로움의 소멸’을 의미한다. 여기서 괴로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존재에 대한 무지에서 온다. 그로 인해 업이 발생하고 그 업은 인간의 번뇌로 부터 시작된다. 그 업을 소멸시키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다. 『상윳타 니카야』에서는 “열반이란 무엇인가? 貪滅, 瞋滅, 痴滅을 열반이라고 부른다.” 탐진치를 소멸한 자는 열반을 성취한 자이며, 여래, 아라한, 정등각자라(붓다)는 것이다. 또한 탐진치를 불에 비유함과 동시에 生老死苦를 불에 비유하였다. 그러므로 탐진치의 불이 꺼지면 생로사고의 불도 꺼진다. 그것이 열반이다. 또한 붓다는 제자들에게 열반을 이렇게 설명한다.

 

“5온이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고 바뀌는 법인 줄 안 뒤에는 5蘊으로 말미암아 걱정·슬픔·번민·괴로움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끊고, 그것을 끊고 나면 집착할 것이 없게 된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안온한 즐거움에 머무르고 안온한 즐거움에 머무르게 되면 그것을 열반이라 한다.”

결국 열반이란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은 ‘내가 존재한다.’라는 생각에서 파생된 ‘나의 것’이란 욕망과 집착이다. 존재의 무아와 무상을 이해하고 깨달은 자는 이 고통에서 해방된다.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이다. 욕망을 불러일으킬 주체인 ‘나’가 없고 욕망의 대상도 모두 변하고 소멸하면 집착할 것도 욕망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열반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붓다는 중도를 설한다.

 

“비구들아 마땅히 알아라.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두 가지 극단적인 행이 있다. 하나는 욕망과 쾌락의 하천한 일에 집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법에 맞지 않는 것이다. 다섯 비구들아,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행하면…열반으로 나아가게 된다.”

 

붓다는 고행을 거부했다. 스스로의 경험상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고행이 아닌 중도를 통한 열반을 주장했다. 초기경전에서는 중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8정도를 제시한다. 붓다가 최초의 설법 때 5비구들에게 이어서 설명하길 “중도란 8정도이다.”라고 한 구절에서 중도와 8正道를 동의어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정도는 정견에서 시작하여 정정으로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며 정정에 이르러서는 존재의 실상을 이해하고 윤회에서 벗어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의 윤회관은 무아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모든 고통의 원인을 무아와 무상을 알지 못하는 무명에서 오는 집착에서 찾았다. 또한 그러한 무명으로 인해 업을 짓고 업력에 의해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업의 근원이 되는 貪瞋痴를 소멸함으로서 업을 소멸하고 윤회에서 해탈하여 열반에 드는 것이 불교의 최종 목적이며 이 열반은 현실적 실천적 경험, 8정도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욕망에 관한 불교의 관점이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 무욕을 주장하는 입장은 우파니샤드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최종적으로 해탈에 있어서 욕망을 바라보는 관점이 확연히 다르다. 우파니샤드에서 최후의 욕망 하나를 간직해야 한 것과는 다르게 불교는 욕망 자체를 부정한다. 『디그하 니까야(Digha Nikāya)』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범부는 열반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고, 열반을 기뻐한다. 그러나 누진 아라한은 열반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열반을 기뻐하지 않는다.”

 

붓다고사의 주석에 의하면, 위의 인용문에서 ‘기뻐한다’는 갈애를 뜻한다고 한다. 아라한은 열반을 기뻐하지 않고, 열반에 애착이 없으므로 오히려 열반에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喜에 대한 관점을 통해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nandi(喜)라는 빨리어와 ānanda(喜)라는 산스크리트어의 관점을 비교하면 이해가 빠르다. nandi와 ānanda는 동일한 어근 √nand(기뻐하다)에서 파생한 단어들이다. 우파니샤드는 브라만과 아트만을 ānanda의 화신으로 보고 ānanda를 윤리적 최종 목표로서 추구하는 반면 불교는 nandi를 고통과 윤회의 원인으로 보고 nandi의 소멸을 위하여 수행한다. 또한 붓다가 열반에 대한 욕망까지도 버려야 할 욕망으로 간주한 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욕망에 대해 벗어나는 것이야 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들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리하면 불교의 윤회관은 업을 통해 윤회가 진행된다는 것과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 해탈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파니샤드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윤회의 주체와 욕망에 대한 관점 그리고 해탈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차이점이 있다. 첫째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는 개인의 상주적인 자아 아뜨만과는 다르게 업력 그 자체이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업력에 의한 업의 상속으로 간주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연기한 오온인 ‘나’, 즉 거짓 내가 업을 통하여 다음 생에 또 다른 연기한 오온인 ‘나’에게 업을 상속함으로 윤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업을 전달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업력에 의한 작용이다. 불교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비유 중 하나로 설명을 하자면 등잔의 심지들이 서로 다시 불붙는 것과 같다. 이전의 심지 불은 계속 타고 있지만 새 심지에 다시 불이 붙는다. 인간의 몸도 이와 같다. 이전의 몸은 넘어가지 않지만 다시 새 몸을 받는다. 이처럼 불교는 윤희의 주체를 인간 자신의 행위. 즉, 업에 의해서라고 봤다.

둘째 우파니샤드에서 범아일여의 욕망은 마지막까지 간직해야 하는 것으로 본 것과 다르게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욕망, 마지막 열반의 道까지 없애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욕망은 괴로움의 주된 원인이다. 욕망은 갈애라고도 표현되는데 이것은 연기한 오온을 자신의 실상이라는 집착에서 생겨난다. ‘나’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에 마음을 얽매어 욕망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사람은 욕망을 이루지 못하기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 욕망을 채운다고 고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잡아함』「갈담경」 울비라 마을의 갈담 촌장이 붓다에게 괴로움의 원인과 소멸에 대해 설명을 구하는 부분에서도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촌장이여, 중생에게 생기는 모든 괴로움은 모두 욕망이 근본이 된다. 괴로움은 욕망에서 생기고 욕망에서 모이고 욕망에서 일어나고 욕망이 원인이고 욕망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욕망은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諸法無我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렇기에 모든 욕망은 갈애이며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열반의 道에 당해서도 다르지 않다. 앞서 말한 것같이 열반의 욕망 또한 부처는 갈애라고 간주했다. 열반을 자신의 소유로 하겠다는 것 또한 무명이라는 것이다. 열반을 소유로 하겠다는 생각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된다. 그것 또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실상의 무지이며 집착이다. 따라서 열반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열반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나비선구경』에서 나가세나는 열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와 같이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할 수는 있지만 열반이 생기는 원인을 보여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열반은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반은 도달할 수는 있지만 열반이라는 것은 어떠한 원인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반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경험적 목적지로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열반은 모든 욕망을 극복함으로서 성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은 욕망으로써 얻을 수 없다.

마지막 해탈에 대한 관점에서 불멸을 목적으로 한 우파니샤드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모든 업을 소멸시킴으로 열반에 들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먼저 이것은 두 사상이 가지는 해탈을 추구하는 시작에서 부터 갈리는데 우파니샤드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불멸자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반면 불교는 생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고통인 인간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행을 한다. 이 시작이 해탈의 관점을 다르게 한 큰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초기불전에서 말하는 열반은 중도, 8정도의 수행을 통한 현실적 실천적 경험적 해탈인 반면 우파니샤드의 해탈은 범아일여로서 현실적 경험적 해탈이 아니다. 또한 불교는 살아있는 동안 해탈을 추구하고 해탈을 체험한다. 허나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해탈은 사후에 경험하게 되는 해탈이다. 또한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에서 이와 같이 논하였다.

 

“(질문)열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열반은 토끼의 뿔처럼 발견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붓다고사의 대답)아니다. (팔정도의) 방편에 의하여 발견할 수 있다.”

 

위의 문답에서 붓다는 있다, 없다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열반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것은 자신이 체험한 열반을 토대로 답한 것이며 열반이라는 것을 형이상학적 실체로 보고 취착하게 된다. 그것은 오로지 체험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 1> 우파니샤드와 불교의 윤회관 비교

  우파니샤드 불교
윤회의 주체 아뜨만 업력 자체
욕망 최후의 욕망=범아일여의 욕망 열반의 욕망마저도 마지막에는 여의여야 하는 것
해탈 브라만과의 합일, 불멸 모든 업의 소멸, 열반

다시 태어나지 않음

 

. 원불교의 윤회관

 

논자는 윤회의 큰 흐름인 우파니샤드와 불교의 윤회관을 비교하며 윤회사상에 대해 나름의 정리를 했다. 이제 이 두 사상의 윤회관을 토대로 원불교의 윤회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먼저, 원불교의 경전인 『正典』과『大宗經』 전반에 걸쳐 윤회사상의 흔적들을 살펴보면 소태산 대종사가 인식한 윤회사상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三世를 六途윤회를 인정하고 있다. ②薦度에 있어 윤회의 중심은 靈魂 또는 靈識이며, 그 주체는 業이다. ③六途윤회는 중생의 生死관념이다. ④修道를 통해 生死자유와 윤회解脫에 이를 수 있다. ⑤薦度는 윤회의 昇降에 있어 중요하다. ⑥解脫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業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처럼 원불교의 윤회관도 앞선 두 윤회관과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것을 생사의 변화의 측면으로 봤으며 그것을 중생의 관념이라 이해했다. 사후 이루어지는 윤회는 원운동으로 결국 다시 돌아오는 것이며 진리의 움직임이다. 일시적으로 직선 운동으로 보이나 결국은 다시 돌아오는 원운동의 형태를 지닌다. 원불교의 윤회관은 원불교가 불교에 연원을 두고 시작이 된 만큼 전반적인 부분에서 불교의 윤회관과 흡사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영혼을 인정하는 부분에서 힌두사상의 유아적 측면과 유사해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을 김순금 교수의 「죽음의 원불교적 해석학」에서는 『대종경』, 「천도품」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면서 원불교 생사관을 인도 철학적 사유와 연관시키고 있다. 「천도품」9장, 12장, 15장을 근거로 하여 생사의 관점이 순환적 측면과 “소소한 영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고, 또 다시 다른 육신을 받게”된다는 구절을 통해 우파니샤드에서 언급하는 영원불멸한 아뜨만과 사상적 사유가 상통하다는 것이다. 원불교의 윤회관에서 영식과 영혼의 개념은 많은 부분에서 등장한다. 또한 이러한 사유는 단순히 김순금 교수의 혼자만의 사유는 아니었다. 이성택의「원불교에서 보는 죽음」에서는 인간의 죽음, 곧 육신의 죽음은 인과의 변화이고 인간의 정신은 영원하여 변하지 아니하고 상존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개별적 상주적인 자아인 아뜨만과 같은 존재를 원불교에서 상정하고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윤회관이 진행된다는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기존의 개념과 동일하다고 봐서는 안 된다. 원불교적 진리관으로 볼 때 個靈의 연속성을 인정하면 일원의 진공적인 측면을 해석하는데 한계가 노출 된다. 또 하나 원불교의 교리는 삼교를 통합 활용하여 짜였기 때문에 유불도 삼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그 해석에 있어서 소태산의 대각과 일원상을 진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과 시각이 필요하다.

원불교 윤회관은 불교의 무아윤회관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일면으로 個靈의 윤회를 인정한다. 따라서 육신은 변화하지만 영지불매한 영혼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원불교 윤회관 전반에 걸쳐 나오는 영지불매한 영원불멸의 이치에 의한 個靈의 영속성과 불멸성, 영혼의 불멸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個靈(영식·영혼)의 윤회의 접근은 일원상 진리의 양면성을 근거로 하여야 한다.『정산종사법어』 원리편 2장에서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은 일원상의 원리가 모든 상대처가 끊어져서 말로써 가히 이르지 못하며 이는 곧 일원의 진공체요, 그 진공한 중에 또한 영지불매하여 광명이 시방을 포함하고 조화가 만상을 통하여 자재하나니 이는 곧 일원의 묘유라고 밝힌다. 우리는 이것을 일원상 진리의 진공묘유와 같은 체용논리의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정산의 언급을 통해 영혼불멸의 생사관은 당위성을 확보한다. 원불교는 불교의 12인연에 근거한 인연연기로의 해탈을 지향하면서도 천도의 근거가 되는 個靈의 윤회도 인정하고 있다. 個靈의 윤회를 불멸의 측면에서 바라보되, 그 경로를 묘유의 측면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個靈의 항존을 인정하나 그것은 묘유의 측면이다. 이러한 측면은 정산의 靈氣質론에서 더욱 두렷해진다. 靈氣質론에서 靈은 영원불멸한 성품으로서 우주만유의 본체이다. 그러므로 영과 기와 질이라는 우주만유의 존재론적 측면에서 영의 영원불멸성을 상기하여야 한다. 또한 영혼불멸과 관련된 원불교 생사관의 이해에 있어서 個靈과 관련한 ‘영혼’의 개념을 靈氣質론에 입각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영혼의 해석은 정산의 靈氣質론을 바탕으로 재해석 되어야 한다.

정산의 영기질론에서 靈의 의미는 5가지로 정리된다. ①진리 인식상 靈智의 측면에서 이해된다. ②천지에서는 大靈으로 개인에게서는 個靈을 드러난다. ③靈은 理와 같으나 個靈과 六途윤회를 설명 할 수 있는 것이다. ④영원불멸하다. ⑤실체를 지니지는 않으나 나타나는 형식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된다. 이러한 정리를 바탕으로 靈의 성격을 大靈과 個靈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다. 大靈의 성격은 광명과 위력의 동시적 성격을 지니고 광명과 위력이 일원의 진공에 바탕해 있다. 마찬가지로 天地의 識도 진리의 광명과 위력을 含有하는 진리의 성격적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봤다. 이것들은 윤회의 주체적인 힘인 동시에 내용이다. 윤회에 있어 개체 영혼의 연속성 이전에 우주에 편만해 있는 진리의 靈明性인데 이것은 大靈의 성격이며, 소태산의 영혼 설명방식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개체 영혼 이전의 궁극적인 실체개념으로 쓰이는 성품을 언급함으로써 성품을 우주적 大靈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또한 그 작용을 인위성이 배제된 無爲而化 自動的 진리의 작용으로 보고 있다. 個靈 또한 이러한 大靈의 속성을 함유하고 있다. 大靈의 속성이 천지만물 허공법계에 두루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個靈은 大靈의 속성을 함유하고 있는 독자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 큰 원상이 돌매 천만 작은 원상이 따라 돈다는 정산의 말과 같이 만물이 윤회되고 있다는 것이다.

個靈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성격으로 파악이 가능한데, 하나는 大靈과의 同氣相應性이고 다른 하나는 業力의 주체로서의 個靈이다. 크게 천지는 대령의 측면에서, 만물은 개령의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여기서 개령은 개체적인 만물의 능동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령의 속성을 함유한 것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따라서 개령의 능동성은 개령이 가진 대령의 성격과의 同氣相應下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대령과 개령의 관계에서 同氣相應性은 기본 전제라는 것이다. 또한 이 개령은 항존성을 갖는데, 문제는 개령이 유정물에 머무르며 세계를 형성해 가는데 있다. 개령이 갖는 항존성으로 인해 무상으로 변하는 유정물에 상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령은 형체 있는 물질의 변화 때문에 한 곳에 항존할 수 없고 윤회라는 형태로서 다시 개령화 되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정리하면 영은 개체적 영혼이 아니라 대령이 함유된 개령이며 윤회의 주체는 영원불멸한 성품으로서의 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개령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영혼의 해석인데, 「천도품」에서는 영혼이 ‘개령’의 측면으로 인격성을 가지고 실재하고 있는 존재로 설명한다. 허나 천도란 것을 개령에서 개령으로의 전이가 아니라 개령이 대령에 합하였다가 다시 개령으로 나타나는 경로를 거치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우파니샤드의 아뜨만 윤회론과는 다른 일면으로 바라 볼 수도 있다. 불교에서의 인과의 본질을 영기질론으로 설명하면 영과 기의 작용법칙이며 이것은 결정론적 인관론과는 거리가 멀다. 원불교에서는 결국 업력의 주체로서 우파니샤드의 아뜨만과 같은 개념을 지닌 개령의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할시 우파니샤드의 영혼상주설 내지 불멸설의 모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불교의 윤회관에서 윤회의 주체를 영식·영혼이라 바라보는 측면은 우파니샤드와 유사성을 보이는 것 같으나 영식·영혼을 靈氣質的으로 접근한다면 결국에는 불교의 윤회관과 더 유사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원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어떠한 가, 앞서 정리했듯 원불교는 修道를 통해 生死자유와 윤회解脫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진다. 따라서 원불교의 해탈은 생사를 통해 반복되는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다. 원불교의 생사관은 원불교 교리의 중심인 일원상 진리를 바탕으로 한다. 일원상 진리에서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고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이지만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생멸거래와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난다.”는 대목을 골자로 설명을 전개하면, 일원상의 진리가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사 또한 양면의 입장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이것을 생사관에 대입하면 변하는 자리와 불변하는 자리로 말할 수 있고 이것은 무상과 유상으로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무상의 측면으로는 육신의 변화, 보이는 측면으로 설명되고 유상의 측면으로는 생사의 불변, 보이지 않는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정리하면 죽음이란 것은 변화의 육신이 불변의 영혼을 여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잠시 옷을 갈아입듯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 그 영식이 지은 바에 따라 새로운 옷을 입는 것과 비교 된다. 따라서 죽음이란 옷 한번 갈아입는 것과 같기 때문에 죽음에 슬퍼할 것이 아니라 초연하자는 것이 바로 원불교의 생사관이다. 따라서 일원상 진리의 현상세계 보이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생사가 존재하기 생사대사의 연마가 필요하다. 다음은 대산종사의 말씀이다.

 

“진리의 본래 자리에는 거래가 없어 이생 내생이 따로 없으나 진리의 나타나는 입장에서 볼 때에는 거래가 분명하고 이생 내생이 분명하다.”

 

이생과 내생의 문제가 일원상 진리의 현상적인 측면에서의 가늠이며 여기에서 삼세를 향한 공부인으로서 생사해탈을 위한 수양이 필요하다. 결국 이 생사해탈을 위해서는 생사거래와 업보가 없는 자리를 깨달아서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고 생사에 대해 초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수행자는 생사俱空의 이치를 깨달을 경우 죽음에 관해 생멸거래가 없음을 직시하게 된다. 이것은 불교의 空觀에 직결된다. 이처럼 원불교의 생사관은 변·불변에 대해서 일원상의 진리를 바탕으로 생사에 초연히 임하는 적공의 자세를 촉구한다. 이것은 윤회관과도 연결 되는데 원불교에서 생사의 이해는 최종적으로 윤회업보를 극복하여 해탈하자는 것이며 그것은 업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소태산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원불교 윤회관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애착을 놓는데 의미를 두고 있으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생사해탈을 통해 현실에서의 집착을 여의고 실존하는 것이다.

석존의 空觀은 ‘연기’로 표현되는 관계의 철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존재가 서로 얽혀져 있는 연기의 소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연기한 오온의 자아인 자신을 깨달음으로써 무아를 인식하는 바탕이 된다. 연기의 소식을 앎으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해탈이라는 것은 결국 ‘나’라고 하는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근원으로 한다. 이것은 깨달음, 覺과도 연관된다. 해탈은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수행자가 진리를 깨달아 존재의 실상을 알았을 때, 생사에서 자유로워지고 육도를 벗어나 열반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불교는 ‘무아’ 혹은 ‘무상’ 을 말한다. 집착할 만한 자신이 없고 오직 연기된 존재로서 ‘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원불교는 ‘무아’에 대한 해석이 조금은 다르게 접근한다. 이러한 생사俱空을 바탕한 존재에 대한 깨달음의 이치는 원불교 恩사상을 인식하는 토대가 되어 진다. 다음은 『정전』 일원상의 진리의 내용이다.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며,”

 

소태산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관계의 철학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한 존재의 관계를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위의 언급이다. 인간이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무아의 진리를 깨닫고 보면 자신 본연의 존재가 드러나는 데 그것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다. 일체중생의 본성이 곧 제불의 심인이며, 우주의 본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원상의 진리 안에서 인간과 우주만유와의 관계를 드러나게 한다. 『정전』 일원상 법어 에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원상(圓相)의 진리를 각(覺)하면 시방 삼계가 다 오가(吾家)의 소유인 줄을 알며, 또는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또는 제불·조사와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며, 또는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일원상의 진리를 오득한 수행자는 시방사계를 소유로 하고 우주 만물이 이름은 다르나 둘이 아닌 줄 아는 지혜를 얻게 된다. 우주만유가 이름은 각기 다르나 인간과 둘이 아니 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태산이 연기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앞서 말했듯 석가는 연기를 통해 존재의 실상을 설명한다. 모두가 서로 얽히어 연기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은 그 연기한 것을 각기 서로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그 관계가 서로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소태산은 그 관계의 본질을 은혜, 즉 ‘없어서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얽혀져 있는 그 본질이 은혜라는 것이다. 『대종경』 「교의품」에서 일원상의 내역을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로 밝힌 것을 통해 그 뜻은 더욱 명확해진다. 결국 원불교의 윤회관은 인간의 스스로가 갖게 되는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본질을 파악하고 그를 통해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를 오득하기를 촉구했다. 자신의 본질을 깨달아 세상에 편만하게 존재하는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은혜의 관계와 은혜라는 존재의 본질은 원불교 일원상 진리의 핵심이며 원불교 사상의 바탕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연기는 은혜이다. 모든 관계가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구조이다. 이에 정순일 교수는 「은사상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에서 더 나아가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은혜를 발생하는 구조라고 봤다. 모든 은혜, 모든 구조, 모든 우주적 사건은 인과의 이치로 빈틈없이 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사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는 본질적으로 은혜의 관계이며 인과적 적용을 받는 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가 본질적 은혜의 관계이며 서로 의존하는 緣起的관계이다. 한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존재들의 연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과 존재 자체가 相依的으로 相生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원불교 윤회관의 경향은 두렷하게 드러난다.

우파니샤드에서 해탈은 사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봤고 불교에서 해탈은 실천적, 경험적으로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봤다. 우파니샤드의 해탈은 죽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사후에 브라만에 합일하여 불멸을 원하는 것이 특징이고 불교는 해탈을 통해 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목표로 하여 열반을 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원불교의 해탈은 두 사상과는 조금 다른 일면을 보인다. 현실에서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 그리고 그로 비롯된 무아의 자각, 현실 속에서 해탈을 추구한다는 점 등이 불교와 유사점이나 원불교의 해탈은 단순히 해탈을 통한 열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탈을 통해 열반의 도를 얻어 성불을 이루고 그를 통해 세상에 제중으로 까지 나가는 것이 목표이다. 원불교의 해탈은 현실적 아니 더 나가 현실 지향적이다. 이것은 특히 원불교 『정전』 총서편 개교의 동기에서 강하게 드러나는데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함이 그 동기니라.” 라는 말을 통해서 원불교의 개교의 목적 자체가 중생들을 낙원으로 인도하여 현실에서 낙원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산은 한갓 사람의 생사에만 진급과 강급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마음이 여러 단계에 내왕하고 있다고 하였다. 정산은 우리가 실제의 삶에서 방심하지 말고 정욕을 여의고 사상을 가져서 진급의 길로 나아가도록 부촉한다. 이것은 단순히 현실에서 열반을 추구하는 불교보다는 적극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지향적 경향은 원불교 영육쌍전법에서도 나타난다.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와 삼학으로써 의식주를 얻고 의식주와 삼학으로써 그 진리를 얻어서 영육을 쌍전하여 개인·가정·사회·국가에 도움이 되게 하라는 것을 통해 무아와 무상의 진리를 오득함으로써 세상에 유익을 주자는 부촉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원불교의 해탈은 무아, 무상의 이치를 깨달아 열반을 얻어서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존재적 절대 은혜라는 깨달음을 활용하여 현실을 개척하기를 목표로 한다. 현실 세상에서 은혜를 바탕하여 낙원을 개척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원불교의 윤회관은 업장소멸의 측면과 현실 지향적 측면에서 불교와 유사한 윤회관을 가진다.

또한 욕망에 관한 입장에서 원불교는 불교와 우파니샤드 두 사상과 다른 입장을 취한다. 수행자의 무욕 추구는 우파니샤드, 불교, 원불교 모두 공통의 입장이지만 法, 해탈을 이루는 道에 관해서는 우파니샤드와 불교·원불교는 다른 입장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최후까지 범아일여의 욕망을 남기라는 입장이지만 불교에서는 열반의 법조차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최후에 열반의 道지도 空한 것을 아는 것이 해탈이라는 것이다. 원불교도 이러한 입장이 유사하다. 소태산은 집착을 여의어야 해탈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최후에 일심을 챙기는 마음까지도 놓으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법박(法縛)이라고 설명한다. 법에 구애되면 해탈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정산의 무념공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사람이 도덕을 공부하여 능히 불성(佛聖)의 지위를 얻는 것은 그 마음에 내가 불성의 위를 얻었거니 하는 생각이 없는 까닭이요,”라는 구절이 그러한 성향을 보여준다. 이처럼 원불교는 수행을 함에 있어 결국에는 법마저도 俱空한 자리를 추구한다. 진정한 성불은 일원상 진리의 眞空의 자리를 체 받는 것이며 구도의 욕심까지도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원불교의 현실에서 욕망을 대하는 입장이 불교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불교의 욕망을 대하는 자세는 철저한 무욕주의로서 욕망에 대해서 철저하고 엄격한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육신에 대해 불교의 견해는 부정적인 모습이다. 부처님이 초기에 『大念處經』에서 수행의 방법으로 부정관을 통해 인간의 실상을 파악하게 하신 것에도 그 일면을 찾을 수 있다. 원불교는 이와 반대로 인간의 육신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그 욕망으로 부터 오는 즐거움을 경계는 하되 집착 없이 받아들여 즐기기를 촉구한다. 『대종경』교의품 33장에서는 과거의 부처님께서는 世俗樂을 즐기는 것을 엄중히 말리셨으나 분수에 맞게 의·식·주도 수용하며, 때로는 소창도 하라는 법문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와 같이 무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되, 분수에 맞게 정당한 世俗樂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圓融한 불법을 추구한 소태산의 원만한 불법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또한 『대종경』수행품 21장에서 제자 이청춘이 정산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애착심이 아니냐는 질문에 “청춘은 감각 없는 목석을 도인이라 하겠도다. 애착이라 하는 것은 사랑에 끌리어 서로 멀리 떠나지를 못한다든지 갈려 있을 때에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자신 수도나 공사에 지장이 있게 됨을 이름이니 그는 그러한 일이 없나니라.”라고 답하신 것을 통해서 애착심, 착심을 경계하셨으나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원불교는 욕망에 있어서 집착은 경계하였지만 그 감정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부정적이지 않았다. 또한 인간에게 다가오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거부하여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분수에 맞게, 정당하게 수용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원불교의 윤회관을 정리하면 크게 다섯 가지의 맥락에서 윤회관을 파악할 수 있다. ①불교의 윤회관의 세계를 수용하고 있다. ②소소영령하여 변함없는 영식 혹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 ③원불교 윤회관에 있어서 최종의 목적은 해탈을 통해 성불제중 하는 것이다. ④마지막의 열반의도에 대한 욕망까지 집착으로 간주한다. ⑤모든 욕망에 대한 집착을 놓되 즐거움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고 수용한다. 이와 같이 원불교의 윤회관은 불교의 무아윤회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적인 모습을 보인다. 업장소멸의 측면, 해탈의 욕망까지도 놓아야 한다는 측면 그리고 현실에서 해탈을 이루려는 측면 등이 불교와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집착을 놓되, 인간의 즐거움을 수용하는 측면과 해탈을 통해 낙원세상을 개척하려 한 측면이 다르다. 다만 영혼에 관련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삼세육도 윤회라는 불교의 세계관은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것을 윤회하는 주체에 대해서 영혼의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해 관점이 갈리고 있는 것이다.

 

. 원불교의 수행의 목적

 

앞선 원불교의 윤회관을 확인한 바, 원불교의 윤회관은 불교의 윤회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수행의 목적은 무아 윤회관의 해탈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리고 그것은 업의 소멸과 상주적 자아가 있다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무아와 무상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탈의 입장은 원불교의 수행의 목적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데 생사해탈을 통해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것과 그것을 통해 성불을 이루는 것에서 그러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영식과 영혼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원불교의 해탈의 관점과 윤회를 우파니샤드의 아뜨만 사상과 연결시켜 유사성을 찾으려는 혼돈을 보인다. 그러나 상주불멸한 개별적 영혼이란 개념으로 영혼을 접근할 시 박희종이 언급했던 것과 같이 수행을 통해 불멸자를 추구하거나 육도윤회에 있어 브라만이 사는 천계로 상승하려는 수행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이것은 일원상 진리의 진공성에 위반되는 것이다. 원불교의 수행의 표본은 일원상의 진리이다. 일원상의 진리는 진공을 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수행 또한 진공을 모체로 존재의 무아를 확인하는 것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또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원불교의 수행의 목적은 불교의 윤회관과 같은 업장의 소멸이다. 원불교의 천도의 개념이 진급을 통한 업장소멸에 기반을 두고 있고 업장소멸을 통해 왕생극락을 염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업의 소멸이란 측면은 원불교 수행에서 핵심적 목표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천도품」11장에서도 소태산은 “사람의 영식이 이 육신을 떠날 때는 처음에는 착심을 좇아가게 되고, 후에는 그 업을 따라 받게 되어 한없는 세상을 길이 윤회한다.”라 표현하며 착심과 업을 소멸하지 않는 한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수행에 있어서 삼대력을 쌓는다는 개념과 적공이란 개념은 업의 소멸과 연결되어 있고 일원상 진리의 진공체에 바탕 되어야 한다. 일상수행의 요법의 심지는 원래 요란함과, 어리석음과 그름이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진공체를 바탕으로 한 수행을 촉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삼대력을 쌓는다는 개념이 자칫 좋은 정업을 통해 다음 윤회를 준비하는 것이거나 각각의 상주한 개령에 수행력을 차곡차곡 쌓아서 부처를 이뤄 불멸자가 되자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일원상의 진리의 진공체를 고려한다면 수행을 한다는 것은 채움이 아닌 비움의 의미와 더욱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원불교의 수행은 비움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원불교의 윤회관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윤회관을 통해 존재의 상의성을 인식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본질을 깨닫는 것에 대한 첫 발걸음이다. ‘나’라는 집착을 놓음으로서 ‘우주만유의 본원’인 동시에 ‘일체중생의 본성’인 일원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각 개체가 전체적 생명으로서 통일된 속성을 지니면서도 각 개체생명 나름의 특징과 다양성을 지닌다는 존재적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존재란 전체생명인 동시에 개체생명임을 깨닫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진공의 측면으로 일원상 진리와 합일 된 전체생명이며 묘유의 측면으로 ‘나’라는 개체성을 확보한 개체생명이라는 것이다. 이 동시성을 통해서 낙원을 개척하는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다. 결국 ‘나’라는 존재가 상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르게 하는 작업은 필수불가결이다. 모든 존재가 이러한 구조로 존재를 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相依的으로 존재하며 은혜를 바탕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를 깨닫고 그 은혜에 보은하기 위해서 현실에 이익을 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원불교는 현실 지향적인 종교이다. 그러한 측면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정전』개교의 동기, 영육쌍전법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대종경』많은 부분에서 그 내역들이 발견된다. 따라서 원불교의 수행의 목적은 윤회관을 바탕으로 현재에 실존하고 있는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생사해탈의 진리를 오득하고 그 진리를 체 받아 현실에서 낙원의 삶을 개척하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한다.

원불교에서는 法에 대한 욕망에 있어서 모든 욕망의 집착을 제거하고 해탈을 위해 마지막 해탈의 도까지도 여의여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다. 수행을 위해서 성불을 열망해야 하지만 그것마저도 집착으로 간주한다. 최후에는 그 성불에 대한 집착까지도 수행을 통해 비워야 할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욕망과 기쁨을 도외시 하는 무욕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앞서 설명과 같이 욕망에 대한 집착은 놓는 것을 바탕으로 하되, 인간에게 다가오는 즐거움은 집착 없이 즐기고 감정을 부려 사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랑을 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으나 집착 없이 사랑하는 것을 권하셨다. 정리하면 원불교의 수행의 목적은 무상과 무아의 진리, 일원상 진리의 진공의 자리를 체 받아 육도윤회를 끊고 해탈하는 것이며 그 체를 바탕으로 현실 세계에 실존하며 묘유로서 세상을 바루고 이익 되게 하여 세상 안에서 낙원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결론

 

원불교는 불교를 바탕으로 교문을 펼치신다는 소태산 대종사의 뜻에 따라 교리적 부분에서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 윤회에 관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부분에서 불교의 윤회관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영혼을 인정하고 영원불멸의 영식을 인정하는 부분에 있어서 불교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것은 오히려 인도 전통사상의 흐름인 우파니샤드의 아뜨만과 동일하게 보인다. 이로 인해 유아적 입장에서 개아를 상정하고 수행에 있어서 개인의 영혼을 가지고 적공을 드려 수행의 업을 쌓음으로 불멸자가 되어 윤회를 해탈해야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원불교의 수행의 목적을 모호하게 한다. 자칫하면 선업을 쌓음으로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원불교 수행의 목적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원불교의 수행의 목적은 생사를 해탈하여 육도윤회를 벗어남으로써 육도를 자유자재하는 심법을 얻는 것이고 그를 통해 현실에서 낙원을 개척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원상 진리의 진공 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불교의 무아적 측면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불교의 입장은 일원상 진리의 진공 체를 바탕한 윤회관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용들은 전서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단순히 몇 가지의 법문의 해석을 가지고 단순히 원불교가 유아적 입장을 가진 종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큰 모순이 아닐까 생각한다. 윤회의 해탈이라는 것은 ‘나’라고 하는 집착으로 부터 온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묵은 업을 소멸하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탈은 무아의 입장일 때에만 가능하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에 집착한다면 업은 소멸될 수 없다. 집착은 業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불교 윤회관의 해탈은 진공 체를 전제로 하며 이것은 무아와 무상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무상과 무아에 있어서 연기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절대적 은혜를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가 은혜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무아를 통해 우주만유와 자신의 관계를 깨달아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집착을 벗어나 윤회를 벗어난 수행자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수행의 목적은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열반에 드는 것이며 윤회를 해탈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수용함으로 세상에 편만한 恩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은혜를 바탕으로 진정한 낙원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군데 아직 의문점이 제기 될 수 있는 요소들이 있다. 그것은 영혼에 관한 문제와 영식에 관한 문제이다. 영혼과 영식에 관한 문제로 인해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원불교를 유아적 입장의 종교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원불교의 일원상 진리의 양면성을 고려했을 때 단순히 유아적 입장의 종교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원불교의 영혼과 영식은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그 시도들로 박희종이 靈의 개념을 정산의 영기질론에 입각하여 우주적 대령과 동기상응성을 지닌 개령으로 해석한 것과 장지환 교수가 영혼의 존재를 일원상 진리의 진공묘유와 같은 체용논리의 맥락에서 접근한 것이 그 예이다. 따라서 앞으로 영식과 영혼에 관하여 일원상 진리를 바탕으로 한 원불교적 해석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경전류

『원불교전서』, 익산:원불교출판사, 1977(초판)

 

단행본류

김인석·이민섭,『우파니샤드』, 고양:문화읍, 1985

윤호진,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 서울:불광출판사, 2015

정순일, 『인도불교사』, 서울:은주사, 2005

정순일, 『대념처경』, 익산: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2017

 

일반논문류

강형철, 「아트만과 푸루샤 개념의 교차점」, 『인도철학』40, 서울:인도철학회, 2014

김순금, 「죽음의 원불교적 해석학」,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6, 익산:원불교사상연구원, 2011

박희종, 「윤회에 대한 靈·氣·質적 해석」, 『원불교사상』24, 익산:원불교사상연구원, 2000

이성택, 「원불교에서 보는 죽음 」, 『원불교사상』19, 익산:원불교사상연구원, 1995

이종희, 「불교 연기설과 윤회설에 관한 小考」, 『한국종교사연구』13, 서울:한국종교사학회, 2005

정순일. 「은사상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1, 익산:원불교사상연구원, 2008

정순일. 「소태산 대종사의 생명철학」,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69, 익산:원불교사상연구원, 2016

 

학위논문류

김정근, 『무아와 아트만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장지환, 『원불교 천도론 연구』, 원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원불교학과

Wonkwang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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