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선법의 종교성과 혁명성에 대한 고찰
– 동학과 관련하여 –
Ⅰ. 서론
1. 선행연구의 문제점 2. 연구방법
Ⅱ. 무시선법의 기본 : 좌선법
Ⅲ. 무시선법의 원리와 특징 1. 무시선법의 원리 1) 진공묘유 2) 동정일여 2. 무시선법의 특징 1) 삼학병진의 선 2) 정의실천의 선
Ⅳ. 무시선법의 새로운 조명 1. 무시선법의 종교성 2. 무시선법의 혁명성
Ⅴ. 결론 |
Ⅰ. 서론
본 논문은 소태산대종사의 무시선의 종교성과 혁명성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원불교 무시선법은 실생활과 현대사회에 가장 적합한 선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무시선법에 대한 종래의 이해와 연구는 삼학병진을 하는 선이라 주장하지만, 주로 정신수양 중심의 연구에 중점을 두거나, 결론적 부분은 마음에 자유를 얻는 선, 생활하는 선에 그치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는 무시선법의 종교성과 혁명성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종래와 달리 무시선법의 종교성과 혁명성에 주목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 고찰의 구체적 방법으로는 송천은의 「원불교의 선사상」 한기두의 「무시선의 본질」, 한기두의 「무시선법의 연구」, 한기두의 「무시선의 실제」, 김영두의 「원불교의 선사상」, 김영두의 「원불교선의 형성과정 고찰」, 김영두의 「소태산대종사의 선사상」, 송천은의 「원불교선의 기초적 입지」의 연구와, 길도훈의 『무시선법』의 저서에 근거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 선행연구의 문제점
무시선에 대한 선행연구를 분석해보면 최광현은 무시선 실천수행 방법에 있어서 유념공부는 공(空)에 바탕하여 그 일 그 일을 바르게 정견, 정행했는가를 점검하는 공부요, 마음을 챙기는 공부요, 일심을 모으는 공부이며, 무념공부는 진여를 자득케하는 공부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고, 무시선의 공부는 공(空)에 바탕한 삼학병진의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박희종은 무시선이란 삼학을 병진하는 선이지만, 그 중심(中心)은 정신수양에 있다며, 선의 목적이 마음의 자유로 명시되고 있다 하여, 선의 구체적인 방법 또한 수양의 방법이 중점적으로 설명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선행연구를 미루어 보면 무시선을 정신적, 수양적, 향내적(向內的)인 측면만을 강조한 경향을 볼 수 있다. 무시선은 삼학을 병진하는 선이고, 내적으로는 일심을 양성하는 것과 동시에 외적으로 정의를 실천하는데 그 강령이 있는데 몇 가지 선행연구를 분석한 결과 소태산이 무시선의 삼학병진의 특징을 말한 본의는 언급하지만, 내적인 수양, 내적 깨달음에 치우친 부분이 주로 엿보이고, 이는 곧 무시선법이 우리가 동정간 행함에 있어 공리공론(空理空論), 공관(空觀)사상에 흐르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었다.
조용한 곳에서만 안정하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불안정하게 되는 것은 병든 선이라 하며 무시선의 본질을 생활하는 선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이 또한, 동하는 가운데 개인적 정의실현을 통해 미시적인 생활에 적응하는 개념일 뿐 거시적인 사회적, 국가적 정의실현에는 조금 미흡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소태산은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데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에 돌아갈 뿐이요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며,, 불제자로서 불법에 끌려 세상일을 못할 것이 아니라 불제자가 됨으로써 세상 일을 더 잘하자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불제자가 됨으로써 세상에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그 불법을 활용함으로써 개인⸱가정⸱사회⸱국가에 도움을 주는 유용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이념은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에서도 강조되었지만 선의 실천에 있어서도 실천을 중시한 소태산의 본의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2. 연구방법
그러한 상황을 인지한 필자는 본고를 통해 먼저, 무시선의 기초가 되는 원불교 좌선법의 원리와 방법을 간략하게 고찰해 봄으로써 종래의 좌선법과는 다른 단전주법의 특징을 찾아보았다. 다음으로, 무시선의 전반적인 원리와 몇 가지의 특징을 통해 무시선에 대한 인식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바이다. 더 나아가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의 영향을 받은 소태산의 사상에서 동학이 지니는 종교성과 혁명성에 주목함으로써 무시선법의 종교성과 혁명성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무시선”의 개념과, 그에 담긴 종교성과 혁명성에 대해 아는 것이 무시선을 실천함에 있어 어떠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언급하려 한다.
Ⅱ. 무시선법의 기본 : 좌선법
무시선의 기본이자 출발은 좌선이다. 그런데, 원불교 좌선은 종래의 좌선과 다른 특징도 찾아 볼 수 있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좌선과 무시선을 같이 고찰하고자 한다. 좌선에 대한 고찰은 원리와 방법 및 특징 순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원불교전서], [좌선의 요지]에 의하면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 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식망현진(息妄現眞),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좌선의 중요한 원리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첫째는 식망현진, 수승화강에서 상호관계상의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식망현진, 수승화강이라 하면 별개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지마는 양자(兩者)는 상호 의존적이 관계에 있음을 좌선법에서는 밝히고 있으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또한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쉰다.]함을 들 수 있다. 각각 얻어지는 결과를 말한다면 식망현진에서는 심성수양을, 수승화강에서는 기질수양의 면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애써 구분해본 것뿐이지 양자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선을 하는데 있어서 마음을 단전에 주하면 생각이 잘 동하지 않고, 기운도 잘 내리게 된다. 그러므로 식망현진, 수승화강의 양면으로 얻어지는 바는 마음을 단전에 주하고 옥지(玉池)에서 나는 물을 많이 삼켜 내리면 수화가 잘 조화되어 몸에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지며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心丹)이 되어 능히 수명을 안보하는 것으로써, 선정(禪定)상으로나 위생상으로나 간에 양득되는 법이지마는 그 원리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즉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 즉 망념이 쉬기 때문이다. 이를 바꿔 말한다면 [망념이 일어난즉 화기가 오르고 화기가 오른즉 망념이 일어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망념과 화기는 흐린물 또는 번뇌로, 진성과 수기는 맑은 물이 솟아오르고 또한 맑은 물이 솟아오르게 되면 흐린물이 사라지게 됨과 같은 원리이다. 또한 화기는 덥고 탁한 기운이요, 수기는 맑고 시원한 기운이므로 즉, 단전주법을 통하여 망념, 즉 탁기는 가라앉히고 서늘하고 맑은 기운과 마음 즉 진성은 오르게 하는 우주의 원리에 바탕한 순환과 조화의 원리가 내포된 것이다.
둘째로, 수기와 화기의 순환과 조화속에서 음양상승(陰陽相勝)의 원리가 내재함을 찾아 볼 수 있다. 음양설의 원불교적 수용은 교전 [일원상 법어]에서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陰陽相勝)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와 대종경 인과품(因果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우주의 성⸱주⸱괴⸱공 (成住壞空)과 만물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생(四生)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六途)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恩生於害)로 혹은 해생어은(害生於恩)으로 무량세계를 전개하는 것처럼 음양상승의 이치가 나를 떠나 있는 원리가 아니라 곧 내안에 있으며 나의 심신작용에도 그대로 활용되어지며 이 결과 인과보응도 형성되는 등의 이치가 이 음양상승되는 이치와 같은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호흡에 있어서도 들이쉬는 숨이 음에 속한다면 내쉬는 숨은 양에 속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욱 유의할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음양상승은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는 측면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본적 관계는 그러하지마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생의 심신작용] 즉, 용심법에 따라서 얼마든지 새로운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기운은 마음에 따라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크게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화기는 오르는 성질이 있고 수기는 내리는 성질이 있지마는 마음작용 여하에 따라서 수기는 오르고 화기는 내리게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좌선을 통해서 수행의 목적 및 음양의 원리와 인과의 원리를 함께 간파할 수 있다고 본다.
[정전] 좌선법에서는 대체로 재래의 좌선과 상통하면서도 특징이 있는 9개조의 좌선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바른 자세로 기운을 고르는 조신(調身),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을 고르는 조식(調息), 망념을 쉬고 진성을 기르는 마음 고르기 조심(調心)이 있다. 그 원리는 적적성성이며, 방법은 단전주이다.
단전주선법은 종래 선가(仙家)의 두 가지 선법이었던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黙照禪)을 잘 조화시켜 장점을 활용한 혁신적인 방법이다.
[정전] 좌선법 중 [단전주의 필요]에 단전주의 필요성과 원리가 잘 제시되어 있다. 좌선이란 마음을 일경에 주하여 모든 생각을 제거함이지마는 그 실천상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다르게 제시되어 오기는 했으나, 간화선법과 같이 마음을 머리나 외경에 주한즉 생각이 동하고 기운이 올라 안정이 잘 되지 아니하나, 마음을 단전에 주한 즉 생각이 잘 동하지 아니하고 기운도 잘 내리게 되어 안정을 쉽게 얻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 단전주는 좌선에만 긴요할 뿐 아니라, 마음을 단전에 주하고 옥지(玉池)에서 나는 물을 많이 삼켜 내리게 되면 몸이 수기와 화기가 잘 조화되어 몸에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지며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心丹)이 되어 능히 수명을 안보할 수 있으니 이 법은 선정(禪定)상으로나 건강상으로 실로 일거양득하는 방법이 되는 선법이다.
이러한 단전주선법에 대한 소태산대종사의 입장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간화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혹 이 단전주법을 무기(無記)의 사선(死禪)에 빠진다 하여 비난을 하기도 하나 간화선은 사람을 따라 임시의 방편은 될지언정 일반적으로 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라 하고, ‘화두(話頭)만 오래 계속하면 기운이 올라 병을 얻기가 쉽고 또한 화두에 근본적으로 의심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선에 취미를 잘 얻지 못한다’고 했다. 따라서, ‘선을 할 때에는 선을 하고 연구를 할 때에는 연구를 하여 정과 혜를 쌍전’시키기 위해 원불교에서는 좌선시간에는 단전주선법으로 오롯이 좌선을 하고 좌선 후 정신이 맑을 때 화두연마를 권장하고 있다. 공적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맑은 정신으로 화두를 연마하기 때문이며, 분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단전주로 깊은 정에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전주(丹田住)선법을 취하여 수양하는 시간에는 온전히 수양만 하고 화두 연마는 적당한 기회에 가끔 한 번씩 하라는 것은 의두를 깨치는 방법이 침울한 생각으로 오래 생각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명랑한 정신으로 기틀을 따라 연마하는 것이 그 힘이 도리어 우월한 까닭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단전주법은 종래의 간화, 묵조 양선(兩禪)의 장점은 살려 쓰되 단점은 보완한 이상적인 선법임을 알 수 있다.
Ⅲ. 무시선법의 원리와 특징
앞 장에서 기술한 좌선이 정시(定時)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행하는 선이라면, 무시선은 때와 곳에 구애없이 동정간에 자성을 여의지 않는 산 선법이다.
한기두는 무시선이란 여러 가지 별명으로 실천하도록 제시하였다. [간단없이 행하는 선], [평소 공부심으로 사는 길], [심신의 원만한 수행], [삼학을 병진하는 선], [일 있을 때나 일이 없을 때나 수행하는 선], [마음 잘 닦아 마음 잘 쓰는 선], [경계 가운데 자성을 떠나지 않고 행하는 선], [일하면서 공부하는 법] 등 많은 별명으로 무시선의 뜻을 설명해 왔다.
이러한 무시선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대승적인 선법이므로 모든 수행은 결국 무시선으로 귀결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시선의 원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고찰할 수 있겠지만 본 논문에서는 진공묘유와 동정일여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1. 무시선법의 원리
1) 진공묘유(眞空妙有)
우주만유의 본원소식을 [진공묘유]로 표현한 것으로, 원불교 교전에서는 진공묘유란 말이 두 곳에 나오고 있다.
[일원상의 진리] 설명에서와 무시선법에 나오는 말이다. [일원상의 진리]에서는 일원상 진리가 진공묘유의 조화로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자재(隱現自在)한다는 구절에서 나오고 있다.
즉, 진공은 진리의 체요, 묘유는 진리의 용으로서 체와 용의 조화는 우주만유가 생성 자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시선법에서도 [참다운 선을 닦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아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라고 교시하였는데 여기에서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아]란 표현에서 바로 이것이 무시선의 원리요, 방법이 됨을 알 수 있다. [진공]은 곧 일원의 체성임과 동시에 모든 불보살이나 중생의 성품의 체가 된다.
정산종사는 [불경의 정수는 공(空)이요 대종사께서도 공원정(空圓正)을 말씀하시었나니 그대들은 공의 원리를 알고 공의 진리를 체 받아 항상 청정한 마음을 닦아 기르며 무사(無私)한 심념을 닦아 행하라.] 라고 하여 공의 원리를 표준하여 그러한 마음 활용까지를 당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공으로 체, 즉 본성을 삼고 묘유로 밝은 지혜의 등불을 삼아 밖으로는 천만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는 외정정을 취하고 안으로는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일이 있으되 동에 끌리고 착하는 바가 없고, 일 없을 때 정한다 해도 정에 주착하는 바 없는 내정정을 취해야 한다., 동정간에 진공묘유의 마음을 놓지 말고 그 일 그 일, 한순간 한순간을 간단없이 계속하는 공부가 곧 무시선공부의 첫 번째 원리요, 방법이다.
2) 동정일여(動靜一如)
동정일여란 동정간불리자성(動靜間不離自性) 공부를 의미한다. [동정일여]는 [정전]의 교리표어에도 제시되어 있는 표어의 하나로써 교리전반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동(動)은 우리 육근에 일이 있는 때 유사시(有事時), 정(靜)은 육근에 일이 없는 때 무사시(無事時)를 이르는 말로서 동정일여는 곧 우리가 일을 하는 동시에도 공적영지의 자성, 즉 진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일을 하지 않는 정시에도 그 진리를 떠나지 아니하여 일동일정이 진리에 부합되고 자성에 부합되는 것인바, 이는 곧 공부인의 구경처로 성인의 경지이며, 소태산은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동정일여의 경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을 두고 외정정 내정정의 무시선 공부를 계속한 결과이다. [무릇 사람에게는 항상 동과 정 두 때가 있고 정정(定靜)을 얻는 법도 외정정과 내정정의 두 가지 길이 있나니, 외정정은 동하는 경계 중에서 반드시 대의(大義)를 세우고 취사를 중심으로 하는 마음공부요, 내정정은 일이 없을 때에 수양을 중심으로 하는 마음공부이나 이는 서로 근본이 되어 내외를 병진하는 참다운 공부법이다.]
무시선법에 의하면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이 같이 한즉 모든 분별이 항상 정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이 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대승선(大乘禪)이요 삼학을 병진하는 공부법이니라.]라고 밝힌 바에서도 무시선의 원리의 하나로서 동정일여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동시에나 정시에나 한결같이 공부심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니 예를 들면, 앞에서 고찰한 진공묘유와 공적영지에 의한 마음, 또는 일심을 놓지 않는 마음을 동정간에 한결같이 갖고 생활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동정일여의 원리를 알아 무시선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결국 삼학병진으로 외정정과 내정정공부를 계속해야 되는 것이다.
무시선의 강령에 의하면, [육근(六根)이 무사(無事)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고 했는데 무사시에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는 공부는 곧 정시공부요 내정정공부이며, 유사시에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함은 외정정공부에 바탕한 동시공부의 표준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일 없을 때는 일심을 양성하고, 일을 당하면 정의를 행하여 동정간에 여일하게 병진해 나가는 산 공부법이 곧 동정일여의 무시선 공부법이며 그 두 번째 원리이다.
2. 무시선법의 특징
1) 삼학병진(三學竝進)의 선
무시선은 삼학을 병진하여 항상 삼학을 떠나지 않고 생활하여 성품을 단련하는 길이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진공묘유와 동정일여의 원리로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삼학병진의 내정정공부와 외정정공부가 계속되어야 한다.
정신수양(定), 사리연구(慧), 작업취사(戒)의 병진수행을 마치 쇠스랑의 세발처럼 의⸱식⸱주(衣食住)의 삼건(三件)처럼 뿌리, 줄기, 잎처럼, 줄기, 가지, 꽃, 잎, 결실처럼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수양, 연구, 취사가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병진선을 해야만 무시의 원만한 선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응용(應用)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할 것이요.를 삼학병진의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마음을 안정하여 온전한 일심을 모아서 잘 생각하고 판단해서 옳은 일을 죽기로써 실행하는 것이 곧, 일심, 알음알이, 실행을 병진하는 것이 된다.
소태산은 [원만한 공부법은 동과 정 사이에 공부를 여의지 아니하여 동할 때는 모든 경계를 보아 취사하는 주의심을 주로하여 삼대력을 아울러 얻어 나가고 정할 때는 수양과 연구를 주로 하여 삼대력을 아울러 얻어 나가는 것]이라 하였고, 그 일 그 일에 일심을 하고, 알음알이를 구하고, 정의를 실행하라는 것을 삼학병진으로 강조하셨기 때문에 일심, 알음알이, 실행이 삼학의 핵심적 의미이며, 또한, 정전 무시선법에도 삼학을 병진하는 공부법이라 밝혀지고 있으므로, 삼학병진은 무시선의 특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시선은 교리도에 있어서도 진공묘유의 수행문의 총 강령이 된다.
2) 정의실천(正義實踐)의 선
대체로 동양종교에서는 정의실천 문제를 크게 강조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무시선의 강령에 [육근(六根)이 무사(無事)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고 한 것을 보면 유사시에는 정의를 취하고 불의를 버리는 공부를 제시하였다.
여기서 제시한 정의란 일차적으로 법률이 정하는 인도 정의의 공정한 법칙을 의미한다. 인도정의는 만인의 판단을 일치하게 하는 중심사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정의의 개념에는 이상과 같이 하나로 통하지 아니할 때도 있다. 입장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해질 수 있다. 그러나 입장과 상황을 초월해서 판단을 내리게 되면 반드시 하나로 통하는 기준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태산 대종사는 말할 때마다 이르기를 [事必歸正]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그 뜻은 일할 때 항상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솔성하도록 하는 의미가 강력히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는 곧 중도라 할 수 있으므로 정의실천은 곧 중도 실천이 된다. 그러므로 무시선은 [중도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차적으로 정의에 대해서 정산종사는 일심과 정의(正義)의 관계에 대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는 그 일심이 동하면 정의가 되며 반대로 잡념이 동하면 불의가 된다고 설명했다. 정의의 개념을 미리 설정하기 전에 성품에서 나오는 온전한 마음속에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발하도록 양성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정의란 한 생각 바르게 나온 것이니 솔성에 표준을 두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원불교에서는 삼학 중 특히 [작업취사]에서와 함께 이 무시선에서 [정의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정의실천 역시 삼학병진으로 이뤄지며, 삼학공부 중 작업취사와 일치된다. [작업취사]에서도 일을 당하여서는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실천하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학공부 중 작업취사과목을 강조하여 말하길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 데에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로 돌아갈 뿐이요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나니, 예를 들면 줄기와 가지와 꽃과 잎은 좋은 나무에 결실이 없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라 하였으며 취사의 결과로서 [이 공부를 오래 오래 계속하면 모든 일을 응용할 때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을 얻어 결국 취사력을 얻는다.]고 하였다. 무시선 수행은 정의실천을 하게 하는 용심법을 가르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 정의실천문제는 결국 수행문의 결론적인 지침이며, 무시선의 특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Ⅳ. 무시선법의 새로운 조명 : 동학과 관련하여
19세기 말 민족종교의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공동의 대표적인 핵심 사상은 개벽(開闢)사상이다. 개벽운동은 새로운 인류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여 열린 정신운동이며 동학에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권시대가 도래한다고 하였고, 소태산은 이러한 수운의 개벽사상을 이어받아 일원상진리의 신앙과 수행을 통해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조화된 참 문명세계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소태산 박중빈은 1891년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큰 격동의 시대요, 일대 전환의 시대였다. 한 마디로 고난의 시대 그 자체였다.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고, 안으로는 조선왕조 지배체제가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의 민중들을 더욱 위기로 몰아간 것은 서학, 즉 천주교의 만연이었다. 유교적 제사를 부정하고, 신분제를 부정하는 서학의 만연은 조선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을 뿌리 채 뒤흔드는 가공(可恐)할만한 사태였다. 이 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동학이 등장하여 ‘비서구적 근대’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불을 댕겼다는 사실이다.
소태산은 그의 나이 4세 때 전라도 영광 땅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통한 비서구적 근대를 실현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 당함으로써 끝내 좌절되고 만다. 이처럼 혁명이 잉태되었다가 혁명이 좌절된 시대가 바로 소태산의 청소년기 사상형성의 정신적 토양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소태산 대각 후 사회변혁운동을 하였지만 영광이라는 특정 지역에 국한된 운동이었다는 점 등으로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그간의 운동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운동으로 모색한 것이 불법연구회라는 새로운 종교조직의 창설이다. 소태산은 불법연구회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로 상징되는 정신개벽운동을 전개한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의 신비체험을 통해 창시된 종교로서 조선 당국의 박해를 받아가며 교세를 확장해 갔다. 당시 일반 민중들의 삶의 피폐, 양반 관료들의 부패, 외세의 침투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제반 모순에 분노하던 교도들이 1894년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은 만인의 신령한 영성과 불생불멸한 혼을 일깨우고자하는 종교였다. 이와 같이 동학은 내적 자각의 종교이며 동시에 1894년 대대적으로 일어난 동학혁명이기도 하다. 종교성과 혁명성, 내적 깨달음과 외적 사회운동이 하나로 통합되어 제시된 것이다.
동학은 종교이면서 동시에 사회혁명이며, 그럼으로써 내면과 외면, 개인과 사회, 도덕과 법의 통합을 이상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 구현하려했다. 이러한 현실구현의 연장선상에서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은 무시선법의 강령에서 무시선법의 종교성과 혁명성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1. 무시선법의 종교성
무시선법의 핵심 속에서 [육근이 무사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는 자아의 본질을 깨닫는 것으로, 수행자의 길, 구도자의 길로 여겨지는 종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반면에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는 외적으로 사회의 정의 구현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정치가나 사회운동가의 길로 여겨지는 혁명성이 엿보인다. 구호상으로 유교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내성(內聖)과 외적 세계를 이롭게 하는 외왕(外王)을 함께 주장하며, 불교 역시 내적 깨달음에 이르는 상구보리(上求菩提)와 뭇 중생을 구제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동시에 지향한다. 이렇듯, 내성과 상구보리, 일심양성은 종교성에 가깝고, 외왕과 하화중생, 정의실현은 혁명성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종교성과 혁명성의 통합에 대해서 동학에 대한 연구도 종교성과 혁명성 중 어느 하나에 치중하면서 다른 하나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도외시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천도교 측과 해방 전후까지 일본 측의 연구는 비록 전자가 동학을 순수종교로, 후자가 유사종교로 보는 차이를 보이지만 둘 다 종교성에만 치중하여 동학혁명과의 연관을 소홀히 다루었다. 하지만 동학혁명의 원동력은 동학의 종교성의 핵심인 시천주, 철저한 인간 평등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즉, 혁명으로 이어지는 동학의 종교적 핵심은 시천주(侍天主), 한울사상으로서, 누구나 한울은 모시는 신령한 영적 존재라는 것, 그 점에서 누구나 동일하다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평등사상이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한 혁명자체로 동학의 본질적인 종교성의 발현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동학의 개벽사상은 소태산의 청소년기 사상형성의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로인해, 소태산의 사상 속에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세상을 바르게 하는 무시선법이 탄생하게 되었다. 무시선법에서 [사람이 만일 참다운 선을 닦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진공으로 체를 삼고~]라 함은 정신적, 종교적인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진공으로 체를 삼은 고요한 본성에서 묘유를 조절하게 운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시선법에 나타난 종교성은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에 자유를 얻고, 자성을 떠나지 않는 선으로써, 원만구족의 진공인 마음으로 절대평등의 사회를 실현하고, 지공무사의 묘유의 마음으로 상대평등이 되어 전체 속 균형과 조화로 엮어 가는 삶자체가 무시선법의 종교성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 무시선법의 혁명성
동학의 12개조 폐정개혁안은 1894년 동학혁명 과정 중 1차 봉기 이후 2차 봉기로 나아가기 전 집강소 설치시기에 제안된 것이다. 이 개혁안을 통해 동학이 지향하는 비판적 사회혁신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국가관리가, 공정하고 가진 자가 횡포를 부리지 못하며 민족 자본이 국외로 빼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삶의 터전인 토지가 고루 배부되고 신분차별이나 지역차별이 없는 사회, 이것은 1세기 전 동학도들의 이상사회였으며, 그 요구의 관철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는 것은 동학이 얼마나 급진적인 혁명사상 내지 혁명운동이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동학의 후천개벽 사상을 이어받은 원불교의 무시선법에서도 혁명성을 발견할 수 있다. 내적으로 자아의 본질을 깨닫는 것(一心養成)과 외적으로 사회의 정의 구현(正義實現)에 이바지를 한다는 것은 하나로 통합된 동학의 종교성과 혁명성이 소태산의 사상으로까지 연결되어 무시선법에서 그 완성과 구체적인 실천강령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태산은 그 당시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 흐름 속에서 무시선법을 밝혀주신 본의로 보았을 때, 사회운동가, 혁명가라 할 수 있겠다.
원불교의 저력(底力)은 소태산의 실천을 강조한 개벽사상에 있다 할 것이다. 소태산 대각 이후, 큰 공부와 사업을 하기 위해 공부할 비용과 사업할 자금을 예비하기 위하여 저축조합을 창설하고, 그 저축한 금액으로 정관평 방언공사를 시작으로 국가 사회의 생산에 도움이 되고 공익의 길로 나아감이 그 실천의 시작이었다. 불법활용도 불법을 활용하여 안으로 성자의 인격을 지향하고, 밖으로 현실생활을 충실히 발전시켜 영육쌍전의 산 종교인이 되자는 것이다. 실제로 불법의 진정한 의의는 바로 그 활용에서 구현되는 것임을 철저히 자각하지 않으면 진정한 불법활용이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소태산은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 데에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로 돌아갈 뿐이요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나니, 예를 들면 줄기와 가지와 꽃과 잎은 좋은 나무에 결실이 없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라며 취사의 중요성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할 것이요], [부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죽기로써 아니할 것이요,]와 무시선법의 강령과 평등세계 건설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인 사요 등을 미루어 볼 때 소태산은 종래의 불교나 선종에 비해 살아있는 수행, 취사의 표준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다른 차원에서 무시선법의 혁명성을 분석해볼 때, 종래의 수많은 선법 가운데 무시선법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도 그 혁명성은 빛을 발하고 있다. 대체로 종래의 선법은 속세를 떠난 출가 수도인이나 신심 있는 소수의 신도만이 동참하여 행하거나 사가에서도 한정처(限定處)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할 수 있는 소극적인 좌선법이 중심이었으나 이 무시선법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나, 무슨 일을 하거나 간에 또는 일없는 동안에도 행할 수 있는 대중적 선법이며, 혁신적인 생활 속의 선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시선법에 의하면 [이는 곧 천만경계 중에서 동하지 않는 행을 닦는 대법이라 이 법이 심히 어려운 것 같으나 닦는 법만 자상히 알고 보면 괭이를 든 농부도 선을 할 수 있고 망치를 든 공장도 선을 할 수 있으며 주판을 든 점원도 선을 할 수 있으며 정사를 잡은 관리도 선을 할 수 있으며 내왕하면서도 선을 할 수 있고, 집에서도 선을 할 수 있나니 어찌 구차히 처소를 택하여 동정을 말하리요.]라고 하며 동정 간에, 또는 직업이나 처소에 구애 없는 무시선법의 혁신을 잘 밝혀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무시선법에 나타난 혁명성은 두 가지로, 첫째는, 동학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로 통합된 종교성과 혁명성이 그 연장선상에서 무시선법에 구체적인 실천강령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무시선으로 적공하는 사람에게는 온 세상이 선실이 되며, 선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자기에게 있으며 현실 생활 속에 있음을 깨닫는 자체가 무시선법의 혁명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시선법이야말로 복잡다난한 현대사회와 같은 물질만능의 자본사회 속에서 인간성 상실이나 가치관 혼돈 속에 헤메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혁명이라고 본다.
Ⅴ. 결론
이상과 같이 본 논문에서 동학과 관련하여, 원불교 무시선법의 종교성과 혁명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1장에서는 선행연구의 문제점과 연구방법에 대해 살펴보았고, 2장에서는 무시선의 기본이 되는 좌선법에 관한 원리와 그 방법을 고찰해 보았으며, 여기서 단전주법이 종래의 선법의 장점은 살려 쓰되 단점은 보완하는 이상적인 선법임을 알 수 있었다. 3장에서는 무시선의 원리와 특징을 통해 무시선은 대승적인 선법임을 찾아보았다. 무시선의 원리를 진공묘유와 동정일여의 양면에서 고찰하였고, 특징은 삼학병진, 정의실현 등의 측면으로 파악해 보았다. 4장에서는 동학과 관련하여 무시선법에 나타난 종교성과 혁명성을 살펴보았다. 육근이 무사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는것은 종교성과 혁명성을 하나로 통합하여 원불교의 근본이념과 실천목표로서 작용한 것임을 알 수 있었고,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에서 발현된 종교성과 혁명성이 그 시대의 연장선상에서 이어져 소태산 무시선법에 그 완성과 구체적인 실천강령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에 영향을 받은 종교성과 혁명성이 일원상의 진리에 근원하여 무시선의 강령에는 내적으로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중정(中正)의 뜻과, 외적으로 세상을 바르게 하는 공정(公正)의 뜻이 함께하여 무시선의 실천사상이 제시되고 있음을 보다 동학의 종교성과 혁명성을 분석해 봄으로써 무시선법을 실천해 가는 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이다.
이에 따라 우리 모두는 천조의 난측한 이치와 인간의 다단한 일을 미리 연구하였다가 실생활에 다달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여 아는 공부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를 속성으로 구분하자면 공⸱원⸱정이다. 공⸱원⸱정과 과거⸱현재⸱미래, 그리고 삼학이 본래 한 몸체로 함께 공존하는 것과 같이 무시선법 또한 삼학의 상호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수레의 두 바퀴가 폐물이 되었다든지, 또는 한 바퀴라도 무슨 고장이 있다든지 하면 그 수레는 본분을 잃는 것처럼 무시선법 역시,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삼학이 균형을 이루어 병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진공으로만 체를 삼아 향내적(向內的)인 깨달음에 그치는 일심양성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부지중삼학이나 일이 없을 때 일심을 양성하지 않고, 그 잡념이 동하여 불의가 행해지는 원만하지 못한 향외적(向外的)인 실천에만 치우자는 것이 아니라, 무시선법의 종교성과 혁명성을 인식하고, 함께 통합하여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小)자리를 알았다고 해서 대(大)자리가 무시되거나 본체의 세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리와 소자리가 함께 균형을 이루는 실천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 참다운 선법이며, 일원상의 진리이다. 실제 일을 작용하는데 있어, 종교성에만 치우치거나, 혁명성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성과 혁명성을 통합하여 내놓으신 대종사님의 본의를 곱씹으며 실생활에서 사실적으로 선의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원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이 되어 우리 각자가 일원상 진리로 살게 될 때에 비로소 시방 삼계가 다 내 집의 소유가 되고,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 알게 되며, 제불·조사와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게 되고,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게 되며,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 상승과 같이 되는 줄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무시선법을 통해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찰나찰나로 솔성이 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생사 자유와 윤회 해탈과 정토극락을 얻었다고 인증할 수 있을 것이며, 유⸱불⸱도의 제 종교 사상을 수용하고 종래의 선법을 혁신하여 선의 시대화⸱선의 생활화⸱선의 대중화한 원불교의 가치와 대종사님의 본의가 더욱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우리가 원불교의 무시선법에 담긴 종교성과 혁명성을 이해함으로써 생활에 적응하는 선, 생활중심의 선의 미시적인 개념이 아니라 문명의 이기들에 의해 지배되어가고 있는 비인간주의 사회 속에서 일심(一心)으로 동하는 가운데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정의(正義)를 실현하는 거시적인 개념으로써의 무시선을 실천하는 것이 본 논문의 핵심이며, 필자의 바램이다. 그 결과로 원불교가 세계의 정신을 지도할 소임을 맡아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인륜 회복에 앞장서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전 세계가 새로워지도록 모두가 활불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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