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회개사상과 비교하여 본
원불교의 참회사상 고찰
유태희(현성)
Ⅰ. 서론
Ⅱ.기독교의 회개사상
Ⅲ. 원불교의 참회사상 1. 교리적 의미 2. 참회의 원리 3. 참회의 방법 1) 사참 2) 이참 4. 참회와 공덕
Ⅲ. 기독교 회개사상과 원불교 참회사상의 비교 |
Ⅰ. 서론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되돌아보면서 잘못을 살피거나 그것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반성’이라고 한다.
자신을 윤리적, 도덕적으로 돌아보고 과오를 수정하며 더 나아지고자 하는 것은 이 지구상에 인간만이 유일하다.
이러한 인간적인 행위가 가능한 이유는 인간 본연의 지성과 사유에 근본한 면도 크겠지만, 과거로부터 종교들의 가르침과 교훈이 대대로 전해져오며 내려온 측면에 기인한 면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고, 설령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반성하여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만일 사람이 이러한 양심의 자정작용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 때는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되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많아지고 반복적인 행태들로 곳곳에 피해를 끼칠 때, 인류사회는 병들어가고 곳곳에는 고통과 원망, 증오와 복수가 횡행하는 양심이 실종된 무법사회가 되어 인세의 지옥이 열리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죄악을 양산하는 인간들은 결국에는 본인이 뿌린 인과의 씨앗에 따라 처참한 악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니, 이는 그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심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지구촌 곳곳의 국가와 민족들 간의 갈등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인들 사이에서의 모든 악의와 불행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가를 살펴본다면, 우리 모두는 남을 해하고 탓하려는 마음을 돌이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반성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태산은 그렇기에 ‘모든 성자들이 이구동음으로 참회문을 열어놓으셨다.’고 밝혔으며, 그 자신도 ‘참회문’을 직접 지어 참회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본 논문은 기독교의 회개사상과 비교하여 원불교의 참회사상의 교리적 의미와 원리, 실천방법과 그 의의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Ⅱ. 크리스트교의 회개사상
크리스트교에서는 ‘참회’, ‘반성’ 대신 ‘회개’라는 표현을 쓴다. ‘회개’라는 표현은 ‘참회’, ‘반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반성’이나 ‘참회’와 같은 개념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에서 그치는 것과 달리 ‘회개’는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속죄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내포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트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회개의 문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회개는 한 마디로, 잘못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탄을 따르던 삶을 돌이켜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회개 없이 참된 믿음과 인애는 불가능하다. 사람이 스스로 회개하고 죄악을 제거하기 전에는 아무도 거듭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나쁜 짓을 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신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이다. 죄는 단순히 금기를 깨거나 외형적인 법을 어기는 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죄는 신과의 인격적 관계의 파괴를 의미하며, 신이 인간에게 보이는 신뢰에 대한 인간의 배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의 죄악을 가장 잘 안다.’
이러한 인간과 신의 단절은 아담과 이브가 신의 경고를 어기고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시초로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인간에게는 원죄가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여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놓았고, 그러한 길을 따르는 것이 바로 크리스트교의 교리에서 말하는 회개이다.
진정한 회개가 있은 뒤에야 구원이 따라오게 되는데, 구원은 엄밀히 말하면 개심(改心)과 거듭남(重生)이라는 두 단계가 있다. 개심은 이해의 기능에 속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고 내면의 변화가 시작되는데 그것이 바로 개심이다. 그래서 개심은 이해에 속한다.
거듭남은 의지의 기능에 속한다. 마음의 변화가 있은 뒤,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서 행동까지 변화되는 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깨달은 것을 실천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천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인간의 의지로 결정된다. 그래서 거듭남은 의지에 속한다. 선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개심의 단계에 있다. 실제로 선을 택할 때 인간은 거듭남의 단계로 나아간다. 개심은 깨달음이 먼저이고 실천은 나중이다. 인간이 신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고, 본연의 이기심을 타파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싶어지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깨달음이 있어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단계, 개심의 단계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의 구실을 못하는데, 그 이유는 생각은 바뀌었으나 실천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거듭남은 실천이 먼저이고 깨달음이 뒤따른다. 이 단계가 시작될 때 사람은 신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사랑에 움직여서 행동하게 된다. 실천하면서 깨달음이 뒤 따라온다. 즉 실천을 통해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영적인 깨달음도 깊어지게 된다. 이것이 거듭남의 단계이다.
예수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고, 거듭남을 통해서 사람이 성자를 본받아 신과 결합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표현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죄업을 뿌리치고 올바른 복음을 따르기 위한 선택이 필요하며 이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구절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시험’과 ‘고난’의 과정을 거치게 되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그 동안 내면에 켜켜이 쌓여있던 죄악의 습관들과 외부에서 끌어당기는 유혹과 강압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성자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 나간 것과 같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모든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신으로부터 평화와 안식을 선물 받을 수 있다.
위와 같이 크리스트교의 ‘회개’는 일반적인 도덕적, 규범적, 윤리적인 차원의 자기반성이 아닌,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적으로 거듭나기 위한 신앙과 수행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Ⅲ. 원불교 참회사상
원불교 참회사상의 근본이 되는 문헌은 원불교 정전 제3 수행편 8장의 참회문이다.
참회문의 사상은 하나의 독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원불교의 핵심적 교리와 연결되어 있다. 참회의 원리는 일원상의 진리에 근거하는 바, 일원상의 진리란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이치로서, 이 두 가지 측면의 진리가 한 기틀로 이루어진 일원상의 진리야 말로 ‘참회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원리와 방법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참회문의 구조는 문맥과 내용상에서 분류하여 법문에 인거하여 6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인과원리 : 참회의 원리는 음양상승하는 도와 인과의 원리에 의한 죄복의 이치가 확연함이 그 근본이다.
참회의 의의 : 참회는 ①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며 ②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오는 초문이다. 그러므로 ③참회하면 구업은 사라지고 신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선도는 가까워지고 악도는 스스로 멀어진다.
참회와 죄업 : 참회의 근본 문제는 인간의 죄업이며 죄업의 근본은 삼독심이며 삼독심의 근언은 무명이다. 죄는 본래 무명인지라 마음을 따라 없어지므로, 마음이 멸함을 따라서 죄업 또한 멸하게 되는 원리가 있다.
참회의 방법 : 참회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참이고, 하나는 이참이다.
참회의 공덕 :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천업을 임의로 하며, 생사를 자유로 하고 삼계육도가 평등일미요 동정역순이 무비삼매라 하여 불조의 참회와 대승의 참회로써 가히 죄업을 마친 경지의 영원한 참회를 제시하였다.
참회의 금기 :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로 시작하여 죄업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 것을 경계하고 있다.
원불교 정전의 참회문은 인과보응과 불생불멸의 변하지 않는 이치가 있음을 전제로 시작하여 참회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한 편으로 변하지 않는 이치가 있는 가운데에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역동성은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이 있음을 피력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태산은 유교와 불교 사상을 활용,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각산覺山은 음양상승이란 ‘우주변화의 기본적인 법칙으로 陰 가운데 陽으로, 양 가운데 음으로 상호간에 받들어 순환불궁하는 원리이자 천지만물의 생성변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서, 오면 가고 가면 반드시 오는 순환불궁하는 이치’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음양상승의 도라 함은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서로 작용하여 천지만물을 생성변화시키는 원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만물이 변화하는 인과 변화의 유동성은 음양의 변화로 인한 것인바, 이것이 바로 업력을 초월하는 원리가 된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원리로서 음양과 변하지 않는 인과의 법칙은 서로 별개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원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양상승과 인과보응의 이치에 대응하는 참회의 원리로서 대소유무의 이치를 알아 순리에 맞게 정업을 수용하고 새로 짓는 업은 순리에 맞는 행을 통하여 선업을 지어 나가는 것이 業에 대응하는 참회의 원리가 된다.
한 편, 음양상승과 인과보응에 대응하는 원리의 측면으로 불생불멸의 본래자리에 근거한 참회의 원리가 있다. 소태산은 참회문에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마음이 멸함을 따라 반드시 없어질 것이며, 업은 본래 무명無明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원탁(병재)는 유마경의 우팔리 존자의 회고담으로 소개된 ‘유마의 법문’을 인용하며, ‘죄업은 본래 실체가 없으며 마음으로 만들어 낸 것 뿐이어서 무명일체를 타파해낸다면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할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업은 본래 무명인데 전도망상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실상을 바로 깨닫게 되면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다.’고 하여 오히려 인간의 죄의식과 구속이 그러한 업을 지어낼 뿐임’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이치에 바탕하여 소태산은 참회의 방법을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으로 나누었다.
소태산은 ‘사참이라 함은 먼저 삼보三寶 전에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을 이름한다.’하였다.
여기서 삼보란 불보, 법보, 승보를 말하는데, 불보는 진리를 깨달은 모든 부처님과 진리의 당체를 말하고, 법보는 모든 성자들의 경전과 우주의 대소유무의 자성법을 말하며, 승보는 법을 전하시는 분과 삼라만상을 말한다. 이것은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으로서 법신불 일원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사참의 진리적 측면을 확인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사참은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사사물물 모든 경계를 당할 때마다 사사불공의 자세로 불공하는 것이다.
소태산은 사사불공의 불공법에 대해 말하기를 ‘과거의 불공법과 같이 천지에게 당한 죄복도 불상에게 빌고, 부모에게 당한 죄복도 불상에게 빌고, 동포에게 당한 죄복도 불상에게 빌고, 법률에게 당한 죄복도 불상에게 빌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는 곧 법신불의 응화신이니 당하는 곳마다 부처님이요, 일일이 불공법이라 천지.부모.동포.법률에게 당한 죄복은 천지.부모.동포.법률에게 비는 사실적인 동시에 반드시 성공하는 불공법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즉 사참은 지난 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과보를 받아들이며 다시는 그 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짓도록 노력하는 일련의 반성의 행위로서, 이른바 실지 참회요, 도덕적 참회며, 행위의 참회이다. 즉 몸과 마음과 물질의 세 방면으로 참회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사참의 사실적 측면을 확인할 수가 있다.
정리하자면 사참의 개념은 안으로는 자기의 죄업을 뉘우치고 진리전에 고백하는 것이요, 밖으로는 상대에게 사죄하고 모든 선을 닦아 나가는 것으로써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겸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태산은 ‘이참이라 함은 원래에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감을 이름한다.’하였다.
이러한 ‘죄성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간다’는 경지는 죄성 뿐만 아니라 복성마저 공한 자리를 함께 깨치는 일체유심조의 원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죄와 복 양면이 함께 공한자리를 깨쳐야 죄성이 참으로 공한 원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참이란 일체만법과 마음의 본체인 자성이 공한 자리를 깨쳐나간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말은 즉 사참이 철저한 뉘우침의 참회라면 이참이란 철저한 깨침의 참회로서 자성의 본체를 터득해야하는 성리의 영역에 바탕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소태산은 참회문의 서두에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마음이 멸함을 따라 반드시 없어질 것이며, 업은 본래 무명(無明)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진다.’고 밝힘으로써 본래 죄성이 공하다는 것을 밝혔고, 궁극적으로 죄를 멸하기 위해서는 자성의 혜광을 비추어 무명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죄성이란 죄를 짓는 마음, 죄의 성품으로서 신구의 삼업으로 악업을 짓는 근본성질이다.
소태산은 이러한 죄성의 근본은 탐.진.치의 삼독심으로서,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할지라도 원래의 탐.진.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큰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약간의 냉수만 갔다 붓고 밑에서 타는 불을 그대로 둔 즉 불의 힘은 강하고 냉수의 힘은 약하여 어느 때든지 그 물이 냉해지지 아니함과 같다.’고 하였다.
즉, 죄의 근본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탐.진.치의 근원이 되는 무명을 타파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참의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참의 필요성을 자각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불생불멸의 도와 인과보응되는 진리를 믿고 깨달아야 한다.
소태산은 ‘모든 사람에게 천만가지 경전을 다 가르쳐 주고 천만가지 선을 다 장려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먼저 생멸없는 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 된다.’하였다.
그 이유를 정산종사는 ‘첫째는 일체를 다 자기 마음이 짓는 것임을 요달하는 것이요. 둘째는 인과가 우주의 원리인 것을 요달하는 것이요. 셋째는 자성의 원래가 죄업이 돈공한 것을 요달하는 것이요. 넷째는 자성의 공한 것을 관하여 동정간에 삼매의 힘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대산종사는 ‘삼독오욕을 제거하는데 그 근원을 녹여 버리지 못하면 일시적으로는 제거된다 해도 곧 다시 일어난다. 대원견성을 한 사람은 번뇌망상이 일어난다 해도 본래 성품자리에 비춰 녹이면 한점의 눈에 지나지 않는다. 대원견성하여 누진통이 되고 보면 일체가 청정법신불임을 알게 되어 막힘 없이 통한다. 그러므로 성리를 꾸어서라도 보라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은 걱정할 것 없다. 근원을 알아 녹이면 되는 것이다. 숨 한번 쉬는 동안 깨끗이 녹아 없어진다. 불보살들의 선(善)은 불보살 세계를 건설한다.고 하였다.
이참의 실천적인 방법을 자각한 이후로는 어떻게 실행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대산종사는 이참의 방법으로서 청정한 자성의 지혜광명을 깨우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참은 내적인 진리 참회를 이름인바 성품을 반조해 삼세의 모든 업장을 녹혀버리는 방법이니, 첫째 걸림없는 선정에 드는 것이요. 둘째 염불삼매에 드는 길이요. 셋째 송주삼매에드는 길이다. 청정한 지혜는 다 선정으로부터 나는 것인바 혜일慧日이 올라야 일체 음기가 높고 사기가 제거되어서 업장이 물러나는 것이다.’고 밝힘으로써 선정과 삼매로써 자성의 지혜 광명으로 업을 녹히고 무명에 가린 삼독심을 녹히는 길을 제시하였다.
이와 더불어 예타원 전이창 종사는 ‘오직 한가지 길로써 참회 정진으로 일심 청정하면 자성이 청정하여 숙업을 자멸시킬 수 있으며, 삼독심은 단전토굴에서만 녹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청정한 지혜는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염불삼매에 들고 선정삼매에 들고 주송삼매에 들어서 죄복이 돈공한 그 자리인 단전토굴에 들어야 그 힘으로 죄업의 씨앗인 무명을 녹히고 삼독심을 녹힐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김안심은 이러한 ‘원불교에서는 삼매의 경지는 동정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동할 때는 무시선 무처선 영육쌍전 이사병행 처처불상 등의 교리를 실천하는 경지를 말한다.’고 하여 정할 때의 삼매수행 뿐만 아니라 동할 때의 삼매도 있음을 조명하여 원불교의 참회는 동정양면에 두루 원만하게 노력할 수 있는 길이 있음도 조명하였다.
소태산은 위와 같이 사참과 이참을 병행하여 참회를 지극정성으로 하고 보면 ‘밖으로 모든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자신의 탐·진·치를 제거할지니라. 이같이 한 즉, 저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냉수도 많이 붓고 밑에서 타는 불도 꺼버림과 같아서 아무리 백천 겁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해 진다.’고 하였으며, ‘공부인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 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중략)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죄업을 마쳤다 할 수 있다.’고 하여 자성불을 깨치면 ①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②천업을 임의로 한다 ③생사를 자유로 한다 ④취사증애에 끌릴 것이 없다 ⑤삼계육도가 평등일미요 ⑥동정 역순이 무비삼매다 하였다. 이것이 이른 바 불조의 참회요. 대승의 참회라 하여 가히 죄업을 마친 경지의 영원한 참회를 제시하였다.
정산종사는 참회의 결과에 대하여 ‘사참의 결과는 첫째는 악업이 날로 소멸함이요, 둘째는 선업이 날로 증장함이요, 세째는 세간 복이 계속됨이며, 이참의 결과는 육도 일미의 극락을 수용하게 됨이니라.’ 하였으며 대산종사는 ‘내 한마음 참회 반성할 때 천지신명이 감응하여 삼세 업장이 청정해진다.’고 하였다.
Ⅲ. 기독교의 회개사상과 원불교 참회사상의 비교
이상으로 기독교의 회개사상과 원불교의 참회사상을 함께 고찰하였다.
위의 고찰을 통해서 살펴본 원불교의 참회사상은 소태산이 깨달은 불생불멸의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인 일원상의 진리에 그 근본이 있다.
소태산은 불생불멸의 이치를 따라서는 죄성이 본래 공한 것이고 업은 본래 무명이기 때문에 마음이 멸함을 따라 반드시 사라지는 자기구원의 길이 있음을 제시하였다.
또한 인과보응의 이치를 따라서는 음양상승의 도를 따라 존재계의 모든 존재는 상호작용하여 업을 주고받는 것이 틀림이 없으나, 이러한 업을 주고받는 작용 또한 대소유무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상호작용을 따라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치에 맞게 참회하고 불공함으로써 각자의 천업을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의 원리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그로써 소태산은 사참과 이참의 두 가지 참회의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이러한 참회의 양면을 지성으로 한다면 임의로 천업을 돌파하고 심신과 생사의 자유를 임의로 할 수 있음을 피력하였으며,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병진하는 구체적인 길을 함께 제시하였다.
이러한 원불교의 참회사상을 기독교의 회개사상과 비교해보면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공통점은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다시는 죄과를 범하지 않기를 다짐한다는 근본적인 작용에서의 공통점이 있다. 또한 그러한 회개의 방편으로서 강조하고 있는 개심과 거듭남은 인지적 측면과 행위적 측면 양쪽을 함께 고쳐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점에서 원불교의 이참과 사참과 큰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한 편으로는 마음의 표면적 측면과 근본적 측면 양쪽을 함께 닦아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사참과 이참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종교는 교리의 대전제에서부터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원불교에서 참회를 하는 주체는 언제까지나 자기 자신이고 참회의 결과로 죄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도 자신이다. 하지만 크리스트교는 회개는 인간의 영역에서 노력하는 것이지만 구원을 내려주는 것은 인간이 아닌 신의 은총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원불교에서 참회를 해야 하는 이유는 죄업으로 인해서 자신이 고통받고 나와 함께 하는 이웃존재들과 진리에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즉, 지난 날의 죄업을 반성하고 나의 죄업으로 인해 고통받은 여러 이웃들과 진리 전에 참회하는 것이 참회의 목적인 것이다.
반면에 크리스트교에서 회개를 해야 하는 이유는 원불교의 참회의 이유와 다르다.
크리스트교에서 회개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신과의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신과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시켰기 때문.’이지 ‘내가 이웃에 죄를 지어서 피해를 입혀서 고통을 주었거나 하는 것’은 회개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크리스트교에서 ‘죄’가 ‘죄’가 되는 이유는 ‘신의 뜻을 어긴 행위이기 때문’이지 ‘그 행위 자체로 인해서 누군가가 고통 받거나 자신이 해를 입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회개는 하나님 앞에 죄지은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지 죄지은 당처에 직접 사과하고 처벌을 받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죄 지은 당처에 직접 사과하고 처벌을 받는 것은 회개의 영역이 아니라 ‘회개 이후 개인의 선택’의 영역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원불교에서는 참회를 하여 그 행위로 ‘죄 지은 당처에 직접 불공’하지만 크리스트교에서는 회개하여 거듭나면 ‘그 영광을 신에게 돌리는’ 차이점이 있고 볼 수 있다.
즉, 크리스트교의 회개와 원불교의 참회는 표면적인 부분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결론
2019년 8월부터 촉발된 일본에 대한 불매운동 과정을 보면서 여러가지 원인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한국인들을 분노케 하고 세계인으로부터 질타를 받게 한 가장 큰 원인은 일본의 ‘양심없음’, ‘후안무치한 태도’라고 정리할 수 있었다.
일본은 스스로가 반성했다고 주장하지만 거기의 어디에도 피해자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고, 어떻게 이를 배상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반성했는데 왜 자꾸 지저분하게 매달리느냐고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역으로 질타하며 스스로 가진 알량한 힘을 믿고 힘으로 찍어누르려 했기에 촉발된 사태가 지금의 현 상황이다.
이런 사회현상의 일면만 보아도 제대로 참회하지 않으면 어떠한 벌을 받게 되는지, 참회할 줄 모르는 개인과 국가에게는 고립과 패망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실감하게 되었다.
그 동안 재래종교와 윤리의 참회사상은 개인의 교정적인 측면에서만 국한되어 ‘같은 죄를 더 이상 짓지 않는 것.’, ‘깊이 반성하여 사고방식을 고치는 것.’같은 1,2차원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그러한 낡은 방식의 참회로는 복잡다난한 인간사 속에서 시비와 이해, 케케묵은 갈등과 증오, 원망, 복수가 반복되는 현상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해결하지도 못한다.
더욱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참회의 방법. 그것은 죄지은 당첨에 직접 참회하여 묵은 원한과 업장을 함께 해소할 수 있는 해원의 위력까지 함께 겸비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원불교의 참회사상은 기존 종교의 참회사상의 좋은 점에서 더 나아가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참회의 바른 지표를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그 차별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 끝 >
참고문헌
인용 경전문구
『정전』, 제 2 교의편, 제1장 일원상, 제1절 일원상의 진리.
『정전』, 제 2 교의편, 제2장 사은, 제4절 법률은.
『정전』, 제 3 수행편, 제3장 염불법, 제1절 염불의 요지.
『정전』, 제 3 수행편, 제8장 참회문.
『정전』, 제 3 수행편, 제10장 불공하는 법.
『대종경』, 제5인과품, 제2장.
『대종경』, 제5인과품, 제16장.
『예전』, 제2가례편, 제7장 재(齋), 종재.
『예전』, 예문편, 제1부 통용경문(通用經文) 7. 참회게 懺悔偈.
『정산종사법어』, 제6경의편, 제32장
『정산종사법어』, 제6경의편, 제33장.
『대산종사법어』, 제2교리편, 제72장.
『대산종사법어』, 제4적공편, 제7장.
『대산종사법문집 제1집』, 정전대의, 제13장 참회문.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2편 교법, 제18장.
『구약성경』, 창세기 2장 8절~3장 24절. 시편 51장 3절.
『신약성경』, 마태복음 16장 24절. 요한복음 3장 3절. 요한복음 17장 1~5절.
사전류
국립국어원,『표준국어대사전』 https://stdict.korean.go.kr/main/main.do (2019.03.23)
간행물
광덕 스님 전집 편찬위원회(2009),『광덕스님 전집 3, 반야심경·보현행원품 강의』, 251~252, 260, 불광출판사.
- Swedenborg. 김지우 역(2010), 『기독교 기본신앙』, 149, 161~162, 한국새교회.
Alister E.McGrath 外. 전의우 역(2012) “The Portable Seminary(한 권으로 배우는 신학교)』, 182, 규장.
신도형(2010),『교전공부 수행편』, 235, 237, 241, 원불교출판사.
류성태(2009),『정전풀이 上』, 237, 272, 원불교출판사.
이성전 外(2018), 『주석 원불교정전』, 89,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전이창(1992),『참회』, 49~50, 원불교출판사.
논문
김도공(2012), “참회 수행을 통한 현대인의 불교적 치유”,『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53):204~207. 원불교 사상연구원.
김안심(1994), “원불교 참회문 연구”, 14, 16~20, 21, 29, 33, 34, 35, 원광대학교 원불교학대학원.
이창곤(세현)(2014), “정전 참회문의 교리적 의미와 지도법 연구”, 7~9,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권덕규(2008), “원불교 참회에 대한 연구-기독교 회개와 원불교 참회의 비교를 중심으로”, 9,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이원탁(병재)(2001), “참회문 소고”, 7~9, 원불교대학원대학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