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의 남녀평등 사상과 실천에 관한 연구
허선재
< 목 차 > | ||
Ⅰ. 들어가는 말
1. 연구 목적 2. 연구 방법 Ⅱ. 소태산의 남녀평등 사상적 배경 1. 역사적 배경 2. 교리적 배경 Ⅲ. 남녀권리동일을 중심으로 한 소태산의 남녀평등 실천 1. 여성 교역자 배출 2. 남녀평등의 교단 조직 Ⅳ. 맺는 말 |
Ⅰ. 들어가는 말
- 연구 목적
현재 세계는 페미니즘의 물결로 여성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한 운동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지난 2017년 10월 미국에서 하비 와인스타인 감독의 성추문을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발단으로 이제까지 성범죄 피해 받아왔던 이들이 ‘성범죄를 더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Me Too(나도 고발한다)’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피해 사실을 SNS에 공개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나라에도 확산되어 2018년 1월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국장의 성추행을 폭로한 것을 계기로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근대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성(性)에서 기인된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운동이 꾸준히 있어왔다. 그 결과 여성의 참정권, 투표권, 재산권, 교육권 등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많은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완전히 남녀가 평등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가부장제의 잔재와 성차별적 관념이 남아있으며, 여성은 이러한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현재 남녀 간의 불화와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이때에,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크게 두 가지라 생각된다. 하나는 가부장제 철폐이고, 다른 하나는 성 고정관념 타파이다. 진실로 남성과 여성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선 현재 남아있는 가부장제의 잔재와 성차별적 관념을 타파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이 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성과 남성 함께 협력하고 화합해야만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일구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제도의 불합리함과 관념을 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런데 뜻밖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근대사에서 불평등한 인식을 깨고 여성문제 해결에 앞장섰던 사례가 존재한다. 원불교를 창립한 교조 소태산 대종사(1891~1943)의 남녀평등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소태산의 남녀평등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진정한 남녀평등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앞으로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찾아보고자 함이 본 논고의 연구 목적이다.
- 연구 방법
소태산은 여성에 대한 사회제도의 억압과 성관념적 차별이 만연했던 근대 조선사회 속에서 여성을 가부장제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예속적인 존재에서 독립적인 존재로 이끌어내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인식 속에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서있었던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선행연구 된 논문을 보면 구훈모의 「원불교 여성교역자의 활동에 대한 연구:남녀평등 사상의 실천을 중심으로」, 「성평등적인 원불교의 교리체계와 원불교학의 과제」, 민현주의 「원불교 남녀 평등사상과 실천에 관한 연구」, 하정남의 「한국 신종교의 남녀평등사상에 관한 연구-소태산의 탈가부장적 종교운동을 중심으로-」, 「페미니스트 소태산과 남녀공동대표제」, 「원불교 남녀평등의 이념」 등이 있다. 그동안에도 원불교 교리의 남녀평등 사상을 조명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남녀평등을 이룰 수 있는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온 것이다.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하여 사회적 관심이 뜨거운 지금, 우리는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지침 삼아 나아가야 할지 살펴보고, 이에 대한 실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다만 현실에 나타난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에는 필자의 역량이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그래서 본 논고에서는 먼저 소태산 대종사의 남녀평등 사상이 비롯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교리적 근거를 살펴보고, 남녀권리동일의 교리를 근거로 한 남녀평등 실천 사례를 다룰 것이다. 끝으로 소태산의 남녀평등 사상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하여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Ⅱ. 소태산의 남녀평등 사상적 배경
- 역사적 배경
한국 근대사를 살펴보았을 때, 소태산(1891-1943)이 활동했던 19세기 중엽의 조선은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대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밖으로는 서구의 근대문명이 밀려들어오고, 안으로는 유교 사회의 폐단이 깊어져 요동치는 변화의 물결 속에 사회는 매우 불안정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민중들은 고통에 신음하며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지주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들의 소망에 부응하여 후천개벽사상을 기치 아래 여러 신흥민족종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후천개벽사상은 지금까지의 어둡고 힘든 세상을 선천(先天)이라고 보고, 앞으로는 인권이 존중되고 모든 민중이 다함께 잘 살 수 있는 후천(後天)이 도래한다는 의미이다. 후천개벽사상에서 주장하는 평등세계 건설은 당시 조성여성들에게 억압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후천개벽사상을 주장하는 종교의 맥락은 천도교, 증산교, 그리고 원불교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소태산은 깨달음을 얻고 당시 시국을 살펴보았을 때, 사람들의 인심은 향락과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온통 흘러가고 있었다. 사회는 부당한 의뢰 생활로 놀고먹는 폐풍이 가득하였고 지도자는 일시적 명예에 끌려 사심으로 일을 그릇되게 만들어 세상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소태산은 지금 세상이 전에 없던 문명한 시대가 되었다 하나 한갓 그 밖으로 찬란하고 편리한 물질문명에만 도취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에 따르는 결함과 장래의 영향이 어떠할 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소태산은 반상, 적서, 노소, 남녀, 종족의 불합리한 차별 제도로 인한 사회구조의 폐단을 언급하며, 원기 13년(1928년) 4월에 경성지부 교무로 있던 정산과 함께 서울 계동에 있는 구타원 이공주의 자택으로 가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 대한 설법을 한다. 이 법문은 『월말통신』 1호에 이공주 수필 「약자가 강자되는 법문」 라는 제목으로 실린다.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소태산은 자리이타의 도가 아닌 힘의 논리로써 그동안 강자는 약자를 철저히 탄압하고, 약자는 자력을 키우는 대신 강자를 원수같이 여기며 희생되어 왔던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소태산이 법문할 당시 동행한 정산을 제외하고는 법문을 받들었던 민자연화, 이성각, 이공주, 이철옥, 이현공, 성성원, 이동진화 등 모두 여성 제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미망인, 이혼녀 등 당시의 가부장제 모순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던 여성들이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소태산은 여성 제자들에게 가부장제로 인하여 남편으로부터 자신이 부당하게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여,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할 수 있는 자력 있는 이가 될 것을 당부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소태산은 과거에는 도가나 정부나 민간에서 각각 차별 세우는 법을 주로 하여 여러 사람을 다스려 왔지만 돌아오는 세상에는 어떠한 처지에서나 그 쓰는 법이 편벽되면 일반 대중을 고루 화하게 하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 회상에서는 재가 출가와 남녀 노소를 물론하고 대각한 도인이 나면 다 여래위로 받들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펼치고자 하는 법은 남녀노소 함께 발전해가는 길이며,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개척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 교리적 배경
1) 일원상의 진리 : 성품에는 차별이 없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사회에서 여성은 가부장적인 종교에 의해 남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고 차별이 일상화된 예속적인 삶을 영위해왔다. 종교가 여성의 본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그 종교여성뿐만 아니라 일반사회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신화에 근거하여 여성은 이브의 속성에 근거하여 남성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유교는 여자와 색(色)을 동일시하고 군자가 도를 닦는 데 해를 입지 않도록 멀리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였다. 불교는 여성이 죄를 더 많이 짓는 본성에 비추어 남자보다 훨씬 많은 계율을 지키도록 규정하였고, 이슬람교의 여성들은 남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다. 서양과 동양의 종교전통들은 여성은 남성보다 낮거나 더 나쁘게 보는 가부장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으며 종교들의 여성본성에 관한 상징은 주로 죄나 악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와 석가의 말씀을 담은 성전들이 거의 후대 제자들에 의하여 기록되고 편찬됨으로써 사회 속의 제도적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본질적인 측면이 비본질적인 측면에 의하여 왜곡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1916년 4월 28일 소태산이 대각을 이룬 후, 그가 얻은 깨달음은 기존 여성관을 전환시키게 된다. 「정전」의 ‘일원상의 진리’에 따르면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일원은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성품을 표현한 자리이다. 즉, 우주에 있는 온갖 사물을 이루는 근원과 시방 삼세의 모든 불보살과 성현들의 마음자리나,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성품은 본디 하나(一)의 원만구족(圓)한 그 자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태산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각 이름이 다를 뿐 그 안에 바탕하고 있는 성품자리는 분별과 차별이 없고, 선악 귀천이 없다고 보았다. 이 자리에서 비추어보았을 때, 여성은 저열하고 낮은 존재가 아니라 남성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을 가진 존귀한 존재이다.
현재 원불교에서는 일원상의 진리를 최고 종지 삼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법신불일원상을 모시고 있다. 여기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두가 원만구족한 성품이 갊아있는 완전한 존재라면 왜 수행이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정산은 “법신불이라 함은 곧 만법의 근원인 진리불을 이름이요, 보신불과 화신불은 그 진리에서 화현한 경로를 이름인 바,” 라 하였다. 정산은 인간을 법신불이 화현한 화신불로 본 것이다. 그리고 화신불을 두 가지로 나누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간다. “화신불 가운데에는 진리 그대로 화현한 정화신불이 있고 또는 진리 그대로 받지 못한 편화신불이 있으니, 정화신불은 곧 제불 제성을 이름이요 편화신불은 곧 일체 중생을 이름인 바, 비록 지금은 중생이나 불성만은 다 같이 갊아 있으므로 편화신불이라 하나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고 바른 때에는 곧 내가 정화신불이요 삿되고 어두울 때에는 편화신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라.” 이를 미루어보아 제불제성이나 일체중생이나 불성만은 다 같이 갊아 있는 것은 동일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진리 그대로 화현한 정화신불로써 존재하기도 하고, 진리를 그대로 받지 못한 편화신불로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삿되고 어두운 마음을 돌이켜 청정하고 바른 마음으로 돌리는 수행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위의 내용은 「일원상서원문」에서 일부 발췌한 것 이다. 현재 이 일원상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우리 어리석은 중생(=편화신불)은 마음 공부로 진급하여 일원의 위력을 얻고 체성에 합일한 참 부처(정화신불)가 되자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모두에겐 일원상의 진리를 깨칠 수 있는 불성이 갊아있다. 일원상을 신앙하고 수행함으로써 그 불성을 발현시켜 일원과 합일할 때 더 이상 선악도, 귀천도, 차별과 분별도 없는 그 자리에 비로소 머무르게 될 것이다.
일원의 진리를 근거로 수행을 하게 하는 소태산의 가르침 속에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긍정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소태산은 인간을 나타난 대로의 남자·여자, 귀인·천인, 어른·아이, 흑인·백인으로 보기 이전에 그들의 본성이 원래 궁극적 진리인 일원과 다름없는 또는 우주심인 법신불과 다름없는 존재로 보았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 차이를 남성이나 여성성으로 고정시켜 놓은 가부장제 문화의 고정관념이나 모든 차별제도가 아무런 진리적 근거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소태산이 불법으로 바탕하여 인간을 개조하고 사회를 개조하려 한 이유라고 본다.
그러므로 사회생활을 하는 중에 만일 우리가 혹 자타의 분별이 일어나서 무슨 일에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 있거든 바로 자성 반조하여 원래에 자타 없는 그 일원의 자리를 생각할 것이요, 때로 혹 차별의 마음이 일어나서 나의 아랫 사람을 업신여기는 생각이 나거든 바로 자성에 반조하여 원래에 차별 없는 그 평등한 자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2) 사은 : 모든 것은 은혜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소태산은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 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고 이야기 하였다. 사은사상의 핵심은 현상세계에서 보았을 때 상호의존의 관계인 동시에 “없어서는 살지 못하는” 생명적인 관계로서 이 은사상의 윤리는 존재간의 차별적 가치개념을 넘어서는 행동 윤리로 작용한다. 이러한 가운데 사은은 크게 천지·부모·동포·법률의 네 가지 관계성으로 나타난다. 우주 만유는 천지·부모·동포·법률이라는 네 가지 덕을 입지 않고는 그 생명을 지속할 수도, 그 형각을 보존할 수도 없다.
원불교는 일원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므로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연과 인간, 사회까지도 모두 하나의 원리로 해석, 파악하고자 한다. 모든 생명체들은 살림과 보살핌으로 생명을 일구어내는 근원적인 관계 맺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태산은 우리가 천지와 부모와 동포와 법률에서 은혜 입은 내역을 깊이 느끼고 알아서 그 피은의 도를 체받아 보은행을 하는 동시에, 원망할 일이 있더라도 먼저 모든 은혜의 소종래를 발견하여 원망할 일을 감사함으로써 그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정산도 “이 몸이 사은의 공물임을 알 것이요, 그러므로 보은은 의무임을 알 것이요, 인생의 참 가치는 이타(利他)에 있음을 알 것이요, 자리(自利)의 결과와 공익의 결과를 철저히 자각할 것이니라.” 라고 하였다. 즉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그 속에서 피은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세상에 보은하여 은혜가 널리 고루 미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은의 윤리는 세계의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상대적이거나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나를 살려주는 생명의 관계로 인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은혜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수직적인 사회 구조를 이루게 만들었던 가부장제 문화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남성은 우월한 존재로서 군림하고, 여성은 열등한 존재로서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 속에서는 너와 나, 강자와 약자, 귀함과 천함, 선과 악의 차별만이 생겨나고 관계의 단절이 일어난다. 그러나 자타의 국한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하는 은혜로운 관계로 여성을 인식하게 된다면 차별과 불합리는 사라지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소태산은 일원상을 신앙하는 방법으로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에 응할 것이며, 천만 사물의 당처에 직접 불공하기를 힘써서 현실적으로 복락을 장만할 것을 당부하였다. 나와 더불어 사는 모든 것에 죄복을 직접 내려주는 사실적 권능이 있음을 깨달아 보은하며 불공할 때, 기존의 차별과 불합리한 제도를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남녀권리동일을 중심으로 한 소태산의 남녀평등 실천
남녀평등의 문제는 외적인 사회제도와 내적인 정신자각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완전한 개혁이 된다고 하였다. 원불교의 여성해방에 관한 프로그램은 「원불교전서」 중에서 사요(四要)의 ‘자력양성’(「남녀권리동일」)의 조항, 대종경 ‘인도품(人道品)’ 43장, ‘전망품(展望品)’ 28장, 예전(禮典) 가례편 제4장 ‘혼인(婚姻)’, 제6장 ‘상장(喪葬)’, 가례예문편(17,18,19,20,21), 「정산종사법어」 중 세전(世典)에서 ‘가정’, ‘사회’, ‘남녀의 도’ 등 경전의 여러 부분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중에서 사요의 「남녀권리동일」은 전서 중 소태산이 직접 감수한 정전 가운데 수록되어 있어 원불교의 핵심교리로서 소태산의 남녀평등관을 말해주는 단서가 된다.
소태산은 한 가정은 한 나라를 축소하여 놓은 것이요, 한 나라는 여러 가정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보았다. 이에 나라의 병폐가 곧 가정의 병폐로 이어짐을 진단하고 불합리한 차별 제도를 없애기 위해 사요를 제창한다.
1920년에 인생의 요도로서 처음 발표된 「사요」는 부부권리동일(夫婦權利同一), 지우차별(智愚差別), 무자녀자타자녀교양(無子女者他子女敎養), 공도헌신자이부사지(公道獻身者以父事之)이다. “부부권리동일”은 1932년 보경육대요령을 발간하면서 “남녀권리동일”로 그리고 현재 원불교 교전에서는 “자력양성”으로 고쳐 남녀차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차별제도를 넘어서도록 그 의미를 확대하였다. 부부권리동일을 사회의 남녀권리동일을 이루기 위한 기초로 보았고, 남녀권리동일은 남녀가 서로 의존생활을 버리고 자력생활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으로 인권평등을 위한 기초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육대요령》에 수록된 ‘남녀권리동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녀권리동일의 강령>
사람으로서 면할 수 없는 의무와 책임을 남녀가 같이 하자는 것이며, 남자는 여자로
인하고 여자는 남자로 인하여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실현치 못한다는 원심(怨心)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니라.
<과거 조선여자의 생활조목>
①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에게 자녀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음이요.
② 자기가 낳아준 자녀에게도 차별적 대우를 받게 되었음이요.
③ 사람인 이상에는 반드시 받아야할 교육을 받지 못했음이요.
④ 사람인 이상에는 인류 사회를 면치 못하는 것인데 사회의 권리를 얻지 못했음이요.
⑤ 사람인 이상에는 반드시 수용하여야할 재산의 권리가 없었음이요.
⑥ 그 외에도 자기의 심신이지마는 일동일정에 구속과 압박을 면치 못했음이니라.
<남자로서 남녀권리동일 장려의 조목>
① 결혼 후 부부간 물질적 생활을 각자 할 것이요.
② 여자로서 좌기(左記) 남녀권리동일 준비의 조목이 충실하여 남자에 승(勝)할 시는
그 지도를 받을 것이요.
③ 기타 모든 일을 경우에 따라 처결하되 과거와 같이 여자라고 구별할 것이 아니라
남자와 같이 취급하여 줄 것이니라.
<여자로서 남녀권리동일 준비의 조목>
① 인류 사회에 활동할만한 교육을 남자와 같이 받을 것이요.
② 직업에 근실하여 생활의 자유를 얻을 것이요.
③ 생부모의 생전 사후를 과거 장자의 예로써 같이 할 것이요.
④ 남자의 독특한 사랑과 의뢰를 구하지 말 것이요.
⑤ 우기(右記) 준비조목 4조가 충분치 못하여 남자에 미흡할 시는 그 지도를 받을 것이
니라.
남녀권리동일의 강령을 살펴보면 소태산이 말한 새로운 사회의 남녀는 구시대의 차별을 극복한 독립된 인격체로서, 각자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율적인 활동을 하는 남녀이다. 또한 여성은 남자에게 종속됨이 없이 자신의 능력대로 이상과 포부를 실현할 수 있는 열린 사회의 해방된 여성상을 지향하고 있다.
다음으로 과거 조선여자의 생활조목을 살펴보자. 과거 조선시대 여성은 친부모를 부양하지도 못하고 자녀에게도 차별을 받는 존재였으며, 교육권·사회권·재산권도 없었을 뿐 더러 심신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당시 여성은 무자력하게 전적으로 의뢰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소태산은 이러한 행태를 비판하며 사람으로서 면할 수 없는 의무와 책임을 각각 남자로서, 여자로서 남녀권리동일을 이루기 위한 준비 조목을 제시하여 각각 자립적으로 살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소태산은 여성들의 의식변화와 함께 남성들의 의식변화와 협조가 있을 때 남녀평등이 가능해진다고 본 것이다.
소태산의 이러한 남녀평등 사상은 이후 원불교 교단 활동에서도 다음과 같이 실천된다.
1) 여성 교역자 배출
재래 종교의 가부장적 이념 아래에서는 성과 속, 영과 육을 이분화하여 여성의 몸을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여성은 성직의 길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태산은 일원주의의 교법을 바탕으로 남녀권리동일을 주장하였고, 이는 곧 여성 교역자의 배출과 남녀평등 교단 조직으로 이어지게 된다.
1929년 보통단 단장이었던 이청춘은 ‘전무출신 여자수용에 관한 건’이라는 의견안을 제출하였다. 이 의견을 수용한 소태산은 남자와 동등한 자격의 여자전무출신 제도를 마련하게 된다. 여자 전무출신제도의 제안은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남자를 상대로 자유를 취하고, 동등권만을 구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동등권조차 갖지 못한 때에는 이 동등권을 갖는 것이 당면과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남녀평등의 교리가 있고, 남녀 모두가 이 교리를 배우고 가르치던 교단의 분위기와 혁신적인 사상으로 제자들을 지도한 소태산의 선각자적 인식에 힘입은 바 크다.
여성으로서 전무출신을 지원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상당한 인원과 출자금이 모이면 본관에 공동거주하여 공부와 사업을 함께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원불교의 목적에도 부합하고, 남녀동등권을 실현하는 기반이 되고 근거가 된다고 보고 있다. 어떤 일을 막론하고 계획과 이상으로만 이루기는 어려우므로 지금부터 발기인을 모집하여 전무출신 지원자 접수를 받고, 출자금을 받아야 확고한 계획을 세울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남자들에게 어떠한 부담을 지우는 것도 아니고, 다만 여성 자신들이 실천할 수 있는 쪽으로 방향제시를 함으로써, 여성들의 적극적인 실천의지와 자신들의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표 – 1> 초기 여성 제자들의 귀의와 활동
이름 | 생몰년대 | 입교시기 | 연원 | 입교전 생활상태 | 활동내역 |
양하운 | 1890-1973 | 1916. | 소태산 | 소태산의 부인 | 교단 창립에 공헌 |
이원화 | 1884-1964 | 1912. | 소태산 | 최초의 제자 | 대각하기 전에 소태산 시봉. 영광교화 |
이청풍 | ?-? | 1920.1. | 송적벽 | 증산교 신도였음 | 봉래산에서 시봉함 |
장적조 | 1878-1960 | 1921. | 가정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귀의 | 부산하단에서 법회보기 시작함 (원기16년 만주목단강 교화) | |
최도화 | 1883-1954 | 1922. | 송규 | 동학사, 화엄사 등의 화주노릇을 함. | 전주, 진안 지방의 교화에 많이 공헌함 |
이동진화 | 1894-1968 | 1926.6.20 | 박사시화 | 결혼생활함 | 교단의 어머니 역할 |
권동화 | 1904-2005 | 1926.4.29 | 최도화 | 일반 가정 부인 | 강연, 입선성적 좋음 |
박사시화 | 1867-1946 | 1923.9. | 최도화 | 喪夫하고 화주 됨. | 서울교화의 연원 됨 |
민자연화 | 1859-1932 | 1924. | 이공주 | 불교신자 | 서울교당 창립에 공헌 |
김삼매화 | 1891-1944 | 1924. | 이동진화 | 식당근무 | |
이공주 | 1896-1991 | 1924. | 박공명선 | 喪夫.여성해방誓願 | 회보 편집 발행.
법설 가장 많이 기록. 경제적, 정신적 공헌 多 |
김영신 | 1908-1984 | 1925.10. | 이성각 | 여학교 졸업 | 교화일선에서 크게 활약. 최초의 교당교무 |
조전권 | 1909-1976 | 1927.10. | 조송광 | 기독교 신자. 장로였던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 입교. | 최초의 정녀.
전무출신 설통제일(說通第一) 교리강습 많이 함. |
이청춘 | 1886-1955 | 1924. | 최도화 | 기생, 소실 | 여자전무출신제 건의 |
오종태 | 1913-1976 | 1927.10. | 최도화 | 공원생활-학비마련 | 교화, 교육에 크게 공헌 |
양도신 | 1918-2005 | 1933.1.6. | 김기천 | 가사조력 출가결심 | 교화와 교육에 공헌 |
이경순 | 1915-1978 | 1925.10. | 이춘풍 | 공원생활-학비마련 | 뛰어난 교화활동 |
교단 초기에 이런 자각적인 여성교무들은 기혼자인 숙녀(淑女)나 미혼자인 정녀(貞女)를 막론하고 소태산의 남녀권리동일에 대한 가르침에 힘입어 출가 수행자로서의 교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최초로 새 회상 여성 교무의 문을 활짝 연 것은 공타원 조전권 선진으로, 이를 필두로 많은 여성 교역자가 배출되었다. 이들은 각 교당의 교무나 기관의 사무직 재직하기도 하고, 전문적으로 순교를 다니기도 하면서 기존에 보조역에 머물러있던 여성 사제의 역할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여성제자들이 교단내외에서 활개를 펴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도 남자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여성들의 소망을 수용할 수 있는 종교적 이념이 있었기 때문이며, 여성의 인간화에 대한 소태산의 정신적인 지지와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 남녀평등의 교단 조직
소태산은 남녀권리동일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조직에 관련한 법규를 제정하게 된다. 1931년 발행된 『불법연구회통치조단규약』에 「남녀구별의 조직」에서 “회원으로 단을 조직할 때에난 남녀를 구별하야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단을 조직하고 공부와 사업의 기관도 각각 설치하기로 함”이라 하였고, 「수위단의 조직급선거방식」에서는 “본단의 목적을 총감하기로 정수위단이라 명칭하고 남자로 일단 여자로 일단을 조직하야 모든 단의 원시가 되기로 함”이라 하여, 남녀동수로 수위단을 조직하여 교단의 최고의결기관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소태산은 다시 1943년에 여자수위단이 내정하였다. 그후 1945년에 정산종법사에 의해 여자정수위단이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원불교의 출가 재가 교도는 모두 교화단에 편입되어 있고, 교화단의 제일 상위단을 수위단이라고 하며, 수위단은 원불교 최고의 의결기관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수위단원의 자격은 교리에 대한 이해나 사업에 대한 공훈이나 시비에 대한 언론이나 신망, 실행이나 그 외의 어떠한 상식으로든지 단원 내 제일 우월한 자로서 조직한다. 이 수위단을 남녀 동수로 정하므로 남녀평등한 교단 운영을 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소태산의 남녀평등 이념은 교단 운영에도 반영되어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교헌에서는 수위단 기능과 조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종법사는 수위단원과 법강항마위 이상의 법사로 구성된 선거인단에서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원불교는 남녀의 계율 및 법위 획득에 차별이 없으므로 출가 재가의 여성들도 피선거권이 열려 있고 여종법사의 출현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태이다. 세계적으로 여성들의 최고위직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는 최근의 사회변화를 감안하면 50:50의 의결권이 보장되어 있는 수위단 조직에 비추어 제반조건이 성숙되면 여성이 교단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하는 시대가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원불교 조직은 최고 의결 기관에서부터 하부조직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평등하게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소태산은 기존 가부장제의 성 관념을 깨고 여성도 성직을 희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으며, 더 나아가 남자와 동등하게 교단의 주역으로 참여할 수 있는 남녀평등의 새 회상을 건설하였다.
소태산은 진리체계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나타나는 성차별을 개선하여 인권평등을 실현시키기 위해 직접 사요의 한 항목으로 ‘남녀권리동일’을 제정했으며, 교단의 직제를 편성할 때에도 여성들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참여를 권장하였다. 소태산 재세시의 초기의 교단 공동체에서는 남녀평등에 관한 주제로 남녀 모두에게 강연을 하게 하는 등 의식전환을 위한 노력과 함께 현실적으로도 남녀권리동일의 조항들을 실천으로 옮긴 사례를 많이 보여준다.
Ⅳ. 맺는 말
이 논문은 ‘남성과 여성이 참으로 평등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소태산의 남녀평등 사상적 면모를 공부하면서 인지가 점차 밝아짐에 따라 여성에 대한 인식은 계속해서 평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 현대 사회에서는 인권의 중요함과 평등의 개념을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 누구나 차별은 불합리한 것임을 안다. 그에 따라 인권과 평등에 대한 진지한 고찰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2018년, 현재 여성은 여전히 가부장제의 잔재와 성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소태산의 남녀평등 사상이 시대 상황 속에서 어떻게 혁신적으로 나타났는가에 주목하여 조선 여성에게 내려왔던 유교적 관행들을 타파한 사례를 주로 다루었다. 다만 당시 상황에 주목하다보니 현재에는 어떠한 제도적 모순점과 불평등이 남아있는가는 미제로 남겨놓게 되었다. 추후에 소태산의 평등사상과 다르게 내려오고 있는 교단적 관행도 함께 짚어보고 이에 대한 개선책을 논의해보겠다.
정산은 갈라지는 것으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단합하는 것으로 발전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나니, 남자계가 남자계만 생각하지 않고 여자계 일을 앞장 서서 협력해 주고 여자계가 여자계만 생각하지 않고 남자계 일을 앞장 서서 협력해 주며, 재가 출가와 노인 청년이 또한 다 그렇게 한다면 의리는 의리대로 서고 일은 일대로 잘 될 것이라 하였다. 또한, 이에 덧붙여 오직 그 일에 대한 시비만 표준할 것이요 남녀나 노소의 상을 표준하지 말며, 오직 그 대의를 표준할 것이요 자타나 원근을 차별하는 상(相)을 표준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아직 이 사회가 남녀평등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아직 그 하나의 자리에 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온갖 분별주착과 차별하는 상이 남아있는데 어떻게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규정과 틀을 부지런히 걷어내고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더욱 노력해야 한다. 나의 마음이 상대의 마음과 같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평등을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소태산이 염원했던 평등의 세상. 이제는 원불교 2세기의 주역인 우리가 실현시켜 나가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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